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화.
189화 마왕 세아리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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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호호. 놀랍구나. 그대는 나를 보고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구나 ”
덩치가 산만 한 세아리스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꺼내자 대기가 크게 진동했다.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자. 마왕 중에서도 괜히 하늘을 울린다는 수식어를 받은 게 아니었다.
“다른 두 마왕까지 쓰러뜨렸는데 내가 왜 두려워해야 하지 ”
“그래. 그랬지. 그 우둔한 겔루키스는 죽고, 음험한 옥사비누스는 상처 입고 도망쳤지.”
어디 그뿐인가.
이 세계에서도 마왕 중에서 거의 최고로 꼽는 루시퍼마저 쓰러뜨렸다.
7대 천사에게 빌린 힘이 지금은 사라졌다고 해도 일대일의 상황에서는 현찬도 절대 마왕에게 꿀리지 않았다.
“인간은 나약하다고 들었지만, 그 말은 거짓으로 생각하는 게 맞겠구나.”
“내가 그중에서 특출나게 강해서 그럴 수도 있지.”
“그대의 능력이 특출난 것 또한 그대의 종족이 지닌 성장 가능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더냐. 그대의 강함은 곧 인류의 강함. 어찌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아리스의 말에 현찬은 잔뜩 끌어 올렸던 투기를 가라앉혔다.
그녀의 행동과 말투에서 인간을 적대시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느껴지고 있는 것은 약간의 호기심과 호의 정도
“대체 무슨 속셈으로 여기를 넘어온 거지 ”
“원래는 별다른 목적이 없었다.”
“별다른 목적이 없었다 ”
“뭐, 여기까지 와서 그대와 적대하며 싸울 생각이 없으니 전부 다 설명해주마.”
세아리스는 현찬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자신이 어떻게 이곳으로 왔는지 어쩌다가 현찬을 지켜보게 되었는지.
“멍청하고 음험한 놈 둘이서 무언가 일을 꾸미는 움직임이 마계에서 포착되었다. 평소라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릴 녀석들이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군사를 하나로 합치고 수상쩍은 움직임을 보이더군.”
마계의 마왕은 총 다섯이다.
그들은 다 같은 악마종이지만, 그렇다고 다섯이 서로 다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로 다른 마왕을 섬기는 하위 악마들은 서로 사이가 나빴으며 그 악마들은 각자의 군단만 믿고 따른다.
동족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적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마계는 5개의 파로 분할되어 있었고 각 마왕 군단은 각자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 다른 차원의 정복 활동을 활발히 했다.
그런데 최근 갑자기 겔루키스와 옥사비누스가 손을 잡았다. 그 둘의 행동은 나머지 세 마왕의 경계심을 부르기에 충분했다.
“아무렴 내 영토는 그 두 녀석과 맞닿아 있어서 말이다. 나로서는 어떻게든 최대한 빠르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아야 할 의무가 있었지.”
만약 둘이 손을 잡고 세아리스를 친다면 그렇게 된다면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고 만다. 서로 동맹을 맺고 끊거나 협약을 맺은 적이 없기에 그녀의 걱정은 더욱 컸다.
“그래서 내가 직접 나서서 확인했지.”
“마왕이라는 존재가 직접 나섰다고 ”
그것도 그만한 덩치를 지니고서 미행을
현찬의 시선이 무슨 뜻을 의미하는지 알아챈 세아리스는 실례라며 눈썹을 찌푸렸다.
“내가 덩치가 크다고 해서 미행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내 특기는 남들에게 들키지 않고 몰래 숨어드는 것이니 말이다.”
“나한테는 들켰는데 ”
“그건 그대가 비정상적으로 예민하니 그런 거다! 다른 마왕은 내 기척조차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게다가 내가 마음만 먹고 진심으로 숨어들었다면 아무리 그대라도 몰랐을 거다. 이런 나인데 어찌 부하들을 함부로 보내겠는가. 오히려 부하가 걱정돼서 내가 직접 온 거다.”
“어. 그래.”
어딘가 심드렁한 현찬의 반응에 세아리스는 뭔가 불만이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참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무튼, 대체 놈들이 무슨 짓을 벌이려고 그러나 했더니 최근 마계에서 이야기가 많이 나오던 지구라는 차원과 연결된 <문>을 열었더군. 그래서 대충 무슨 목적인지 눈치챘지. 놈들은 서로 힘을 합쳐서 지구를 차지하고 그걸 기반으로 세력을 키워 나갈 생각이었겠지.”
