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
202화 전쟁 속에 피는 꽃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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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구구구!
어둡고 습한 동굴 속에 몸을 웅크린 거대한 그림자가 있었다.
잠이라도 빠졌는지 그림자는 거대하고 고른 숨소리를 주기적으로 내며 몸이 부풀어 올랐다 내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순간 멀리서부터 거대한 파동이 동굴 전체를 훑고 지나갔다.
그르르르!
그 묘한 힘은 동굴에서 잠자던 존재를 깨웠다.
규칙적인 숨소리가 점차 뒤틀리더니 이내 거대한 그림자의 중앙에서 눈 두 개가 희미하게 뜨였다.
“이건…….”
어딘가 나른하고 매우 지루해하는 목소리.
무게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심적인 압박감을 주는 위엄이 섞인 기운.
검은 그림자는 잠시 눈동자를 굴리며 고민에 빠지는가 싶다니 다시 눈을 감았다.
“귀찮아. 누가 이겨도 나는…… 그저 방관할 뿐.”
그렇게 게으른 자들의 왕 그라두크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지금 마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부 다 알고 있으면서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의 목을 옥죌지 모르는 것이라 하더라도 지금 당장 그를 움직이게 만들 수는 없었다.
누가 이긴다 하더라도 자신의 위치는 변함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움직이는 것은 귀찮기도 하고.
‘물론…….’
깊은 무의식의 세계에 빠져들기 전,
그라두크는 마지막에 짧은 사고를 이어나갔다.
‘건드리는 녀석은…… 전부 밟는다.’
거대한 그림자는 다시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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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해가 밝았다.
마계는 하나의 세계로 불리지만, 실상 각 군단의 특성에 따라 공간 자체가 다르므로 아침과 밤이 규칙적으로 공존하는 곳은 오직 세아리스의 영토뿐이었다.
사절단들은 잔뜩 긴장한 탓에 일찍 일어났지만, 그들보다 먼저 일어난 사람들이 분주하게 도시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음? 이게 무슨 일이야?”
“글쎄요. 무슨 축제라도 하려는 걸까요?”
“축제를 연다고 보기엔 분위기가 썩 좋지 않은걸.”
특히 감이 좋은 헌터 몇 명은 지금의 상황이 그렇게 좋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도시의 악마들을 제외하고도 다른 타 종족들마저 심각한 얼굴로 분주하게 움직이며 무기를 챙기고 있었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당장에라도 전쟁을 치를 것 같은…… 전쟁?”
제길. 왜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까.
다른 마왕들이 지구와 세아리스의 동맹 관계를 그냥 두고 보고 있을 리가 없었을 텐데.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아낸 헌터는 황급히 현찬을 찾았다. 어젯밤 세아리스의 초대를 받아 첨탑으로 떠난 모습을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돌아온 것을 느끼지 못했으니 그는 아직 이곳에 없으리라.
지금 이 집단에서 그들의 리더는 당연히 현찬이었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이쪽은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위치였다.
“모두 강현찬 헌터님을 찾……!”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왔으니까.”
“엇! 강현찬 헌터님!”
현찬은 이미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는 태도였다. 다른 헌터들도 사실 알고 있었다. 그저 세아리스 군단이 머무는 영토의 평화로움에 취해서 애써 잊으려 들었을 뿐이었다.
이곳에서 곧 커다란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상황은 여러분들이 생각한 게 맞다고 보면 될 거예요.”
“강현찬 헌터님. 그렇다면 저희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지원군을 부르는 게 맞을까요? 아니면…….”
‘싸워야 하는가.’
그 뒷말은 애써 삼켰다. 솔직히 이곳에 온 이유는 평화를 맺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하필 이 타이밍에 악마들의 내전에 휩쓸리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애초에 이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는 했지만, 그저 가능성에 그치길 바랐다.
결국, 불안은 현실이 되었고 당장 해일처럼 밀려와 그들의 목을 옥죄려 들었다.
“싸우는 게 두려우신가요?”
“그, 그건…….”
몇몇 헌터들은 현찬의 시선을 피했다.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부산에서 악마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는 사람들은 없을 테니까.
특히나 현역 헌터들은 당시 부산에서 실시간으로 일어났던 상황을 여과 없이 모두 보았다. 의무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깨달았다.
