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화.
200화 마왕 연합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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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 좋은 소식은 아닌걸.”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말로 심각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다른 마왕들이 서로 손을 잡는다는 건 이미 마계의 균형이 크게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현찬은 세아리스에게 알고 있는 걸 더 설명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설명을 이었다.
“나라고 지금 완전히 알고 있는 건 아니라서 말이다. 그 정보를 얻은 것도 최근의 일이다. 그마저도 서로의 영토를 나누는 국경 너머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보였다는 것만이 유일한 증거겠지.”
수상한 움직임이 보였다. 그것만으로 전쟁이 시작된다거나 다른 마왕들이 서로 연합한다는 예측은 조금 과장된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바꿔서 말하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다섯이서 균형을 이루던 세계인데 거기서 하나는 죽고 다른 하나는 큰 상처를 입었으니 균형은 무너졌지. 원래부터 잠자코 기회만 지켜보던 다른 마왕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고 말이야.”
“그 말 그대로다. 당장 나도 그대의 차원과 손을 잡지 않았는가. 오히려 우리의 이런 움직임이 다른 마왕들에게 경각심을 크게 심어준 것일지도 모르지.”
“한 번 무너진 균형은 다시 짜 맞출 수 없겠지. 그렇다면 남은 건 서로의 생존을 위한 목숨을 건 싸움뿐.”
아마 다른 마왕들은 불안해졌을 것이다. 겔루키스가 죽었고 그 겔루키스를 죽게 만든 장본인이 세아리스와 손을 잡았다. 평소 세아리스가 악마 종 중에서도 별종 취급을 받는 걸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절대 좋게 보이지 않으리라.
겔루키스와 옥사비누스를 상대로 밀리지 않고 이긴 인간이 세아리스와 손을 잡았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세아리스의 전력은 지금의 균형을 무너뜨릴 정도로 강해진다. 그 어떠한 마왕도 세아리스의 힘에 도전하지 못하는 비대칭 상황이 이어질 것이다.
애초에 균형은 이미 심마왕 겔루키스가 죽은 시점에서 무너졌다.
남은 것은 전쟁뿐.
“아무래도 음흉한 옥사비누스 녀석이, 복수심에 단단히 벼르고 있는 것 같더구나. 녀석의 영토와 맞닿은 파르고잔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
“파르고잔…….”
파르고잔이라면 현찬도 잘 알고 있다. 녀석과 직접 대화도 나눴다. 원래라면 지구를 침략했어야 할 군대는 파르고잔의 군대여야 했을 것이다. 놈은 이미 현찬을 상대로 언젠가 싸우겠다고 다짐한 녀석이었으니까.
세아리스 군단과 지구가 동맹을 맺은 건 이미 마계 전역에 퍼져나갔을 것이다. 이미 지구를 눈독 들이고 있던 파르고잔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거기에 지구를 향해 복수심을 지닌 옥사비누스까지 가세했고, 둘은 의기투합을 했으리라.
“그렇다면 마지막 남은 마왕은 ”
“그라두크 말인가 ”
멸세마왕(滅世魔王) 그라두크.
아직 그 정체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유일한 마왕이었다.
세아리스는 그녀에 관해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그 녀석에 관해서는 나도 잘 장담할 수 없겠구나. 다만 함부로 움직이는 녀석은 아니라는 것은 알 것 같다.”
“어째서 가만히 있으면 가장 불리한 게 지금 다른 마왕들의 처지 아닌가 ”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라두크 녀석도 워낙 별종이라 말이다.”
세아리스는 그라두크가 어떤 마왕인지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멸세마왕(滅世魔王) 그라두크.
세상을 멸할 힘을 지닌 이 마왕은 그 이명답게 여러 차원을 직접 쳐들어가 혼자의 힘으로 쓸어버린 전적이 있는 마왕이다. 자신의 의지만 있다면 어지간한 물질은 전부 다 파괴해 버리는 그의 권능은 같은 마왕을 상대로도 매우 위협적이었다.
다만 그 그라두크는 세아리스와 마찬가지로 조금 독특한 취급을 받는 마왕이기도 했다.
그라두크에게 멸세마왕이라는 이명이 있지만, 다른 이명도 여럿 있었다.
웅크리는 그라두크.
게으른 왕 그라두크.
꿈꾸는 그라두크.