원래라면 마왕끼리 손을 잡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이끄는 군단은 다른 차원을 침략하여 확실히 지배할 수 있을 만한 힘이 있었으니까.
다만 침략에 앞서 문제가 있다면 지구가 너무나도 큰 차원이며 심지어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강자들이 많았다. 겔루키스의 군단 일부가 지구에서 넘어온 단 한 명의 누군가에게 몰살당한 것은 이미 나머지 마왕들도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가볍게 밟을 차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겔루키스와 옥사비누스는 깨달았다. 이거 이대로 갔다가는 오히려 독박 쓰게 생겼다.
지구를 침략해서 싸운다면 분명히 해당 군단에 매우 큰 피해가 생길 것이다. 세력을 늘리기 위해 벌이는 전쟁인데 오히려 전력이 줄어든다 그렇다면 바로 옆에서 기회를 노리는 다른 마왕에게 공격받을 것이다.
지금이야 계속 각 세력간 힘의 균형이 유지되고 있지만, 지구를 건드리면 그 균형이 깨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생각한 게 바로 연합이다.
지구라는 차원에 악감정이 있어서 반드시 풀고자 했던 겔루키스와 세력간 균형을 유지하면서 최대한 손해를 보지 않은 채 이득을 취하려는 옥사비누스. 둘이 손을 잡은 것이다.
“그 둘이 어떻게 손을 잡았나 했더니 이쪽 세상의 악마가 중간다리 역할을 해줬더군.”
악신회의 수작으로 인해 마왕이 총 셋이나 생긴 상황. 세아리스는 이대로라면 위험하다는 생각에 빨리 자신의 영토로 돌아가서 행동을 취할 준비를 하려고 했다.
현찬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하늘의 빛을 머금고 12장의 날개를 단 남자.
그는 놀랍게도 인간이고 혼자서 셋이나 되는 마왕과 싸워서 승리했다.
세아리스는 당연히 호기심이 동할 수밖에 없었다.
저 남자라면 자신의 목적을 이룰만한 인물에 충분히 부합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나타났다.”
“너의 목적 너는 지구를 침략하려던 악마가 아니었나 ”
“흥. 나를 그렇게 야만적인 녀석으로 보지 말아라.”
현찬의 말에 세아리스의 언성이 약간 높아졌다. 그뿐인데도 주위의 공간이 드드드드 울렸다. 현찬은 이마를 찌푸렸다.
“목소리가 너무 커. 조금 낮춰 주겠어 ”
“아. 이런 참. 미안하구나. 배려해야 했는데.”
세아리스는 그렇게 말하더니 온몸을 검은 안개로 뒤덮었다. 형태 없이 꿈틀거리던 검은 안개는 점점 그 크기와 부피를 줄여나갔다. 그러면서도 자꾸 꿈틀거리는 모습이 지속하니 마치 검은 이불 안에서 사람이 난동 피우는 모습과 흡사했다.
한계까지 작아진 검은 안개가 사라지고 모습을 드러낸 건,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세아리스다.
피부색도 새하얗게 됐고 머리의 뿔도 사라졌다. 그녀라는 걸 증명하는 건 똑같은 외모와 머리카락 그리고 눈동자뿐이었다. 검고 치렁거리는 드레스를 손질하며 세아리스는 이제 됐냐는 시선으로 현찬을 보았다.
“처음부터 그렇게 변하지 그랬어.”
“내가 살던 곳에서는 굳이 이런 귀찮은 변신까지 할 필요가 없어서 말이다. 나도 모르게 깜빡하고 말았다. 다른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는 덩치를 줄여야 한다는 걸.”
“그런 거 치고는…… 완전히 인간과 흡사한 모습으로 변했는걸 ”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다.”
세아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모습을 여러 차례 바꾸었다. 피부색, 귀의 길이, 머리카락의 색깔 등이 다른 차원의 종족 형태로 변하고 되돌아오고를 반복했다.
“그쪽과 대화하려면 그쪽 종족과 똑같은 모습이어야 하지. 그래야 경계심이 누그러질 테니까.”
“아니,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대체 왜 마왕이나 되는 자가 인간으로 변신할 줄 아느냐는 거야.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
“어쩔 수 없지 않냐. 악마란 결국 다른 차원에서도 언급될 정도로 위험한 녀석들이다. 그 상태로 대화를 이어나갈 수 없다. 나는 대화하기 위해서 지금 이 자리에 선 것이다.”
“…….”
현찬은 이 세아리스라는 마왕은 다른 녀석들과 확실히 다르다는 걸 지금 와서 확신이 들었다.
