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화.
195화 광란의 파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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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여기는 어디지 ”
아픈 머리를 쥐어 싸매며 황설영이 몸을 일으켰다. 스르륵. 그녀의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전날 술을 많이 마셔서 숙취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지끈거리는 두통에 황설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소파의 등받이에 기댈 수 있었다. 여전히 시야가 흐릿했고 목이 탔다. 잠에서 막 깬 탓에 시야는 여전히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옜다. 황설영은 손을 더듬으며 약간 쉰 목소리로 물을 찾았다.
“물…… 물…….”
“여기요.”
“아, 아아. 고맙…….”
너무 목이 말랐던 탓에 황설영은 그 말을 끝맺지 못하고 바로 물을 들이켰다. 꿀꺽꿀꺽! 너무 급하게 마신 탓에 상당한 물이 그녀의 목을 타고 흘러내려 옷깃을 적셨다. 황설영은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후유. 사, 살 거 같다.”
그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이성이 돌아왔다는 것이 옳은 말이리라.
황설영은 깨닫고 말았다. 여기가 자신의 집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독신이다. 그런 그녀의 집에는 당연하게도 아무도 없다. 그녀가 물을 찾는다고 물을 건네주는 손도 없다. 그런데 물을 찾는 순간 누가 건네주었다 도둑이 들 리는 없다. 그렇다는 건 단 하나.
여기는 그녀의 집이 아니었다.
‘아.’
황설영은 그제야 지난밤이 떠올랐다. 맥주 반 캔을 마시고 취해서 온갖 추태를 다 부렸던 일이!
필름이 끊이지 않아서 취했을 때 기억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지우려 하면 할수록 생생하게 떠오를 정도로 선명하게.
술을 마시고 현찬에게 추태를 부리고, 과일을 먹으며 눈물을 뚝뚝 흘리던 일들이 전부.
황설영은 잘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들어 올리며 자신에게 물을 건네준 사람을 바라보았다.
부디 아니길 빌었지만, 현실은 가차 없었다.
현찬은 황설영을 내려다보며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잘 주무셨나요 ”
“가, 강현찬 헌터님.”
“네. 왜 그러세요 ”
현찬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늘 그렇듯이 부드럽고 친절했다.
하지만 그와 오랫동안 만나온 황설영은 느낄 수 있었다. 지금 현찬은 웃고 있지만, 웃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딘가 묘하게 평소와 다르다. 그 현실이 확실히 다가왔다.
“아뇨. 그게…….”
“그게 뭐요 ”
“그, 죄, 죄송했습니다!”
황설영은 고개를 푹 숙이며 현찬에게 사과를 건넸다. 아직 숙취가 남아 있어서 조금 어지러웠지만 헌터로서 발달한 균형 감각으로 버텨냈다. 황설영은 술에 약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헌터는 인간의 신체 능력을 초월한 존재. 그러면 신진대사도 강화되어야 하는데 정작 그녀는 술에 약해도 너무 약했다.
‘헌터가 되고 술에 강해졌는데도 이 정도면 각성하기 전의 나는 대체 얼마나 술에 약했다는 거야 ’
알코올 냄새만 맡아도 취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만 들 뿐이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집주인 앞에서 술에 취해서 추태를 부리고 허락도 받지 않고 하룻밤 묵었으니 그 죄스러움은 이루 말로 표현을 하지 못할 정도.
황설영은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현찬의 말만을 기다렸다.
혼나겠지 되게 잔소리 듣겠지 아무리 현찬이 친절하다 하더라도 이건 봐줄 수 없겠지
시간이 흐를수록 그에 비례하여 황설영의 걱정은 쌓여만 갔다.
“후유. 고개 드세요. 설영 씨.”
“네.”
현찬의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확실히 누그러져 있었다. 용서해 준 건가 황설영이 고개를 들었다.
“요, 용서해 주시는 건가요 ”
“용서고 뭐고가 어디 있겠어요. 사람이 취하면 그럴 수도 있지. 애초에 술이 그렇게 약한 설영 씨에게 술을 먹게 놔둔 제 잘못도 있긴 하지만요. 집주인으로서 신경을 써야 했는데 죄송했어요.”
“아, 아뇨! 강현찬 헌터님은 아무 잘못 없습니다! 자 제가 자초한 일입니다. 제가 조금만 더 조심했더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그러시군요.”
황설영은 현찬의 말에 어딘가 마음의 안정이 찾아온 것 같았다. 미움받을 각오도 했는데 여기서 끝난 건 어떻게 보면 천운이 따랐다고 해도 좋았다.
