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
178화 생존의 법칙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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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라드리온은 생각했다.
이 방법만이 드래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다.
도움을 준 인간을 배신하는 꼴이었지만, 그에게는 드래곤 동족의 생존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인간은 너무나도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가 악한 마음을 먹고 힘을 멋대로 휘두르는 순간 세상의 균형은 무너진다. 그가 거주하는 지구라는 차원뿐만 아니라, 다른 차원까지 전부.
누구보다도 균형과 평화를 숭배하는 온건파 드래곤들에게 현찬의 존재는 결국 자신들이 지향하는 이상향에 위배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두려움과 공포에서 비롯된 그른 행동일 수도 있었다.
그들이 조금만 더 현찬과 친해지고 그에 관해서 알았다면 다르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상황은 결국 그렇게 되지 못했고 드래곤들도 위대하긴 하지만 전지전능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현찬을 죽일 유일한 기회라고 여겼다.
힘이 다 빠진 그라면 아무리 강하다고 할지라도 이만한 수의 드래곤과 싸워서 이길 수 없을 테니까.
계획을 성공만 한다면,
그렇게 해서 현찬만 죽일 수 있다면.
드래곤들은 세계가 균형을 잃을 것을 더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고 불안한 나날을 살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것이, 겔라드리온이 떠올린 생존의 법칙이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언제나 의외라는 것이 존재했다. 모든 법칙과 규칙을 깨부수고, 그것의 바깥을 노니는 자들.
주어진 굴레마저 박살 내버리는 초월적인 존재가 있었다.
겔라드리온은 몰랐다.
현찬이 바로 그 존재라는 것을.
“이, 이익! 겁먹지 마라! 우리는 긍지 높은 드래곤이다! 고작 인간 하나에 겁을 먹으면 어쩌자는 거냐!”
과격파 드래곤 한 마리가 발작하듯 외쳤다. 그 말에 다른 드래곤들의 눈동자에 어렸던 두려움이 조금은 가시고 용기가 샘솟았다.
아니, 그것을 용기라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만용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드래곤들은 어떻게든 해야만 했다. 이미 그들은 잘못된 선택으로 벼랑 끝에 몰렸으니까.
“모든 용이여! 힘을 합쳐라!”
“눈앞의 괴물을 쓰러뜨려라!”
드래곤들의 외침에 현찬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먼저 지구를 침략해서 공격한 괴물이 누구인데 이제 자신이 괴물이라 불린단 말인가.
또 어떻게 보면 자신은 드래곤들에게 동료가 아닌 괴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에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겔라드리온이 자신을 배신한 이유도, 바로 저런 시선으로 자신을 봐왔기 때문이리라.
그 심지에 불을 붙인 존재는 에르카닐이겠지만, 화약을 쌓아놓은 것은 결국 겔라드리온이었다. 에르카닐의 말이 아니었더라도, 언젠가는 폭발했을 일이다.
‘서로의 선택이 엇나간 것은 안타깝지만…….’
봐줄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현찬과 계약 맺은 이 신이 특히나 그런 생각으로 가득 찼으니까.
[드래곤 ]
그 단어에 반응한 <마르두크>가 현찬의 등 뒤에서 거대한 영체를 일으켰다. 이마에 끈을 둘러 묶은 장발의 남자였지만 덩치가 커다랗고 근육이 우람했다. 뒤통수에도 또 하나의 얼굴이 있었다.
[지금 내 앞에서 용이라는 말을 언급한 건가 ]
<마르두크>는 그 단어가 가당치도 않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네놈들은 진짜 용이 아니다. 내가 본 ‘그녀’가 용이라는 이름을 지녔다는 걸 생각하면 네놈들은 용이라는 칭호를 쓰는 것조차 과분한 도마뱀일 뿐이야.]
현찬의 양손으로 두 개의 기운이 몰렸다.
왼손에는 모든 것을 갈가리 찢어버릴 자그마한 폭풍이.
오른손에는 하늘마저 갈라버릴 우레의 기운이.
<마르두크>의 두 눈동자에서 새하얀 안광이 쏟아지듯 나왔다.
[내 앞에서 용을 사칭했다면, 네놈들에게는 그만한 자신감이 있다는 거겠지. 그러니 묻겠다. 네놈들이 과연 나 마르두크의 앞에서 용이라 불릴 만한 녀석들인지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주마.]
“피해라!”
겔라드리온이 외쳤지만, 그 비명은 현찬이 내뿜은 번개에 집어 삼켜졌다.
현찬의 손에서 뿜어져 나간 우레는, 순식간에 수천, 수만 갈래로 찢어지며 근처에 있는 드래곤들을 전부 집어삼켰다.
몇몇 드래곤들은 빠르게 반응하여 회피하려고 하거나 혹은 마력을 이용해 방어 마법을 펼치기도 했다.
