# 203
203화 전쟁 속에 피는 꽃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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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계는 하나의 세계지만, 놀랍게도 각 마왕이 다스리는 영토마다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다.
각 마왕이 이끄는 군단에 따라 달라지는 지형 때문에 마계는 하나의 세계이자 다섯 개의 세계로 나뉘게 된다.
당연히 구역마다 특징은 명확하게 구분돼 있다.
유일하게 모든 것이 섞여서 애매하게 변한 구간이 각 마왕의 토지를 가로지르는 <경계>다.
마계의 환경은 그곳을 지배하는 지배자의 성향에 따라 다르게 변한다. 지구와는 다르게 자연의 법칙이나 물리적인 법칙이 통하지 않는 세계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중에서 <경계> 지역은 마왕들의 힘이 서로 충돌하는 구역이라서 그 어떤 마왕의 영향을 받지 않는 그야말로 중립 지역이다.
마왕 대부분은 싸울 때 그곳에서 싸우고는 했다.
홈 버프를 받을 수 있지만, 상대가 바보도 아니고 상대의 진영에 생각 없이 들어오는 일은 없다. 그렇다고 이쪽이 쳐들어가자니 상대가 조금 더 유리하기 때문에 마왕들은 싸움이나 전쟁을 벌일 때마다 <경계>에서 부딪쳤다.
지금도 그랬다.
어딘가 죽어있는 것 같으면서도 생기가 맴도는 붉은 대지. 그것은 푸른 하늘과 대비되어 더욱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 넓고도 황량한 평야 위에서 두 진영이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하고 있었다.
갈라진 대지의 틈새에서 유황이 치솟는 곳. 하늘은 보랏빛 구름으로 가득 뒤덮인 땅에는 파르고잔과 옥사비누스의 군단이 마구잡이로 섞인 채 세아리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반면 세아리스 군단은 질서정연하게 진형을 유지한 채로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커다란 말을 탄 세아리스가 앞으로 나섰다.
“이야기를 좀 하지 않겠는가.”
상대방의 지도자가 나서자 반대편에서 한 악마 또한 앞으로 나섰다. 현찬은 그의 모습을 보고 이름을 듣지 않았지만, 그가 파르고잔임을 확신했다.
마치 반쯤 굳어버린 용암처럼 생긴 5개의 뿔을 지닌 악마는 현찬이 일전에 느꼈던 뜨겁고 기분 나쁜 기운을 풀풀 풍기고 있었다. 불길을 머금은 검붉은 갑주와 머리카락, 턱수염은 그 자체가 화염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갑옷 뒤로 날개처럼 펼쳐진 망토는 그 자체가 일렁이는 불꽃처럼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파르고잔은 그야말로 불꽃의 화신이었다.
그는 평온하게 걸어 나오며 세아리스와 눈을 마주했다.
“여. 세아리스. 오랜만이구나. 그보다 보잘것없는 꼴은 대체 뭐냐? 마왕으로서의 자긍심 따윈 버린 모습이구나.”
“가장 강해서 마왕이 됐으면서 거기에 무슨 자긍심이 필요하단 말인가? 너야말로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는 그 거만한 성깔은 여전하구나.”
두 마왕은 서로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독설을 주고받았다. 이건 평소에도 만나면 자주 벌어지고 하는 기선제압이었다. 어차피 서로 대등한 힘을 지니고 있으니 싸워봤자 의미는 없으니 말로나마 상대를 공격하는 것이다.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니. 여전히 그 커다란 덩치가 남들에게 어떻게 비칠지 두려운 건가?”
“내가 본모습을 드러내면 너희가 싸우지도 않고 도망칠 것 같아서 말이다. 내 배려에 감사하도록.”
“흥. 여전히 입만 살아서 말은 잘하는군.”
“입조차 살지 못한 녀석에게 듣고 싶은 말은 아니구나. 뭐, 잡설은 여기까지 하도록 할까. 어차피 여기까지 왔으면 더 돌이킬 수 없다는 건 서로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정곡을 찌르는 세아리스의 말에 파르고잔은 흥미롭다는 듯이 웃었다.
“네 녀석만 나오지 말고, 뒤에 숨어있는 음흉한 녀석도 나오라 그래라. 옥사비누스 녀석, 이런 자리에서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다니 너무 뻔뻔한 거 아닌가.”
“뻔뻔하다고 하지 말아주겠나. 세아리스. 나는 처음부터 이 자리에 있었다.”
세아리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면에서 연보랏빛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그것은 조금 전부터 몸을 숨기고 상황을 지켜보던 옥사비누스였다. 마왕 셋이 한자리에 모이자 각 군단의 진영이 웅성거렸다.
“모두 조용히 해!”
“다들 입 다물지 못해!”
군단의 일부 지휘관이 소리 지르자 그제야 떠들썩하던 각 진영은 조용해졌다. 세아리스는 말을 이었다.
“오. 음흉한 안경잡이. 네놈도 결국 나오기는 했구나. 다쳤다고 들었는데 어디 몸은 괜찮은 것이냐?”
