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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무한계약-188화 (188/265)

# 188화.

188화 천마 대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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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이 죽자 자연스럽게 주변을 감쌌던 악의 기운이 안개처럼 사라졌다.

하늘에서 빛이 쏟아져 내리며 부서진 도시를 밝게 비추었다.

그 아래에서 7대 천사는 현찬에게 감사를 표했다.

[우리를 여기로 불러준 것에 새삼스럽지만, 다시 감사를 표하도록 하지.]

[맞아. 계약자. 네가 없었다면 이 지긋지긋한 싸움 고리를 끊어내지 못했을 거야.]

[지금도 완전하게 끊어낸 건 아니다. 하지만 진전 없이 계속 이어지던 이 지지부진한 흐름을 뒤튼 건 확실하지.]

솔직히 천사들은 약간 불안했다.

현찬이 아무리 7대 천사의 힘을 모두 모아서 싸운다 하더라도 그는 결국 하나의 신체를 지닌 인간이었다. 반면 상대는 아무리 힘 일부를 제약받는다 하더라도 마왕이다. 그것도 수가 무려 셋.

어떻게 보면 서로가 약간의 핸디캡을 안고 싸우는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과연 누구의 승리를 점칠 수 있을지 아무도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결과는 현찬의 승리로 끝났다.

현찬은 천사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정도로 힘을 활용하는 능력을 선보이며 루시퍼를 필두로 한 타 차원의 마왕을 둘이나 쓰러뜨렸다. 물론 그중 한 명은 도망갔지만, 크게 다쳤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더 싸우지 못하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이건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아무리 신의 힘을 빌린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결과물을 낼 수는 없었다.

[자네는 설마…….]

미카엘은 어딘가 현찬에게서 이질감을 느꼈다. 현찬은 자신을 일컬어 인간이라고 했지만, 지금 그가 느끼고 있는 이 기묘한 감은 그게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미카엘은 신에게 하사받은 힘 <성안(聖眼)>을 발동시켰다. 모든 악의 껍질을 꿰뚫어 보며 대상의 본질마저 확인할 수 있는 절대적인 눈이 빛을 뿜었다.

미카엘은 곧바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보이지…… 않는다고 ’

현찬의 본질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의 공간을 보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니야. 이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미카엘은 시야를 더 넓혔다. 상대방의 깊은 내면을 심층적으로 보려는 것이 아닌, 그를 둘러싼 주변부부터 크게 보려는 생각이었다. 미카엘은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걸 깨달았다.

‘너무나도 거대해서 그 일부밖에 보지 못한 거였…….’

미카엘의 <성안> 능력은 거기서 끊겼다. 누군가 강제로 그를 끄집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미카엘의 몸이 뒤로 휙 당겨졌다. 누구지  미카엘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싱글거리는 얼굴로 자신을 보는 신이 있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외모.

갈색 곱슬머리를 어깨까지 기른 신.

[내 계약자의 뒷조사를 하는 건 좀 그만둬 줬으면 좋겠는데 ]

[헤르메스…….]

대체 누가 <성안>을 강제로 막아냈나 했더니 헤르메스의 짓이었다.

그가 지닌 <헤르메스의 눈>은 <성안>과 마찬가지로 무언가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 범용적인 측면에서 보면 <헤르메스의 눈>이 훨씬 우월했다. 그것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정보를 읽어낼 수 있었으니까.

[직접 하계 체험도 도와주고 루시퍼를 쓰러뜨리기까지 했는데 계약자의 뒤를 캐다니. 너무 상도덕이 없는 게 아닌가 싶어. 묵시록의 천사들은 다 이런가 ]

[그 부분에 관해서는 미안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 또한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확인하고 싶은 것이 생기기 마련이다.]

[고지식한 천사가 그런 말을 하다니. 어지간히도 궁금했나 봐 ]

[그래. 너의 계약자에 관련된 일이니까 말이지. 그는…….]

미카엘이 무슨 말을 이으려는 순간 헤르메스의 가녀린 검지가 그의 입술을 막았다.

헤르메스는 눈가가 초승달처럼 휘어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볍게 좌우로 저었다.

[쉿. 그 이상은 말하지 마.]

[뭣. 네놈 설마……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건가 ]

[아니. 처음부터는 아니야. 나도 몰랐거든. 하지만, 방금 네가 한 행동으로 대략적인 유추는 가능하게 됐어. 왜 네가 그에게 관심을 가지는지, 그리고.]