다른 마왕들에게는 약간의 경멸의 감정을 담아서 이렇게 불리고는 한다. 그 정도로 마왕 그라두크는 말 그대로 가장 ‘게으른 왕’인 것이다.
“녀석은 자신의 거처에서 잘 나오지 않아. 함부로 움직이지도 않지. 분명히 바깥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녀석도 알고 있을 거다. 하지만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 것이 녀석의 특징이야. 어떻게 보면 게으른 거고…….”
“어떻게 보면 아주 신중한 거겠네.”
“그런 거다. 물론 한창 <대통합>이 벌어졌을 때, 다른 세계로 넘어가서 무지막지한 학살을 자행하고는 했지만, 사실을 알면 다르다. 그마저도 그쪽 차원의 녀석들이 겁도 없이 가장 만만한 그라두크를 먼저 건드렸기에 그런 일이 벌어진 거지.”
그라두크 군단의 특징은 먼저 건드리지 않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들이 다른 차원을 침략하여 짓밟은 것도 가장 근본적인 원인을 따지면 해당 차원에 있었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쭈욱 한결같던 녀석의 태도를 생각하면 옥사비누스나 파르고잔이 움직여도 그라두크는 가만히 있을 것이다.”
“그건 좀 다행이네.”
아무리 현찬이라도 상대가 마왕이 셋이나 되는 전력이라면 힘들어진다. 지구에서 싸우면 모를까, 이쪽 마계에서 싸운다면 현찬도 마땅한 방도가 없었다.
“현찬. 네가 예전에 선보였던 그 성스러운 능력을 사용하면 다른 마왕도 손쉽게 쓰러뜨릴 수 있는 거 아니었는가 ”
세아리스는 현찬의 싸움을 보았기에 현찬이 마왕과 싸움에서도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혼자서 셋이나 되는 마왕을 쓰러뜨릴 정도였으니 그 힘은 세아리스보다 한참 위다.
지금은 그 상대가 파르고잔으로 바뀌었지만, 옥사비누스는 상처를 입었으니 이전 싸움보다 상황이 좋다고 할 수 있었다.
현찬은 머리를 긁적이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놈들이 지구로 넘어와서 싸워준다면 모를까, 다른 차원인 여기에서 그만한 힘을 사용하는 것은 무리야.”
7대 천사를 부른 것은 그곳이 지구이기도 했으며 서다은의 계약 영령인 <잔 다르크>를 통해서 신의 힘을 잠시 빌린 것도 컸다. 물론 한 번 계약의 물꼬를 터놨으니 다음에도 마음만 먹는다면 다시 부를 수 있지만, 그 부담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지구에서도 그만한 힘을 다루는 건 엄청나게 지치는 일이야. 하물며 여기라면 당연히 불가능하지. 일단 다른 세계이니만큼 동시다발적으로 우리 세계의 신들을 여럿 부를 수가 없어.”
“끄응. 이거 골치가 아프구나.”
“아니. 그렇게 문제 될 정도는 아니야.”
여러 명을 부르지 못할 뿐이지, 신급 영령 자체를 부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현찬이 마음만 먹는다면, 정말로 강력한 신을 불러서 싸울 수도 있으니까.
다만 충분히 고려해야 할 부분이 있는데, 이곳 마계는 <엘 드라코>와 다르게 영령들의 기운이 충만한 곳이다. 아무리 <대통합>으로 세계가 연결돼 있다고 해도 지구의 영령을 이쪽 세계에 오랫동안 부를 수는 없었다.
현찬과 직접 계약한 헤르메스와 아테나는 예외지만, 다른 신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걸 생각하면 만약 싸움이 벌어졌을 경우 그것은 시간 문제의 양상을 띨 것이다.
세아리스는 참 골치가 아프다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파르고잔이 옥사비누스와 손을 잡은 상황은 귀찮았고 그라두크가 과연 이번에도 가만히 있을지조차 걱정이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이번만 넘기면, 그래도 결국 우리들의 승리니까.”
“그래. 그렇겠구나. 그리고 현찬, 너에게 이 사실을 꼭 알려줘야만 하는 것이 있다.”
“알려줘야 할 사실 ”
설마 다른 무언가가 더 있단 말인가.
세아리스의 표정을 살피자, 그녀의 얼굴은 조금 전보다 훨씬 더 진지했다.
무언가 있는구나.
그리고 그것이 확실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정보라는 것 또한.