“자, 그러시다면 본인의 추태를 확인할 시간이겠죠 ”
“네, 네 ”
현찬이 꺼낸 말에 황설영은 순간 그가 무슨 소리를 한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추태를 확인할 시간 그게 대체 뭐란 말인가
그녀가 묻기도 전에 현찬은 주머니에서 최신형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거기에 저장된 동영상을 재생하는 것이 아닌가
재생된 영상에서는 황설영이 절대로 떠올리기 싫은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 으흐흑! 흐아아앙! 미안해! 오렌지야! 근데 너무 맛있어! 멜론도! 참외도! 수박도 꿈이 있었을 텐데! 으어엉! 맛있어! 흑흑!
황설영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녀의 입꼬리가 경련을 일으켰고 손가락이 바르르 떨렸다. 그러는 사이에도 영상 속의 그녀는 계속 과일을 씹어 먹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눈에서는 눈물을, 입에서는 과즙을.
너무나도 끔찍한 모습이었다.
“으아아아아! 가, 강현찬 헌터님 이게 뭡니까 !”
“뭐긴 뭐겠습니까 당연히 설영 씨가 취했을 때의 모습이죠.”
“지, 지워주십시오!”
“안됩니다. 두 눈 똑바로 뜨고 보세요! 당신이 저지른 죄악을! 설영 씨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피하지 않고 마주하세요!”
“으아아아아!”
영상 속의 황설영은 과일을 먹다가 자신을 촬영하는 현찬과 눈이 마주쳤다.
- 으으. 강현찬 헌터님은 너무합니다. 주변에 여자들이 이렇게나, 이렇게나 많으시다니.
“아닙니다! 이건 제가 아닙니다! 제가 이랬을 리가 없습니다!”
“과거를 부정하지 마세요. 이건 설영 씨가 맞습니다. 자, 이제 곧 하이라이트 부분 나오겠네요.”
황설영은 현찬의 휴대전화를 빼앗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현찬이 몸을 재빠르게 뒤로 빼며 그녀의 손길을 피해냈다.
- 강현찬 헌터님. 저는 여자로서 매력이 없는 걸까요
“아아아아! 안 돼! 안 돼!”
- 맨날 무뚝뚝하고. 치마도 안 입고 바지만 입고. 완전 선머슴 같죠
“아니야! 이럴 리가 없어! 멈춰! 그만둬! 안 돼!”
현실의 황설영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영상 속의 황설영은 무언가 크게 고민하는 듯하더니 어디에서 보고 주워들은 게 있는지 두 손을 자신의 볼에 가져다 댔다.
- 이찌요~. 설영이, 안 귀여워요 뿌잉뿌잉.
“…….”
그것이 결정타였다. 새하얗게 타오른 황설영은 그대로 옆으로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현찬은 그런 황설영의 모습을 보며 동영상 재생을 종료했다. 이렇게 인생의 큰 쓴맛을 보았으니, 이제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지.
‘나도 이런 걸 원하지 않았어. 하지만 앞으로 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
그리고 휴대전화에 저장된 흑역사 영상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거실에 소주병들과 함께 널린 다음 목표들이 남아 있었으니까. 현찬은 먹잇감을 노리는 포식자의 눈빛으로 다음 목표에 다가가 어깨를 흔들어 잠을 깨웠다.
잠시 후.
현찬의 집 안에는 여성들의 비명이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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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큭큭! 크흐흐흡!”
늦은 아점을 먹다 말고 헤르메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세아리스와 그랑데우스, 아렌디르와 황설영마저 떠나고 겨우 평화가 찾아온 집. 거기에 적막을 느낄 틈도 없이 헤르메스는 뭐가 그렇게 웃긴지 히죽히죽 웃었다.
“뭐, 뭐가 그렇게 웃기냐!”
안 그래도 현찬의 휴대전화에 자신의 흑역사가 저장된 아테나로서는 헤르메스의 행동이 너무 거슬렸다. 그녀가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헤르메스는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였다.
“뭐가 ”
“조금 전부터 밥 먹다 말고 기분 나쁘게 웃지 않았느냐! 신으로서의 위엄을 지켜라!”
“흐음 신의로서의 위엄이라아~ ”
헤르메스가 일부러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그 위엄을 지키신 지혜의 여신님이 어젯밤에 무슨 짓을 했더라 ”
“윽! 그, 그건…….”
