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
177화 생존의 법칙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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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찬의 눈빛은 가라앉아 있었다. 구름 위에 떠 있는 그는 자신을 죽이기 위해 살기를 내뿜는 드래곤들을 주시했다. 하나하나 덩치가 빌딩만 한 녀석들의 수가 백을 넘었다. 현찬은 광활한 하늘에 있었음에도, 그 주위는 드래곤들로 가득 차 있었다.
공간을 가득 메운 그들의 몸집보다 그들이 내뿜는 농밀한 살기가 더 현찬을 압박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치솟아 오르는 느낌이었다. 마치 세계가 좁게 압축되며 그의 육신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사중 계약을 통해 드래곤을 상대로 힘을 내지 못했다면, 드래곤들이 내뿜는 피어 때문에 제대로 된 전투력을 내지 못했으리라.
현찬은 무심한 눈빛으로 겔라드리온을 마주했다.
그는 현찬이 이런 상황에서도 아무런 동요를 보이지 않자 잠시 움찔했다.
현찬은 강하다. 강한 동시에 머리도 비상하게 굴려, 힘만 믿고 싸우지 않는다. 상대방의 허점을 잘 찌르는 등 전투를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끌고 가 승리를 쟁취한다.
그렇기에, 그는 위험하다.
그가 만약 드래곤을 상대로 다 박살 내겠다는 등의 위험한 마음을 먹는다면
대체 누가 그를 막을 수 있을까
겔라드리온은 일족의 큰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이 자리에서 현찬을 반드시 쓰러뜨려야만 했다.
“겔라드리온. 지금 이 선택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겠지 ”
“알다마다요.”
“쯧.”
현찬은 귀찮다는 듯이 혀를 찼다. 처음 겔라드리온을 만났을 때, 그는 분명히 현찬에게 호의를 보였었다. 처음부터 현찬을 속이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헤르메스의 계약을 통해 호의를 지닌 상대라는 점을 증명한 바도 있었다.
그런데도 현찬을 죽이려고 한다는 건, 심지어 이미 계약까지 된 상태에서 그것을 어기면서까지 저렇게 한다는 것은 그만큼 겔라드리온은 현찬에게 두려움을 품고 있는 것이었다.
겔라드리온 뿐만이 아니었다. 드래곤들은 모두 두려워했다.
현찬의 무력을.
저 한 인간이 언제 자신들을 쓸어버릴지 모른다는 공포심에 그들은 결국 이런 선택을 내놓은 것이다.
“아무리 용족이라고 하더라도, 신의 계약을 맺은 이상 자유로울 수 없을 텐데 이렇게나 많이 끌고 올 줄은 몰랐네.”
“아무리 신의 계약이라도 할지라도, 저희 남은 모든 동족이 동시에 부담한다면 버틸 수는 있죠.”
그러나 이대로 시간을 끈다면 드래곤들은 점점 계약의 영향 아래에 힘을 잃어 갈 것이다.
겔라드리온은 결국에 과격한 수를 던졌다.
계약의 주체인 현찬을 제거한다면 지금 그들이 겪는 부담도 전부 사라질 거로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얼마나 빨리 이 싸움을 끝내느냐였다.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로드 루브나브로와 현찬이 싸울 때 현찬이 크게 다쳐준다면 고마웠겠지만, 실상은 달랐다. 현찬은 오히려 당대 최강의 드래곤인 로드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였다. 심지어 비늘마저 벗어던지고, 드래곤의 영역을 넘어선 로드를 말이다.
현찬은 로드보다 강하며 그 어떤 드래곤보다 강하다.
어쩌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드래곤들을 합친 것보다도 더.
‘그렇기에 반드시 이 자리에서 죽여야만 한다. 저자는, 너무나도 위험해. 너무 강해.’
현찬도 계약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저만한 인간이 고작 자신이 사용한 계약에 종속될까 겔라드리온은 아니라고 보았다.
계약이 아무리 강하다고 할지라도,
세계의 법칙에 영향을 받아도,
결국, 진정한 강자는 계약 따위에 묶이지 않는다.
“일족들이여. 내 말을 듣고 여기까지 따라와 준 것을 고맙게 여긴다.”
겔라드리온은 일족의 얼굴 하나하나를 마지막으로 전부 다 기억했다.
“오늘 우리는, 여기서 마지막 싸움을 벌인다!”
쿠워어어어!
겔라드리온의 말에 다른 드래곤들이 함성으로 호응해주었다. 드래곤 피어의 기세가 몇 배나 더 강해지며 현찬의 몸을 짓눌렀다. 현찬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현찬은 보란 듯이 날개를 활짝 펼쳤다.