“너는…… 정복 활동을 하지 않는 거야 ”
“정복 그건 야만스러운 다른 마왕들이 하는 거지. 나는 오히려 그 반대다. 나는 다른 차원들을 돌아다니며 동맹국을 찾고 있지.”
세아리스는 악마면서 악마와는 매우 다른 사고방식을 지녔다.
싸움은 필요하다. 하지만 무의미한 싸움은 오히려 큰 피해만 낳을 뿐이다.
굳이 싸움으로 모든 걸 얻어야 하는가 대화, 거래, 혹은 협상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는 건 있다.
그 약간의 귀찮음만 감수한다면 자신의 힘을 소모할 필요도 없으며, 다른 악마들이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됐다.
“뭐. 나도 내가 이상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악마 사이에서도 이단이라 불릴 정도니까.”
세아리스는 태어날 때부터 거대한 덩치에 막강한 힘을 지닌 악마다.
악마면서 악마보다도 훨씬 더 강한 악마. 그렇기에 그녀의 삶은 오히려 순탄치 않았다. 끝없이 적들이 그녀를 찾았고 그녀는 무의미한 싸움을 계속했다. 그 지독한 싸움은 오히려 세아리스에게 싸움을 향한 혐오를 일으켰다.
그러한 상황을 이어나가다 보니 그녀의 힘 혹은 그녀의 사상에 감화된 악마들이 그녀를 따르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 세아리스는 굉천마왕(轟天魔王)이라는 칭호와 함께 다섯 뿔을 지닌 마왕이 되었다.
마계에서도 다섯밖에 없는 정점의 자리에 올라선 그녀는 다짐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이 세계를 자신의 손으로 지켜내겠다고.
“그래서 선택한 게 바로 동맹국 찾기지. 다른 녀석들이 전쟁으로 정복 활동하는 동안 나는 오히려 평화로운 노선을 선택해온 것이다. 다른 마왕들에게 짓밟힌 세계의 낙오자들까지 끌어모으다 보니 놈들과 비슷한 전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지.”
그런 세아리스에게 지금 현찬이라는 존재는 그야말로 최고의 동맹 대상이었다.
“그대는 무려 마왕 셋과 동시에 싸워서 이긴 강자다. 그대만 있다면 지금까지 계속 굳어졌던 힘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것은 일도 아니겠지. 현찬이라고 했나 부디 우리와 손을 잡지 않겠는가 ”
“허.”
설마 다른 마왕이 나타나서 한다는 소리가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는 거라니.
이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일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하지만 현찬을 향해 올곧은 시선을 계속 보내는 세아리스를 보면 누군가를 기만하거나 속이려는 의도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싸움을 피하고 싶어 평화로운 노선을 택하려고 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걸 내가 함부로 결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야. 내가 이 세계에서 제일 강해도 내 멋대로 정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런 건 상관없다. 오히려 이쪽 세계와 어떻게든 좋은 관계만 유지해도 충분하니까.”
그 정도라면 어떻게든 현찬이 자리를 주선할 수 있으리라.
“뭐 악마들은 다 싸우는 걸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조금 의외였어.”
“모든 악마가 그런 건 아니다.”
“나도 알아. 그쪽도 결국 생명체가 사는 세상이니까. 과격한 녀석, 나쁜 녀석이 있다면 착한 녀석들도 있겠지.”
사람도 그렇다.
모두가 착한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다. 범죄자, 사기꾼, 강도 등 악독한 범죄를 저지르는 악인들도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그 일부만 보고 전체를 판단하는 일은 함부로 해서는 안 되었다.
“일단 이 상태를 유지해서 어떻게든 고위 간부와 만남을…….”
현찬이 말을 이으려던 그 순간,
하늘에서 새하얀 빛의 기둥이 떨어지며 세아리스의 몸을 집어삼켰다.
“응 ”
자신을 향해 날아온 공격도 아니었고 워낙 방심하고 있던 상태여서 현찬은 순간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했다. 적의가 없는 공격이었기에 더더욱 읽어낼 수 없었다.
[계약자여! 저 악마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기회에 더욱 몰아쳐야 합니다!]
“이 사악한 악마! 물러나라!”
공격을 가한 사람은 바로 서다은이었다.
그런 그녀의 뒤로 몇 명의 낯익은 얼굴들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오빠. 괜찮으세요 혹시 저 악마가 무슨 짓을 저지르지는 않았죠 ”
“아이고야.”
자신을 향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묻는 서다은을 보니 현찬은 어쩐지 골치가 아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