“네년이 걱정할 필요 없이 나는 아주 멀쩡하다. 세아리스. 너야말로 멍청한 짓을 했군. 네년 혼자서 우리 둘을 막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나?”
세아리스는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의 여유로운 태도에 파르고잔은 썩 재밌다는 미소를, 옥사비누스는 기분이 나쁘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세아리스의 자신 넘치는 행동의 이유는 명백했다.
“누가 혼자라고 했지?”
그렇게 말하며 세아리스의 옆에 선 것은 바로 현찬이었다. 현찬을 보자마자 옥사비누스의 표정이 한층 더 구겨졌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옥사비누스는 다친 옆구리의 상처가 다시 쑤시는 것 같았다.
“그렇군. 네가…… 그때 그 녀석이었군.”
현찬이 파르고잔을 보자마자 알아차렸던 것처럼 파르고잔도 현찬을 보자마자 알아차렸다.
저 녀석이다. 그토록 싸워보고 싶었던 인간. 인간이면서 인간을 초월하는 힘을 지닌 녀석!
그는 알 수 있었다. 현찬이야말로 그가 가장 싸우고 싶어 하던 그 존재라는 것을.
그토록 싸움을 갈구하던 그의 욕망을 해소해줄 수 있는 단비라는 것을.
“둘 다 나를 아는 것 같으니 자기소개는 그만두지. 조금 전 이야기를 그대로 이어가면…… 너희야말로 무슨 깡으로 우리에게 덤빈 거지?”
현찬의 으름장에 옥사비누스는 본능적으로 뒤로 한 발짝 물러서고 말았다. 이내 자신이 한낱 인간 따위에게 겁을 먹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그러나 분노 이상으로 현찬을 향한 두려움이 컸다.
옥사비누스는 아직도 잠을 잘 때마다 꿈속에서 그날 있었던 일을 생생하게 겪고는 했다.
마왕급 셋이 동시에 덤벼도 타격조차 주지 못 했던 절대적인 힘을 휘두르던 인간을.
빛 그 자체로 이루어진 검을 휘두르는 순간 자신의 옆구리에 커다란 상처를 냈던 현찬의 모습을.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껴서 몸을 틀었기에 망정이었지 만약 반응이 조금만 더 느렸다면 그대로 상반신과 하반신이 두 동강 났을 것이다.
다른 공격이라면 재생할 수 있었겠지만, 그 빛의 검은 엄청나게 위험했다.
단순히 스치기만 해도 치명타였기에 깊게 베인다면 무조건 죽었다.
‘이놈은 정말로 위험하다.’
현찬이 지닌 힘은 마왕의 목숨을 위협한다. 이쯤 되면 그에게 고작 인간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서는 안 됐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현찬은 그보다 훨씬 더 강했다.
‘그때의 그 힘을 다시 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놈에게 들은 대로라면 저 인간도 힘을 얻는 것에 약간의 제약은 있는 것 같으니까.’
자신과 파르고잔이 서로 손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검은 그림자. 놈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현찬과 적대하는 녀석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적의 적은 아군이다. 그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지만, 현찬을 상대하는 처지에서라면 어느 정도 믿을 수는 있었다.
‘그래도 저 인간은 위험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
물론, 이쪽도 숨겨놓은 패는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드러내고 싶지 않았지만, 현찬이 상대라면 어떻게든 쓸 수밖에 없으리라.
심각한 옥사비누스와 다르게 파르고잔은 오히려 신이 났다.
“아하하! 뭘 믿고 나서냐고? 당연히 내 힘을 믿고 나선 거지!”
‘저 미친 싸움광 녀석!’
옥사비누스는 파르고잔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얌전히 있었다. 파르고잔은 지금 잔뜩 신이 난 상태였다. 자신의 목표인 현찬이 지금 눈앞에 있었다. 파르고잔은 몸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현찬이 입을 열려는 순간 파르고잔은 손을 들며 현찬의 말을 막았다.
“아아. 쓸데없는 말은 그만두자고. 중요한 건 어차피 우리는 여기에 싸우러 나왔다는 거야. 너희들이 동맹을 맺은 순간 우리는 더 물러설 곳이 없어. 겁을 먹은 채 고개를 숙이라고? 그럴 리가.”
마왕은 절대자다. 그들이 아무리 동급의 존재라 하더라도 고개를 숙일 리가 없었다.
현찬과 세아리스는 파르고잔의 단호한 말에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이렇게 될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결국…… 파멸을 자초하는구나.”
그런데도 세아리스는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르고잔은 피식 웃었다.
“글쎄다. 과연 파멸을 맞이하는 것이 누구인지는 봐야 알겠지.”
어차피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도 싸우기 전에 나누는 일종의 격식이었다. 마왕의 자리까지 간 사람이라면 그래도 지킬 것은 필요하기에 만들어진 의미 없는 규칙이다.
그게 끝났으니 이제 남은 것은 서로 피를 튀기며 싸우는 것뿐.