“이런다고 너희들이 나를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
“당신이 강하다는 것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강력한 힘에도 한계는 있을 터. 인간은 영령이라는 강대한 존재와 계약을 맺죠. 당신은 특히나 우리 드래곤들에게 위협적인 자들 여럿과 동시에 계약을 맺었을 테고요.”
‘그런데,’ 라며 겔라드리온이 말을 이었다.
“과연 영령들과 계약 맺은 상태를, 다른 드래곤들과 싸우고 로드와도 싸웠으면서 여기서 더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
“…….”
겔라드리온의 말 대로였다.
사중 계약의 힘은 확실히 대단했지만,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었다.
영웅급 셋에 무려 준신급 영령 하나다. 무엇보다 역사 속에서도 손꼽히는 용살자들을 모두 모았으니 마력 소모도 극심했다.
그 상태로 반나절 이상을 유지했으니 오히려 지금 현찬이 버티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박수를 받아 마땅했다.
“그 짧은 시간에 많은 걸 알아냈군. 놀랄 정도로 말이야.”
“…….”
“아니면…….”
현찬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 짧은 시간에, 누군가가 너에게 접근하여 알려주기라도 한 건가 ”
“……!”
진실을 꿰뚫어 보는 말에 겔라드리온은 순간 동요를 숨기지 못했다. 그것을 알아채지 못할 현찬이 아니었다.
“과연. 그랬군. 누군가 너에게 귀띔을 해준 거야.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결단력 있게 모든 드래곤들을 다 이끌고 올 리가 없었지. 나에 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으며, 내 능력에 관해서도 알고 있는 녀석이라…….”
누구인지 짐작은 갔다. 아니, 짐작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새 가면, 에르카닐은 아직도 현찬을 최대 적수라 생각하며 계속 그를 노리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가 소속한 단체인 악신회도 마찬가지.
‘이번 싸움이 끝나면 나도 좀 방비를 단단히 해야겠어.’
현찬은 길게 늘어났던 검기를 원래대로 되돌렸다. 행동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발뭉]은 원래 [테레이오스테]의 모습으로 되돌렸고, 용살자들과 맺은 계약도 전부 다 풀어버렸다.
그 모습에 겔라드리온은 오히려 당황했다.
지금 저 상태를 어떻게든 유지해야 할 판국에 그것을 해제하다니, 죽고 싶어서 저러는 건가
“미쳤습니까 아니면, 더 이 상황을 어떻게 할 수 없으니 포기라도 하시려는 겁니까 ”
“포기 네 눈에는 그렇게 보이겠지. 너희들 모두에게도 말이야.”
현찬은 그런 겔라드리온을 비웃었다.
“드래곤인 너희는 모르겠지. 나약한 우리 인간이, 강해지고 살아남기 위해서 무엇을 하는지. 우리는 절대 포기하지 않아. 너희와 다르게 말이지.”
“그게 무슨…….”
“내가 왜 영령들과의 계약을 풀었는지 알아 이번에 부를 영령은, 이전의 넷보다 훨씬 더 뛰어나기 때문이야.”
이번에 부를 영령은 단 하나다.
하지만 하나라고 해서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이다.
“용살자라고 해도 내가 계약 맺은 자들은 전부 인간이었지. 용을 죽인 위대한 자들이라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인간이었다는 거야.”
현찬이 검을 쥐지 않은 왼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용을 죽인 인간과 계약을 맺고서 너희 드래곤들을 짓밟았었지.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을 하나 해 볼까 ”
“모두 막아!”
무언가 위험함을 느낀 겔라드리온이 발작하듯 소리 질렀다. 주변에서 사태를 지켜보던 드래곤들이 뒤늦게 현찬을 향해 마법을 쏘아냈다. 현찬은 자신을 향해 사방에서 몰아치는 마법 세례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드래곤을 죽인 신은…… 드래곤을 죽인 인간보다 얼마나 더 강할까 ”
그 말을 끝으로, 현찬의 주위는 눈부신 백색의 광휘에 휘감겼다. 마법과 마법이 서로 충돌하고 폭발하며 더욱 큰 위력을 자아냈다. 그것은 서로 부딪치며 공멸하고 주변 공간을 통째로 소멸시켰다.
백이 넘는 드래곤들이 현찬을 향해 동시에 쏘아낸 공격이었다. 그 위력이 얼마나 굉장한지 발아래 깔린 구름이 충격의 여파로 전부 사라졌다. 드래곤들도 너무 강력한 폭발에 휩쓸려 모두 멀찍이 물러났다.