헤르메스가 고개를 돌려 다른 방향을 바라보았다. 미카엘은 자기도 모르게 그 시선을 쫓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황량한 벌판이 미카엘의 눈동자를 가득 채웠다.

그는 대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있는 걸까.

[어째서 <로키>가 현찬에게 관심을 가지는지도…… 대충은 알겠어.]

[로키라면, 북유럽 신화의…….]

[너도 잘 알고 있나 보네. 맞아. 천계 출신 최강의 사고뭉치지. 나도 그중 하나지만 말이야.]

아무튼, 하고 헤르메스가 말을 이었다.

[남의 비밀을 엿보는 건 내가 허락하지 않아. 그러니까.]

잘 가.

헤르메스는 말없이 손을 흔들었고 미카엘은 그대로 천계로 떠나버리고 말았다.

미카엘과 함께 내려온 다른 대천사들도 원래 있던 장소로 돌아갔다. 현찬은 몸을 가득 채우던 힘이 쭉 빠지자 순간적으로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으헛 ! 무, 무슨 일이야 ”

[계약 시간이 한계에 도달해서 강제로 끝난 거야. 이대로 더 유지됐으면 현찬이 네가 위험했으니까.]

“확실히. 지금도 무척 지치는데 여기서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났으면 한계였겠네.”

[계약할 때 중요한 건 바로 당사자인 너의 안위야. 그것을 해치게 되는 순간 계약이 풀리게 되지. 뭐, 네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걸 강제로 끌고 나갈 수도 있겠지. 그래도 이번 건은 조금 위험하다 싶어서 내가 끊었어.]

“어. 고마워. 헤르메스.”

[뭘. 고맙긴.]

현찬은 찌뿌둥한 몸을 풀었다. 헤르메스는 가라앉은 눈동자로 그런 현찬을 바라보았다.

헤르메스의 뒤에서 아테나가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진실을 숨길 생각인가 ]

[숨기는 게 아니야. 아직, 나도 완전한 진실을 알지 못해서 그런 거니까.]

[알면 제대로 말해줄 생각인가 ]

[숨길 이유가 있겠어 ]

현찬을 바라보는 헤르메스의 눈빛에는 약간의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오히려 반기면서 알려줄 거야.]

[네가 그렇게 말하니 나는 가만히 있도록 하마.]

[그것참 고마운 배려네.]

[아무렴.]

두 신의 대화는 거기서 끝을 맺었다.

현찬은 굳은 몸을 적당히 풀어주며 이 장소를 떠날 채비를 끝냈다.

“이제 움직여야지.”

[또 어디로 가게 ]

“아직 마계와 연결된 <문>은 여전히 남아있어.”

그리고 부산은 실시간으로 그 <문>을 통해 넘어온 마기로 오염되고 있다. 조금 전에 7대 천사의 힘으로 광역 정화를 했기 때문에 한동안은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계약이 끝난 이 시점에서 그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오염이 진행될 거야. 그럼 또 악마들은 좋다고 넘어오겠지. 그걸 막으려면 지금이라도 빠르게 게이트를 부수는 수밖에 없어.”

[그래야겠네. 좋아. 가자.]

“응.”

현찬은 [탈라리아]를 신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

“음  뭔가 이상한데 ”

<문>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마기는 짙어졌다. 아직 채 정화되지 못한 도시 곳곳은 마기의 영향을 받아 죽어버리고 있었다. 악마들이 살기 적합한 땅으로 만들어 버리는 일종의 테라포밍 능력. 이걸 정화하는 데만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런데 현찬의 신경을 거스르는 일들이 있었다.

일단 악마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것들이 다 어디 간 거야 ”

그냥 몸을 숨긴 거라면 현찬이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악마들의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놈들이 현찬의 기척을 벗어날 정도로 뛰어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는 건 정말로 <문>을 포함한 이 주변에 악마들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다 도망친 거 아니야 ]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말이지.”

현찬의 뛰어난 안력은 바닥에 흩뿌려진 피들을 보고 있었다.

방금 막 튀었는지 굳지 않고 여전히 시뻘건 색을 유지하는 피는 분명히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건 아닌 거 같아.”