모두 헛수고였다.
분노한 신이 내뿜는 번개를 고작 드래곤이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떠한 공격조차 막아내는 방어 마법도, 단단한 비늘과 막대한 근육도 전부 번개에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현찬이 손을 한번 휘둘렀을 뿐인데도 새까맣게 타버린 용들의 시체가 지상으로 힘없이 추락했다. 그것은 마치 검은 운석들이 대거 떨어지는 모습과 흡사했다.
단 일격으로 이 자리에 모인 드래곤들 중 3할이 죽었다.
가까스로 사정거리에서 벗어나 회피에 성공한 몇몇 드래곤들도 큰 상처를 입었다.
압도적.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과격파 드래곤들은 단연 충격을 크게 받았다.
“이게…… 인간의 힘이라고 ”
과격파 드래곤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최고라고 자부해왔다. 태어날 때부터 막대한 마력과 강력한 육체를 타고난 드래곤들은 노화하지 않았으며 세월이 지날수록 계속 강해지는 종족이다.
고작 100년을 조금 넘기는 수명에, 50살만 넘겨도 노화가 찾아오는 인간 따위와 당연히 비교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과격파 드래곤들은 자신들이 모든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강하니까, 우월하니까 그게 옳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벌써 전의를 상실한 드래곤들을 보며 <마르두크>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냐 이게 전부인 거냐 ]
감히 최악의 용 <티아마트>와 싸운 자신의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들을 ‘용’이라 칭한 놈들이…… 고작 이 공격 한 방에 겁을 집어먹고 말았다.
[네놈들은 고작 이 정도 알량한 힘만 가지고 스스로 용이라고 지칭한 것이냐 ]
이 얼마나 한심하기 짝이 없는 추태란 말인가.
신의 앞에서 거만하게 그 이름을 담은 놈들이 고작 이 정도 능력밖에 되지 않다니.
그 대가는 당연히 클 것이다.
[어디 이것도 한번 받아 보거라.]
<마르두크>의 말과 함께 이번에는 왼손에 맺힌 폭풍이 사방으로 몰아쳤다. 인간의 자그마한 손바닥에서 나왔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순식간에 수십 줄기로 분열되며 용에게 쏘아졌다.
드래곤들은 느꼈다.
저것에 닿는 순간 방어고 뭐고 단단한 비늘마저 갈려 나갈 거라고.
“모두 뭉쳐라!”
겔라드리온의 빠른 지휘에 드래곤들이 한 자리에 뭉쳐서 방어 마법을 발동시켰다. 아직도 백에 가까운 수의 드래곤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들이 힘을 합쳐 발동한 마법은 상당히 강력했다. 순식간에 허공에 하늘과 땅 사이의 경계를 만드는 듯한 거대한 방어 마법진이 펼쳐졌다.
콰가가가각!
소용돌이는 방어 마법진을 집요하게 두들겼다. 그럴 때마다 대다수의 드래곤들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여기서 포기하는 순간 그들이 생각하는 세계의 균형은 무너지고 마법진은 깨질 것이다.
그 뒤에 기다리는 건, 저 소용돌이에 갈려 나가는 일족의 육신 파편일 것이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기 때문에 드래곤들은 필사적으로 마력을 쥐어 짜냈다.
얼마나 버텼을까, 소용돌이의 기세가 확 줄어들더니 이내 사라졌다.
“마, 막았다.”
드래곤들은 살았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지금 안일한 판단을 내렸는지 깨달았다.
[이걸 막다니, 그건 칭찬해주마. 그렇다면 이건 어떻게 할 거냐 ]
하늘이 열려 있었다.
푸른 하늘이 좌우로 갈라지고, 그 안에 보이는 것은 광활하게 펼쳐진 우주였다.
별과 은하수가 흐르는 그 우주가 마치 하나의 거대한 눈동자라도 되는 것처럼 드래곤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벼, 별 마법.”
우주를 장식하는 수많은 별 중의 일부가 마치 퍼즐 조각처럼 움직이며 자리를 재배치했다.
마법 중에서도 최고위 마법으로 뽑히는 별 마법. 지금까지 드래곤들 중에서도 배운 자가 거의 없다고 알려진 마법의 등장에 드래곤들은 모두 아연실색했다.
<마르두크>는 물의 풍요로움과 폭풍 등 자연을 관장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가장 잘 다루는 것은 마법에 관련된 것들이다.
별들의 행로를 다른 쪽으로 인도하는 것 정도야 얼마든지 가능했다.
[너희들은 마법에도 조예가 깊다고 했지 그렇다면 자. 어디 한번 받아 봐라.]
마법을 부리는 것은 간단한 손동작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그 자그마한 행동이 불러온 결과는 절대로 작지 않았다.
열린 하늘의 틈새로 별들이 떨어져 내렸다.
