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
179화 업그레이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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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참, 보통 인간은 아니구나.”
그랑데우스는 땀을 삐질 흘렸다. 고개를 살짝 돌려 뒤를 보았다. 그곳에는 거대한 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것이 이미 연 끊어버린 동족의 것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쯧. 살점 하나 없이 다 깔끔하게 발라냈군.”
그랑데우스는 손가락 끝으로 커다란 갈비뼈 하나를 툭툭 건드렸다. 현찬은 실시간으로 드래곤의 시체를 해체하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그거 건드리지 마. 뼈도 쓸 거니까.”
그랑데우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 알았어. 알았어. 누가 뺏어가기라도 할까봐 ”
“아니면 왜 ”
“그냥……. 내 일족이었던 녀석들의 최후가 결국에는 분해된다는 사실이 참 묘한 기분이라서.”
“이미 정은 다 쳐내서 아무렇지 않다고 하지 않았어 ”
“원래라면 그랬겠지. 그런데, 아무리 모든 연을 끊어냈다고 해도 그냥 헤어지면 모를까 전부 다 죽고 나서 실시간으로 해체되고 있는데 너 같으면 안 그러겠냐 ”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랑데우스가 조금 자기중심적인 면이 있고 자유분방하지만, 그래도 한때는 드래곤이었던 존재다. 그런 드래곤들이 모두 죽고 저렇게 눈앞에서 사체가 푸줏간 고기처럼 보이는데 누가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녀이기에 조금 묘한 기분으로 끝난 것이지 다른 드래곤이 이 광경을 봤으면 입에 거품을 물고 졸도했을 것이다.
사실 드래곤이 아니라 하더라도, 안색이 썩 좋지 않은 자들이 있었다.
바로 헤르메스와 아테나였다.
[으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렇게 시체를 마구잡이로 건드는 건…….]
[승자의 권리라고는 하나 너무 잔인한 것이 아닌가. 현찬.]
전쟁터에서 많은 모습을 보아온 아테나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계약마저 어겨가며 현찬을 배신한 드래곤들에게 나름대로 분노를 품고 있었지만, 그 최후가 저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게다가 어지간히 비위가 좋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덩치가 빌딩만 한 드래곤을 무참히 뼈와 비늘, 살까지 전부 발라버리는 모습은 썩 보기 좋은 게 아니었다.
[그보다 진짜 속도 빠르네.]
헤르메스는 하늘 높이 솟아오른 뼈 산을 보며 감탄했다. <용의 둥지>는 돌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그보다 훨씬 작지만 그래도 거대한 뼈의 산이 생겨났다.
덩치가 빌딩만 한 드래곤의 시체를 처리하는데 속도가 매우 빨랐다.
거기에는 어스름달의 도움이 컸다.
“주인님. 이건 좀 손상이 심한데 어떻게 할까요 ”
“어. 그건 그냥 뜯긴 단면은 잘라내고 절반만 써야겠다. 이런, 이건 비늘이 다 타버려서 뭘 어떻게 할 수가 없네. 아무튼, 거의 다 끝나가니 남은 것도 빨리 처리하자.”
“넵.”
어스름달은 기운차게 대답하며 몸을 거대하게 부풀렸다. 아주 자그마하던 어린 소녀의 모습은 순식간에 세상을 뒤덮을 것만 같은 거대한 검은색 젤리로 변했다. 그것은 꾸물꾸물 움직이며 드래곤의 시체를 뒤덮었다.
드래곤은 컸지만, 이미 성장한 어스름달은 그보다 훨씬 더 컸다. 무엇보다 육체를 자유자재로 늘리고 줄일 수 있었기 때문에 얇게 펼쳐서 한꺼번에 여러 드래곤의 시체를 덮을 수도 있었다.
드래곤들은 어스름달의 거대한 몸 안에 잠겼다.
그것은 마치, 검고 거대한 수조 안에 도마뱀들을 가둬놓은 것처럼 보였다. 드래곤을 삼킨 어스름달은 몸을 움직이며 용의 시체를 빠르게 분해했다.
드래곤의 비늘 틈새에서 거품이 빠르게 올라오는 듯하더니 튼튼한 비늘이 빠른 속도로 몸에서 떨어져 나왔다. 어스름달은 그 비늘을 한 장소로 모아서 밖으로 ‘툭’ 뱉어냈다. 그곳에는 각양각색의 비늘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어스름달은 거기서 끝내지 않았다. 비늘이 전부 벗겨진 드래곤 육체가 마치 잘 짜인 퍼즐 조각처럼 갈라지며 뼈와 살이 분해된 것이었다. 무엇보다 마력 저장소인 드래곤 하트는 아주 조심스럽게 떼어내서 따로 보관했다.