각 마왕은 각자의 진영으로 돌아갔고 서로 대치 중인 군단들은 격한 살기를 태워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가장 증오로 불타오르는 쪽은 세아리스의 군단이었다.
옥사비누스와 파르고잔의 군단에게 고향을 잃어버린 종족들의 분노는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당장에라도 명령만 내리면 자리를 박차고 저 대군을 향해 뛰어들 기세였다.
멀리서 파르고잔이 뭐라고 외치자 불길에 휩싸인 악마들이 날개를 펼치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각자 염마 갑주를 걸치고 무기를 든 놈들은 자그마한 태양처럼 보였다.
세아리스 군단에서도 악마 종들이 일어났다. 그들 또한 각자 날개를 펼치며 하늘로 날아올랐고 지상의 부대는 방패를 굳건히 든 채 진형을 짰다.
“와아아아아!”
“전부 죽여라!”
“파르고잔 님을 위하여!”
“옥사비누스 님을 위하여!”
파르고잔과 옥사비누스의 군단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두 진영은 서로 상당한 거리를 두고 대치 중이었지만, 악마 종이나 되는 그들에게 이 정도의 거리는 무의미했다. 순식간에 적들이 지척까지 들이닥쳤다.
수의 차이만 놓고 보면 전력은 상대 쪽이 거의 2배에 가깝다.
특히나 파르고잔이 이끄는 군단은 파괴적인 불꽃을 사용하기 때문에 다수 대 다수의 싸움에서 더욱 큰 파괴력을 뽐낸다.
이쪽에는 지구에서 온 고르고 고른 헌터들이 있다고 하지만 군단 단위의 수와 비교하면 너무 적었다.
상성에서도 물량에서도 세아리스의 군단이 불리했다.
그러나.
“그런 불리함마저 모두 극복하는 것이.”
[영웅의 힘이지.]
현찬이 창으로 변한 [테레이오스테]를 땅에 박아 넣었다. 지면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크게 진동했다. 거의 지척까지 접근한 적들의 코앞에서, 빛으로 이루어진 창들이 붉은 대지를 뚫고 우수수 튀어나왔다.
분위기에 휩쓸려 미친 듯이 돌격하던 악마들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창에 온몸이 꿰뚫렸다. 사방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마땅한 계약 영령이 없어도 이미 <아테나>의 권능을 사용하는 현찬의 전투력은 어지간한 수준이라고 볼 수 없었다.
악마연합은 자리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날개를 펼쳐서 위쪽으로 우회하려고 들었다. 그 순간 생긴 빈틈을 세아리스가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변신을 풀고 본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몸을 휘감은 검은 안개가 바람이 가득 찬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고 팽창하더니 그곳에서 거대한 손이 연기를 찢고 나와 악마연합의 전위를 휩쓸었다.
쿠콰콰콰!
뿌연 먼지구름과 함께 거의 100이 넘는 수의 악마가 허공에 흩날렸다. 단순한 휩쓸기 한방에 군단 일부가 깎여나간 것이다. 완전히 변신을 풀고서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 세아리스가 분노한 고함을 터뜨렸다.
“우리에게 덤빈 이상, 네놈들은 절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거대한 덩치에 소리까지 내지르자 무지막지한 소리는 그 자체가 둔기가 되어 세상을 휩쓸었다. 일순 강렬한 폭풍이 몰아쳤고 그 틈새를 찢으며 피처럼 시뻘건 불길이 세아리스를 향해 창처럼 뻗어져 나왔다.
그녀는 가볍게 손등으로 불꽃을 후려쳤다. 멀리 튕겨 나간 불꽃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나 싶더니 눈부신 섬광과 함께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멀리 보이던 산 하나가 통째로 사라졌다.
“파르고잔!”
“대빵은 대빵끼리 싸워야지!”
파르고잔은 그렇게 외치며 오른손을 뒤로 젖혔다. 압축된 지옥의 불길이 투창의 형상을 이루었다. 그것을 집어 던지려는 순간…….
“그래. 네 말이 맞아.”
파르고잔의 등 뒤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파르고잔은 즉시 창을 던지는 것을 멈추고 그것을 쥔 채 몸을 회전시키며 휘둘렀다.
카앙!
그러나 상대방은 파르고잔의 일격을 별 무리 없이 막아냈다.
‘내 공격을 가볍게 막았다고?’
파르고잔은 잠시 거리를 벌리며 뒤로 물러났다. 현찬. 조금 전까지 전위에 있던 그는 어느덧 파르고잔에게 접근해 있었다. 그 이유는 하늘을 달리는 신발인 [탈라리아] 덕분이었다.
“대빵은 대빵 끼리 싸워야지. 우리도…… 그래야 하지 않겠어?”
“…… 재미있군.”
파르고잔의 입가에 미소가 진해지자 그의 불로 이루어진 턱수염과 머리카락이 더욱 강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재미있어!”
파르고잔은 수십 개의 화염 창을 생성하고 현찬에게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