그 크기는 빌딩만 한 드래곤들보다 몇 배는 더 거대한 운석들이었다.
하늘이 무너졌다.
<엘 드라코>에 절망이 도래했다.
&
현찬은 드넓은 평지로 내려왔다.
원래 이곳은 평지가 아니었다. 구름 위까지 치솟아 오른 거대한 산. <용의 둥지>가 있던 장소였다.
하지만 지금은 둥지가 보이지 않았다. 둥지의 근간이 된 산봉우리 자체가 날아가 버린 탓이었다.
현찬이 사용한 별 마법은 수십km 범위 내의 모든 것을 지워버렸다. 거대한 바위산도, 드넓은 숲도 전부.
단 한 번 펼친 마법이 지형 자체를 바꾼 것이다.
그 폐허의 틈새 사이에는 드래곤들의 시체가 더러 보였다. 겔라드리온을 필두로 현찬에게 대항한 모든 드래곤들이 죽고 말았다.
현찬은 말없이 드래곤 시체 더미 위에 걸터앉았다.
그런 현찬의 앞으로 찬란한 무지갯빛이 떨어져 내리더니, 이내 거대한 용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왜 그렇게 안타깝다는 표정이지 ”
“그러는 너는, 너의 일족이 모두 죽었는데 전혀 슬퍼 보이지 않는군.”
“애초에 나는 이미 드래곤들과 연을 끊었어. 영령의 자리로 올라간 시점에서, 나는 이미 드래곤이라 묶인 일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났지. 그 마지막 정이라는 것도, 로드 녀석과의 약속으로 털어냈다. 슬픔 그런 걸 느낄 리가 없지. 인간이여. 그런데 너는 왜 그렇게 우울해하는 거지 ]
“서로 동료로서 나름 좋은 길을 걸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됐어. 내 힘이, 그들에게 그렇게나 두려웠던 건가 ”
그 힘도 사실상 온건파를 위해서 과감하게 보인 행동이었다. 정작 그 행동이 온건파 드래곤들의 두려움을 샀고 결국에는 이런 결말을 자아냈다.
그랑데우스는 그런 현찬의 말에 껄껄 웃었다.
“왜 웃지 ”
“웃겨서 그렇지. 세상일이 어디 자기 원하는 대로 된다고 생각했나 나도 내가 이렇게 영령의 자리까지 올 줄 몰랐고, 또 이렇게 육신을 가지고 다시 현세로 내려올 줄 몰랐어. 원래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예측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는 게 또 묘미 아니겠어 ”
“거 참 낙관적인 드래곤이로군. 그래서 너는 이제 어쩔 거지 ”
“나 나는 세계 곳곳을 떠돌아다니면서 구경이나 하려고. 이왕 지구라는 곳과 연결이 됐으니, 거기를 한번 가 볼 생각인데.”
“내가 그걸 지켜볼 거 같아 ”
“에이. 너무 그러지 말라고. 애초에 너의 힘을 본 내가 괜히 너에게 적대할 일을 하겠어 솔직히 나는 너랑 싸우기 싫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고. 너랑 싸울 바에는 차라리 자살하고 말지.”
“…….”
은근히 말을 경박하게 하는 드래곤이었다.
아니, 이제는 드래곤도 뭣도 아닌 존재겠지.
“…… 맘대로 해.”
“오오. 정말 ”
“그런데 그 몸으로는 어디 돌아다니지도 못할걸 ”
“그건 걱정하지 마시라! 폴리모프로 변하면 되니까.”
그랑데우스는 그렇게 말하더니 무지갯빛으로 휩싸이더니 사람의 형태로 바뀌었다.
“…… 너 여자였냐 ”
“너무하네. 내 말투가 조금 가벼워서 그렇지 나는 여자였다고.”
몰랐다.
드래곤일 때야 무슨 말을 해도 목소리가 굵고 울리니까 성별이 구분되지 않았다.
그랑데우스는 인간의 모습일 때도 아름다웠다. 풍성한 머리카락은 금발이지만, 그 끝부분이 무지개색이었다. 팔다리도 길고 시원시원하게 생긴 미인이었다. 옷은 또 어떻게 알았는지 지구인이 잘 입는 검은 슬랙스 바지에 흰색 와이셔츠를 입은 상태였다.
“됐지 ”
“그래. 맘대로 해라.”
현찬은 그렇게 말하며 주섬주섬 일어나 용들의 시체를 만지기 시작했다.
그랑데우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뭘 하려고 ”
“어. 용의 비늘은 매우 고급 재료라서 말이야.”
쩍억! 현찬은 드래곤의 시체에서 비늘을 떼어냈다.
“이걸로 방어 기구 좀 만들려고.”
아쉬운 건 아쉬운 거고,
눈앞의 고급 재료를 절대 놓칠 리 없는 현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