할 말을 잃은 아테나가 시선을 피했다. 찔리는 게 있는 처지로서 이 상황에서 더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면 불리한 건 아테나였다. 그녀는 어떻게든 이 주제를 넘기려고 했지만, 헤르메스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술에 취하지 않는다고 호언장담해놓고. 장난 아니었지 ”
“시, 시끄럽다!”
“‘난 노처녀가 아니야~! 나는 처녀를 맹세했다! 그런데 나도 남친 사귀고 싶다고~!’”
헤르메스는 아테나가 했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읊었다. 심지어 외로움에 찌든 솔로의 말투와 감정까지 고스란히 재현해서 쓸데없이 성대모사 질이 높았다.
“헤르메스! 그 입 다물지 못할까!”
“‘포세이돈 이 사악한 영감탱이! 내가 뻔히 외로운 걸 알면서 메두사랑 내 신전에서 연인 사이를 과시해 !’”
“헤르메스!”
“‘내가 이렇게 보여도! 응 황금사과를 받을 수도 있었던 몸이라 이 말…… 구웨에엑!’”
“…….”
마지막에 토를 한 것까지 똑같이 따라 한 건 그야말로 화려한 피날레였다.
아테나의 얼굴에 그늘이 졌고 헤르메스는 그제야 자신이 조금 놀리는 게 지나쳤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끼기긱!
아테나의 손에 쥐어진 쇠젓가락이 악력에 휘어졌다. 헤르메스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평소라면 한계치에 닿을락 말락 선을 지키면서 놀렸을 텐데 이번에 너무 신난 나머지 적정선을 넘어버린 것이다.
“…… 날 도발하다니 배짱 한번 두둑하구나. 그렇다는 건 그 각오도 되어있다는 것이겠지 ”
“아하하. 우, 우리 누나가 왜 이렇게 화가 났을까 사람이 술에 취하면 응 그럴 수도 있지.”
“난 신이다.”
“시, 신도 그래. 취하면 그럴 수도 있지. 안 그래 현찬아 ”
헤르메스가 도와달라는 시선을 보냈다. 현찬은 그것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며 에크티에게 웃으며 말했다
“에크티. 오늘 반찬 맛있네. 요리 실력이 더 좋아진 것 같아.”
“감사합니다. 현찬 님.”
“강현찬! 이 배신자!”
“배신자는 누가 배신자야! 너야말로 어제 내가 취한 사람들 다 어떻게든 돌봐주는 거 도와주지도 않고 웃으면서 지켜봤겠지 응 그때 재밌었지 내가 고생하는 거 구경하는 거 말이야.”
그러니 이번에는 헤르메스 차례였다.
눈치가 빠른 헤르메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치려고 했지만, 그보다 더 눈치가 빠른 것이 아테나였다.
특히나 분노로 힘이 오른 그녀는 바로 헤르메스의 팔뚝을 꽉 쥐었다. ‘전쟁의 여신’이라는 칭호답게 잘 잡힌 그녀의 근육이 도드라졌다. 헤르메스의 가녀린 팔로는 절대 벗어날 수 없었다.
“저 방 안에서 처리해.”
“알겠다. 금방 끝내도록 하지.”
“현찬아 현찬아! 내가 잘못했어! 부디, 부디 자비르으으으을!”
“자비는, 내가 아니라 아테나에게 구해야지.”
현찬은 헤르메스에게 수고하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헤르메스는 애처롭게 손을 뻗었지만, 아테나에게 강제로 방에 끌려 들어갔다.
평소에 아테나가 헤르메스를 조질 때 자주 들리는 ‘체벌실’이라는 곳이었다.
너무 자주 이런 일이 있다 보니 남는 방에 현찬이 하나 따로 마련해준 공간이었다.
쿵.
체벌실의 문이 닫히고, 헤르메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어스름달만이 모르는 척하고 밥을 먹을 뿐이었다.
현찬은 말없이 휴대전화를 만졌다.
세아리스와 아렌디르, 그랑데우스도 지구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휴대전화가 필요해서 정부에서 마련해주었다. 현찬은 그들끼리 모이는 단톡방을 따로 팠다. 다들 머리는 비상하니 이런 걸 다루는 데 큰 지장이 없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찬은 단톡방에 전날 술자리에서 찍은 사진과 동영상을 올렸다.
‘너희의 죄악을 보라.’
그 말을 남기고 흑역사로 타오르는 단톡방의 창을 닫았다.
“후유. 오늘따라 날씨가 좋구나.”
현찬은 창밖에 비치는 밝은 햇빛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런 현찬의 귀에는 헤르메스의 비명과 그를 구타하는 소리가 감미롭게 맴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