유일하게 물러나지 않은 드래곤은 딱 둘이었다.
루브나브로의 몸을 차지한 <그랑데우스>.
현찬의 죽음을 마지막까지 확인하기 위한 <겔라드리온>.
그랑데우스는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이 싸움을 지켜보았다. 다른 드래곤들은 그런 그랑데우스를 경계했지만 그랑데우스는 다른 드래곤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그의 모든 오감은 아직도 타오르는 저 마력 폭풍에 집중되어 있었으니까.
겔라드리온도 무언가 느꼈는지 눈을 부릅떴다.
“흡! 모두 조심해라! 녀석은 죽지 않았다!”
“뭐 ”
“그럴 리가. 우리 일족 모두가 힘을 모아서 날린 공격이다. 설사 상대가 신이라고 할지라도,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어.”
아직 무언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걸 느끼지 못한 다른 드래곤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들의 태도도 금방 바뀌고 말았다.
새하얗게 빛나는 거대한 폭발이 점점 그 크기를 줄여나가기 시작했다.
작아지고 계속 작아지던 폭발은 어느덧 한 점으로 모였다. 그 크기는 길거리의 조약돌보다도 작았다.
그리고 그 거대한 마력이 압축된 덩어리를 현찬이 손아귀로 꾹 쥐었다.
현찬은 그 엄청난 위력의 공격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핵폭발을 방불케 하는 고열은 현찬에게 땀 한 방울 흘리게 하지 못했다.
이 세계의 그 무엇도,
현찬에게 영향을 줄 수 없었다.
“그, 그런…….”
“고작 인간이…… 어떻게 저런 힘을…….”
그사이에 현찬의 모습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머리카락은 길어져 허리까지 왔으며 그 색은 하늘의 구름처럼 새하얬다. 이마에는 푸른빛 문신이 새겨졌으며, 입고 있는 복장도 움직이기 편한 천 재질의 옷으로 바뀌어 있었다.
가지고 있던 무기도 사라지고, 대천사의 축복이 담긴 날개도 사라졌지만 드래곤들은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저 상태의 현찬은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어, 어떻게. 이미 힘이 다 빠진 것이…….”
“힘이 빠졌다고 한 적은 없어. 그저 오래 유지하기 좀 힘들어졌을 뿐이지. 그렇다면 새 영령과 계약을 맺으면 되는 거잖아 ”
현찬은 별것 아니라는 듯 말하고 있었지만, 사실 현찬도 나름 큰 마력을 소비하며 무리하는 중이다.
지금 현찬이 계약 맺고 있는 영령은 신급 영령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신도 아니고 무려 한 신화의 주신이었다.
서양 신화 속에서 드래곤은 대체로 악하며 강한 존재로 묘사된다.
입에서 불을 뿜으며 사람들을 위협하던 드래곤은 중세 시대에도 있었으며, 그 기원을 더욱 깊이 파고들면 아주 먼 과거부터 존재해왔다.
북유럽 신화 독룡 <니드호그>.
조로아스터교의 악룡 <아지다하카>.
기독교 신화의 <묵시록의 붉은 용>.
각 존재가 신화에서 매우 위협적이었던 그야말로 강대한 악의 용들.
이 중에서도 가장 최고의 악룡으로 손꼽히며 세간에 이름이 오르내린 용이 있다.
<초룡(初龍) 티아마트(Tiamat)>.
티아마트 혹은 티아매트로 불리는 이 드래곤은 메소포타미아 창조 서사시, 에누마 엘리시에서 나오는 여신이다.
태초의 시절 아무것도 없던 혼돈 속에서부터 존재해온 절대적인 존재.
혼돈을 유지하기 위해서 에아신의 주도권을 빼앗기 위해 티아마트는 전쟁을 일으킨다.
티아마트는 신들을 죽이고 세상의 혼돈을 유지하기 위해 11마리의 마수를 낳았다. 그 마수들조차 신들을 위협하는 엄청난 힘을 지녔다고 알려졌다.
그야말로 신화 속 드래곤 중에서 거의 최고인 이 무시무시한 악신도 최후를 맞이한다.
바로 한 신에 의해서.
신들의 왕, <마르두크(Marduk)>.
바빌론의 수호신이자 에누마 엘리시에서 신들을 멸망시키려는 <티아마트>를 죽인 신이다.
죽은 티아마트의 시체를 이용해 하늘과 땅을 만들어냈으며 신들의 왕으로서 오랫동안 숭배된 존재다.
풍요로운 자연과 불과 바람, 폭풍을 관장하는 메소포타미아 신화 최강의 신.
현찬이 계약 맺은 신은 바로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