어스름달에게 귀찮은 작업이었지만, 그만큼 얻는 게 컸기 때문에 기꺼이 그 작업을 이어나갔다.
드래곤들 중에서 사체가 성하지 않은 녀석은 어스름달이 전부 먹을 수 있었다. 특히 제대로 쓰지 못할 드래곤 하트도 몇 개가 콩고물로 떨어지니 어스름달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고마울 따름이었다.
조금의 귀찮음만 감수하면 더욱 강해질 수 있다.
어스름달은 희희낙락하며 도축작업을 계속했다.
[쟤가 저런 용도로 쓰일 줄은 몰랐는데.]
헤르메스도 어스름달이 보여준 독특한 능력에 살짝 감탄했다. 단지 물리적 충격에 강한 녀석이라고 여겼지만, 오늘 보여준 모습은 여러 분야에서 다재다능했기 때문이었다.
거대한 몬스터의 사체를 순식간에 원하는 대로 깔끔하게 분해할 수 있다. 그보다 가장 유용한 건 바로 <어둠 공간>이라는 어스름달의 능력이었다.
어스름달이 지닌 공간계 능력으로서, 어둠을 소환하는 단순한 능력이었다. 다만 그 안쪽에 광활한 공간이 펼쳐져 있으며 무언가를 담는 데 매우 도움이 된다는 게 큰 장점이었다.
어스름달의 주위로 블랙홀처럼 원반 형태의 검은 구멍이 생겨났다. 잘 포장된 드래곤 하트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써늘하며 어떠한 생명체도 살지 않는 공간이기 때문에 드래곤 하트는 오랫동안 그곳에서 보존될 것이다.
[흐하하! 이거 참 재미있구나!]
그리고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마르두크>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처음에 현찬이 자신에게 계약을 맺자고 제안했을 때 거기에 응한 것은 그저 호기심 때문이었다.
제우스와 계약을 맺었고, 심지어 포세이돈과도 계약을 맺은 인간이다. 그런 인간이 자신에게 신호를 보내니 당연히 흥미가 동할 수밖에.
그리고 불려왔을 때 주변에 용들로 가득 찬 것을 보고 꽤 기뻤다.
악룡 <티아마트>를 쓰러뜨린 주신이다. 그는 여전히 그 끔찍한 괴물 종족을 증오했었다. 세상을 파멸시키고 자신의 세계를 없애려는 드래곤은 세상에서 사라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온갖 곳에 용들이 가득하니 얼마나 기쁘지 아니한가.
오랜만에 실컷 싸운 <마르두크>는 매우 만족했다. 더 재미있는 일은 그 뒤에도 일어났다.
현찬이 드래곤들의 시체를 아주 잘게 토막 내서 챙긴 것이다.
대체 왜 그것을 챙기냐고 이유를 물어봤을 때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었다.
“얘들 비늘이랑 뼈가 얼마나 좋은 재료인데요. 당연히 다 써야죠.”
[다 죽여 놓고 그런단 말이냐 ]
“제가 죽였으니 책임지고 다 챙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르두크>는 정말 오랜만에 미친 듯이 웃었다.
그는 현찬이 마음에 들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바로 현찬과 직속 계약을 맺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라면 자신의 힘을 다루는 데 충분한 자격을 갖췄으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아쉬운 점은 그가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이라는 것. 그것도 무려 둘이나 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몸 안의 흔적을 보면 거쳐 간 신급 영령의 존재가 상당히 많았다.
<마르두크>의 낌새를 눈치챘는지 헤르메스의 눈동자가 가늘게 좁혀졌다.
[제 계약자 넘보지 마시죠 마르두크 씨.]
[헤르메스냐. 너무 그렇게 노려보지 말거라. 어차피 나는 오늘 이 일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니까.]
<마르두크>는 끌끌 거리며 웃었다.
[그래서, 제우스는 여전하더냐 ]
[…… 뭐, 아빠야 항상 똑같죠.]
[그 녀석, 젊었을 때 버릇 못 고치더니 여전히 사고만 치는군.]
그 말에는 헤르메스와 아테나도 딱히 반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입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콩가루 집안으로 치면 <마르두크>도 만만치 않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희대의 성추행 꾼인 제우스와 비교할 수가 없었다.
참 부끄러운 아버지다.
[뭐, 나는 이제 충분히 좋은 구경거리를 봤으니 이만 가 보도록 하지.]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용이라고 할지라도 용은 없애고픈 존재였다. 그것을 이루었으니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기분이었다. 여전히 무지개색으로 빛나는 애매한 녀석이 있었지만, 이미 드래곤이라는 껍질을 벗어던졌기 때문에 저 녀석은 봐주기로 했다.