“지금은 죽고 없는 겔루키스와 옥사비누스가 서로 손을 잡았을 때 그 누구보다도 먼저 움직인 건 바로 나였다. 평소에 얼굴을 마주치기만 해도 으르렁거린 둘이 대체 어떻게 동맹을 맺었는지 그 내막이 궁금했으니 말이다.”
세아리스는 거대한 덩치에 맞지 않게 마계에서 은신 잠행이 가장 뛰어난 악마였다. 그녀는 자신의 특기를 최대한 살려 군단의 경계선을 넘어섰다. 평소라면 눈치챘을 마왕들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녀의 존재를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보았다. 그 두 녀석 사이에, 다른 누군가가 하나 더 있었다는 걸.”
“설마 루시퍼 ”
“그 붉은 머리의 미청년이라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군. 모습을 가리고 있어서 확신할 수 없었지만, 분명히 그 루시퍼라는 청년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우리 악마들과는 다른 매우 이질적인 것이었지.”
그리고 그것이 매우 강력한 존재의 것이라는 것까지 알 수 있었다.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지 못했다. 그저 온몸이 검고 불길한 그림자로 이루어져 있는 것만 알 수 있었지. 나는 거기까지 확인하고 바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조금 더 머물렀다가는 들킬 위험이 있었으니까.”
“루시퍼가 아닌 다른 존재가 거기에 있었다고 그게 가능한 건가 ”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그 존재는 확실히 거기에 있었다. 아아. 이렇게 설명하니까 잊고 있었던 일이 떠오르는구나.”
“잊고 있었던 일이라니 ”
“내게도, 그 정체불명의 녀석으로 추정되는 놈이 찾아왔었다. 그것도 아주 예전에.”
“뭐 ”
현찬은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세아리스의 말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완전한 <대통합>이 일어나기도 전에 다른 존재는 이미 마계로 넘어갔었다는 소리였다.
“그래. 점점 선명하게 떠오르는구나. 분명히 그 불길한 기운, 옛날에 봤던 녀석과 흡사했어. 이상하군. 그런데 나는 왜 그런 독특한 기운을 쉽게 떠올리지 못한 거지 ”
“그건…….”
[인식 저해.]
대답한 것은 헤르메스였다. 그의 고운 얼굴의 표정도 상당히 심각하게 구겨져 있었다.
“헤르메스 ”
[인식 저해 때문에 그런 거야. 예전에 만났지만, 그 이후로 봐도 그때 만났다는 사실 자체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게 하지. 완전히 기억을 막는 것이 아닌 교묘하게 떠올리지 못하도록 비틀리게 만드는 거야.]
“하지만…… 대체 누가.”
세아리스는 마왕이다. 그녀에게 이런 인식저해를 걸 정도라면, 상대는 최소 세아리스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 가는 힘을 지녔다는 것이다.
“그래! 기억났다. 이제 완전히 기억났어. 녀석은 그때도 자신의 몸 전체를 타오르는 검은 불꽃으로 감싼 채 내게 다가왔다. 손을 잡아서 함께 움직이자고, 내게 동맹을 제안했다. 그렇게 한다면 이 지긋지긋한 마계의 교착 상태를 없애주겠다고 했지.”
“거절한 거야 ”
“그렇다. 녀석의 제안은 달콤했지만, 그만큼 너무 수상했기 때문이지. 내 부하들 몰래 내게 접근해서 그런 제안을 하는 녀석 치고는 제대로 된 녀석을 보지 못했다. 애초에 자신의 모습을 감춘 시점에서 녀석의 제안은 내게 필요 없었다. 단칼에 거절했지.”
“그랬더니 녀석은 그냥 떠났어 ”
“아무 말 없이 사라졌다. 지구 세계로 말한다면,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해야겠지. 그 녀석이, 지금 와서는 다른 마왕들과 손을 잡은 것이다.”
“…….”
현찬은 상황이 썩 좋은 게 아님을 알았다.
몇 년 전부터 그랬다는 건 상대는 이미 다른 차원을 왕래할 수 있었다는 소리다.
그리고 그 검은 그림자의 녀석이 <루시퍼>와 연관이 있음은 확실했다.
루시퍼의 수준에서 그치지 않는다.
녀석은 분명히 악신회와 관련된 존재다.
‘어쩌면…… 악신회의 주인 일지도 모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