지금 그들이 적대하는 악마들이 얼마나 끔찍한 녀석들인지.
당연히 싸우는 게 두렵다. 싸우면 죽을 수도 있다. 심지어 이것은 거대한 군대가 맞붙는 전쟁이다. 게이트 안에서 몬스터들과 싸우는 것도 위험한데 전쟁이라면 그보다 더 심각하다.
죽고 싶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싸운다 하더라도 살기 위해서 싸울 뿐.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들은 도망치고 싶은 생각만 가득했다.
현찬도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물어볼게요. 싸우지 않겠다면? 그대로 도망칠 생각인가요?”
“아, 아뇨. 그건 아니고, 지원군을 부르는 게 훨씬 더 나은 것 같아서…….”
“지원군을 부르려고 한다면 다시 지구로 돌아가서 사람들을 불러 모아야겠죠. 그만한 인력과 무기를 준비하는 데 과연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 같나요? 그 사이에 이곳의 시민들은 얼마나 버틸 것 같죠? 그리고 잊지 마세요. 이곳이 끝나면 다음 목표는 자연스럽게 저희가 됩니다.”
그렇다면 어쩌겠는가. 당연히 싸워야지.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이 회담을 위해 오버랭크 헌터가 왜 둘이나 왔다고 생각하는 거죠?”
무엇보다.
싸우는 것은 그들만이 아니다.
“이 영토의 모든 사람은 저희와 함께 싸울 겁니다.”
그러니 함께 싸웁시다.
“저도 참여하겠어요.”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며 양 리화가 나섰다. 또 다른 오버랭크 헌터의 참전에 다른 헌터들도 술렁거렸다. 그래도 그들은 결국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그들도 나름의 각오를 하고 이 사절단에 참여한 사람들이었다. 이곳의 평화에 빠져서 싸움을 피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결국에 그들이 가지고 있던 마음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다들 눈빛이 바뀐 것을 보고 현찬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다들 가시죠.”
동맹국을 지키러.
세계를 지키러.
&
“오. 역시나 왔구나.”
첨탑으로 다가가니 그곳에서 인간의 모습을 유지한 세아리스가 현찬을 반겼다.
“그보다 상황은?”
“매정한 남자구나. 나와 같은 침대에서 하룻밤을 보냈으면서.”
“가, 같은 침대……?!”
세아리스의 말에 가장 격하게 반응한 것은 양 리화였다. 그녀의 얼굴이 잔뜩 열이 올라서 붉게 물들었다. 머리 위로 증기가 뿜어 나오고 양 리화의 영령인 구천현녀는 현찬을 배신 어린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그대. 그런 남자였나. 여자를 돌처럼 보는 남자라고 생각했거늘.]
“아니. 남들이 오해할 말은 하지 말아줄래?”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세아리스는 장난스럽게 혀를 삐죽 내밀었다. 현찬은 그녀의 의도적인 장난에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아리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양 리화가 생각하는 것과 완전 같지도 않았다.
자신의 방에 처음 찾아온 손님에 잔뜩 흥분한 세아리스는 제발 현찬에게 가지 말아 달라고 빌었다. 현찬은 그녀가 정말로 외로워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마음이 약해져서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세아리스가 잠을 청하는 침대는 너무나도 거대해서 서로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잠을 잘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물론 걱정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현찬을 향한 무언가 음심이 있다 하더라도 헤르메스가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이상 절대로 세아리스가 현찬에게 손을 대는 것은 불가능할 테니까.
그래서 잤다. 운동장만큼 거대한 침대에서.
“침대 크기가 무슨 운동장만 한데 거기서 잔 걸 같이 잤다고 볼 수는 없잖아.”
“그래도 한 침대이지 않은가?”
“너 일부러 나 놀리려고 그러는 거지?”
“들켰구나.”
양 리화도 그제야 세아리스가 장난으로 말을 꺼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구천현녀도 괜히 머쓱해져서는 고개를 픽 돌리며 투덜거렸다.
[쯧. 언제쯤 우리 리화는 패기 있게 말을 꺼낼는지.]