“윽! 갑자기 오한이…….”
신의 자비로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걸 모르는 그랑데우스는 이유도 모른 채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러면서 머리를 긁적이더니 ‘여기가 좀 추운가 ’하고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오랜만의 즐거운 경험이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만나도록 하지. 계약자여.]
“네.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마르두크가 떠나가자 그랑데우스는 찌뿌둥한 몸을 기지개 켜며 현찬에게 다가왔다.
“으으, 역시 인간의 몸은 조금 불편하네. 그보다 이제 작업 다 끝난 것 같으니 슬슬 가는 게 어때 여기는 너무 지루해.”
“그 뼈 옮기는 거 도와주면 생각해 볼게.”
“이거만 옮기면 가는 거지 좋아.”
그녀가 손을 뻗자 순식간에 여러 개의 마법진이 생겨났다. 그 마법진은 드래곤의 뼈를 사방에서 입방체 모양으로 포진하더니 눈 부신 빛을 내며 아주 자그마한 큐브 조각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그것을 주워들어 현찬에게 건네주었다.
“자. 공간 압축 마법으로 한 거야. 네가 원할 때 꺼내 쓸 수 있게 했으니 고마워하라고.”
자부심 넘친다는 듯 콧대를 세우며 으쓱거리는 모습이 참 애 같았다.
“알았다. 알았어. 가자. 가.”
“아싸! 지구 구경하러 가야지!”
허공을 향해 주먹을 내지르며 기뻐하던 그랑데우스는 문득 떠오른 게 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런데 그 시체는 어디에다가 쓰려고 ”
“응. 방어 기구 만들려고.”
“음. 방어 구라…….”
드래곤의 비늘과 뼈, 심장, 뿔, 피는 전부 버릴 것이 없는 최상급 재료였다. 그것을 이용해서 만든 방어 구라면 어지간한 물건들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뭐, 드래곤의 신체 부위는 아주 먼 옛날부터 그런 용도로 쓰이고는 했지. 이빨 하나만 사용해도 어지간한 보검 이상은 그냥 만들어 버리니까.”
“그렇지. 이런 재료들을 아주 잘 조합해서 만드는 방어 구는 과연 어느 정도일까.”
“그야말로 엄청나게 좋은 물건이 나오겠지. 그런데 만든다고 하는데 애초에 그걸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있기는 있어 재료가 아무리 고급이라고 해도 그것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잖아.”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믿음 가는 분이 있거든.”
“오! 정말 누군데 어떤 사람이야 ”
“아니 사람은 아니고.”
현찬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신이야.”
“…….”
그랑데우스는 할 말을 잃은 채 속으로 생각했다.
얘 정말 인간이 맞기는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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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구나. 계약자여. 헤르메스와 아테나도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보기 좋구나. 그런데…….]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헤파이스토스는 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재료들을 보았다.
[대체 이 많은 재료는 무엇이냐 ]
자신의 공방을 다 채우고도 부족해서 바깥쪽 공터에까지 수북이 쌓인 재료들을 보면 아무리 대장장이 신인 그라고 해도 아연 해지는 기분을 막을 수 없었다.
“많죠 ”
[많다마다. 너무 많아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구나.]
헤파이스토스는 팔짱 끼며 재료들을 유심히 살폈다.
[이렇게 많은 재료를 가져왔다면, 나에게 무언가 만들어 달라는 것이겠지 ]
“예. 물론이죠.”
[나는 어지간한 재료는 사용하지 않는다.]
“물론 그것도 잘 압니다. 자세히 살펴보세요.”
현찬의 말에 헤파이스토스는 재료에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영체 상태라 재료를 직접 만질 수는 없었지만, 헤파이스토스 정도 되는 신이라면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료의 수준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눈을 부릅떴다.
[…… 이건 !]
“예. 맞습니다. 전부 용의 것입니다.”
[이런 귀중한 것을 대체 어디에서…… 아니, 물어볼 필요는 없겠군. 다른 세계에서 가져왔겠지 ]
“물론이죠.”
현찬은 거기에 더해 <어둠 공간>에서 드래곤 하트를 꺼냈다.
용의 심장! 장비 제작의 재료 중에서 그야말로 최고봉의 등장에 대장장이인 헤파이스토스의 눈에 불이 붙었다.
“좋은 장비들이 필요합니다.”
[후후. 그래. 이런 재료를 다루기 위해서라면, 내가 아니면 안 되는 거겠지. 좋네. 만들어 주지.]
“아주 많이요.”
[…… 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