현찬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문>에 도착했다. 높이만 10m는 될 법한 <문>은 마치 지옥으로 통하는 입구처럼 생겼다. 지상을 뚫고 튀어나온 그 거대한 문은 악마들의 문양이 새겨진 거대한 게이트였다.

이 주변에도 악마들은 없었다.

강렬한 마기는 느껴지지만, 악마는 보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놈들을 지워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나와.”

현찬의 목소리는 고요한 공간에 퍼져나갔다. 아무도 없는 무너진 도시에 살아있는 생명체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현찬은 착각하지 않았다.

아니, 속지 않았다.

“여기 있는 거 다 아니까, 나오라고.”

현찬의 말에도 주변은 여전히 고요했다. 현찬은 콧방귀를 뀌며 손에 쥔 [테레이오스테]에 힘을 주었다. 용의 재료까지 머금어 더욱 강해진 검이 ‘우우웅’ 소리를 내며 울었다. 거기에 실린 힘은 게이트를 충분히 없앨 수 있었다.

“안 나온다면 어쩔 수 없지.”

현찬이 검을 휘두르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세상이 검게 물들었다.

현찬은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고 상황을 살폈다. 거대한 검은 안개가 현찬의 시야를 뒤덮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의지로 한 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하나로 뭉쳐지고 합쳐진 검은 안개는 이내 하나의 형상을 이루었다.

그것은 거대한 여인이었다.

주변의 고층 빌딩과 견주어도 덩치에 큰 차이가 없는 검은 머리카락의 거대한 여성. 어둠으로 이루어진 드레스를 입고 여타 악마들과 다르게 연한 색의 붉은 피부를 지녀서 인간처럼 보였다.

그러나 인간과 다르게 그녀의 머리에 다섯 개의 뿔이 솟아 있었다.

양쪽 관자놀이에는 양처럼 동그란 뿔이 그리고 정수리 부분에는 산양처럼 길게 휘어진 뿔 세 개가.

다섯 개의 뿔을 가졌다는 건 그녀도 마왕이라는 걸 뜻했다.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그녀는 매혹적인 미소를 띠며 현찬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녀는 너무나도 거대하여 한입에 현찬을 삼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현찬은 겁먹지 않고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오히려 보란 듯이 씨익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드디어 나타났군. 조금 전부터 계속 숨어서 지켜보고 있는 건 진작에 눈치챘어.”

현찬의 말에 여성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쿡쿡거리며 웃었다. 덩치가 워낙 커서 그 자그마한 웃음조차 대기를 크게 흔들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움직이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과격하게 움직였으면 세상을 흔들었을 것이다.

현찬은 그제야 그녀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굉천마왕(轟天魔王) 세아리스>.

하늘을 울린다는 마왕.

그녀는 그 이명대로 정말로 세상을 흔들만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

“음 ”

사람들 틈에 섞여 자연스럽게 난민용 텐트를 배정받은 그랑데우스는 간이침대에 누워있다가 상반신을 번쩍 세웠다. 함께 텐트를 사용하던 여성 몇 명이 놀랐지만, 그랑데우스는 그녀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뭐야. 이상한 기척이 하나 더 느껴지잖아 ’

그리고 현찬이 그를 마주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이거 위험한 거 아닌가 ’

지금이라도 현찬을 도우러 가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니 현찬의 자신 넘치던 행동이 뭔가 걸렸다.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으니 참견하지 말라고 했을 테니 말이다.

‘그 인간이라면 분명히 또 다른 무언가를 숨겼을 테니까.’

갑자기 떠오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용갑병이라고 했나  일천이나 되는 대군을 전부 비늘과 뿔, 뼈를 이용해서 만들었지.’

다만 거기서 의문점이 하나 생겼다.

‘그런데 그 거대한 용들의 사체로 만든 것 치고는…… 용갑병의 양이 좀 적지 않나 ’

용갑병 일천 병기는 확실히 많다. 용의 뼈를 골자로 해서 비늘을 갈아 갑주를 입혔고 뿔로 무기를 만들었다. 분명히 상당한 재료가 들어갔을 것이다.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그 거대하고 많았던 용 사체들이 전부 용갑병으로 변했다기엔 양의 차이가 조금 많이 컸다.

그랑데우스는 그제야 깨달았다.

현찬은 아직 자신이 만든 걸 전부 꺼내지 않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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