“…… 나중에요.”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일단 상황을 말해줘. 이렇게 급하게 움직이는 걸 보니까, 역시 녀석들도 움직인 게 맞지?”
“응. 그래 맞다. 옥사비누스 녀석이 파르고잔과 손을 잡았어. 이미 이런 상황을 예상했는지 놈들은 이미 군대를 결집해서 국경으로 다가오는 중이다.”
“되게 빠르군.”
물론 기습을 당할 생각은 없었다. 이쪽도 평소에 항상 타 마왕의 군단을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지면 즉시 전시 태세로 돌입할 수 있을 정도로 잘 훈련된 군단이었다.
하물며 녀석들이 움직일 것을 알고 있었으니 대비까지 해뒀다.
“그렇다 쳐도 전력의 차는 당연히 난다. 녀석들은 2개의 군단이고 이쪽은 결국 하나니까.”
각 군단이 서로 동등한 전력을 유지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단순 계산으로 상대방의 전력이 이쪽의 약 2배라는 소리였다. 사절단의 전력은 군단을 상대로 비교하면 매우 모자랐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숫자 놀음은 결국에는 진정한 강자가 나오지 않고 비슷한 녀석들끼리 붙었을 때만 먹히는 것이다.
“지금 와서 전쟁은 수로만 하는 게 아니지.”
“그렇지.”
그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세아리스는 피식 웃었다.
상대 군단에 버금가는, 아니 어쩌면 그 이상 가는 전력을 단 일개 개인이 지닐 수 있는 것이 지금의 세계였다.
그리고 현찬은 거기에 충분히 명단을 올릴 정도로 강했다.
물론 같은 오버랭크 헌터인 양 리화 또한 마찬가지다. 지금 들어서는 현찬보다 상대적으로 실력이 떨어지는 그녀지만, 비교 대상이 현찬일 경우에 그러지 양 리화 또한 그 자체적인 전투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저도…… 갚아 줄 것이 있으니까요.”
양 리화는 일전 부산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서 충분한 각오를 다졌다.
“훗. 좋아. 이렇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상대는 마왕 둘. 다만 한쪽은 다쳐서 완전한 힘을 내지 못하는 상태.
반면 이쪽은 마왕이 하나지만, 그 마왕에 필적하는 존재가 무려 둘이나 있다.
진짜 강자를 기준으로 하면 전력은 오히려 이쪽이 앞선다.
‘하지만…… 뭔가 걸리는 게 있단 말이지.’
아무리 저쪽이 인원수가 더 많다고 하더라도 실질적인 전력은 이쪽이 우세하다. 마왕이 바보도 아니고 그것을 모를 리가 없다. 당장 7대 천사와 계약한 현찬을 상대로 싸우지 않고 후퇴한 옥사비누스는 상황을 읽는 눈이 탁월했다.
그것이 그를 살렸는데, 여기서 전쟁을 벌인다?
겔루키스도 버리고 자존심도 버리고 도망친 마왕이 이제 와서?
분명히 무언가 있는 게 틀림없다.
“세아리스.”
“아아. 나도 알고 있다. 옥사비누스 녀석, 분명히 무언가 숨겨둔 패가 더 있는 거겠지.”
다만 그것을 지금 상황에서 딱히 알 방도가 없었다.
“우선 녀석들을 맞이하는 것이 먼저다. 여기서 늦장 부리는 순간 놈들이 한발 치고 나와서 우리 영토의 경계를 넘어올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래. 일단 가야겠네.”
현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자신을 믿고 따라온 지구의 헌터들이 있었고, 그 뒤로는 세아리스의 군단이 한가득했다.
군단이라고 해도 다른 마왕들의 군단처럼 악마들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악마 종보다 타 종족의 숫자가 더 많은 정도였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멸망해버린 세계의 생존자들.
무공을 사용하는 사람들, 온몸이 나무로 이루어진 종족, 덩치가 크고 팔이 4개가 달린 종족도 있었고 키가 자그마한 종족도 있었다.
생김새가 너무나도 다양한 그들이었지만 전혀 다르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의 강한 의지가 담긴 눈빛 때문이었다.
더 싸움에서 패배하지 않겠다는 뜨거운 열의가 타오르는 시선.
현찬은 그들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출발하자.”
세아리스의 명령에 군단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