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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무한계약-176화 (176/265)

# 176

176화 생존의 법칙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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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참. 영령과 계약한 드래곤 녀석이 내 상대가 될 줄은 몰랐는데.”

게다가 상대 또한 신급 영령의 계약자였다.

아직 영령을 다루는 능력이 미숙하여 제대로 영령의 힘을 끌어내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대로 시간을 끌었다가는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현찬은 [발뭉]의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까드득. 손아귀가 검과 맞닿으며 마찰했다. [발뭉]으로부터 푸른 검기가 폭포수처럼 흘러넘쳤다. 검 길이가 순식간에 50m 이상 늘어났다.

“적당히 할 생각은 버릴게. 그러니까…….”

전력을 다한다.

“제길!”

루브나브로는 이를 악물었다. 로드의 자리까지 올라간 자신이 이렇게 인간에게 밀리는 현실이 믿기질 않았다. 자신이 누구인가. 역대 드래곤 로드 중에서도 가장 강하다고 불리며 용신의 자리까지 올라간 <그랑데우스>의 뒤를 이을 드래곤이 아니던가.

그러나 지금 자신은 인간 하나를 상대로 일대일로도 처참하게 지는 상처 입은 드래곤이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상대가 그만큼 강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특히나 현찬이 지닌 용살자의 힘은 루브나브로에게 극도로 위협적이었다.

세계의 순리와 법칙에 따라서, 루브나브로의 힘은 무조건 현찬의 힘에 밀리게 되어있었다.

결국, 제아무리 강한 드래곤이라고 할지라도 방대한 차원에 존재하고 소속된 생명체일 뿐이었다.

‘이번 건 위험하군.’

현찬이 [발뭉]에서 일으킨 푸른 검기를 보며 루브나브로는 어떻게 검을 피해야 할지 벌써 막막해졌다. 위대한 선조이자 최강의 용신인 <그랑데우스>의 힘을 빌리고 있지만, 그 힘을 다루는데 미숙했고 용신이 지닌 힘 중 일부의 힘만으로는 현찬에게 대항할 수 없었다.

[저런. 벌써 끝이야 ]

“……!”

루브나브로는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몸을 떨었다.

그의 동공이 수축했고 다급해진 마음에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지  내 힘을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면서. 결국에는 이렇게 처절하게 패배했잖아.]

“아직…… 아직 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너는 졌다.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한 채, 졌어. 이 이상 싸워봤자 결과는 똑같단다. 아이야.]

그 다그치듯 말하는 근엄한 목소리에 루브나브로는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할 말을 쥐어 짜내서 힘겹게 소리쳤다.

“그렇다면 약속은! 약속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당신은 저와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 저희 일족을, 이 세계에서 살아남게 만드시겠다고요!”

[그랬지. 그러나 거기에는 네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나조차도 그 결말을 장담하지 못한다고 덧붙였고 말이야. 지금의 결과를 봐라. 힘으로 모든 것을 휩쓴 대가가 이것이냐  인간 하나에, 동족들이 죽어 나가는 것 ]

루브나브로는 그 말에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그의 말이 옳았다. 루브나브로는 결국에 자신의 마음대로 선택했고 그 결과는 지금과 같은 상황까지 치닫고 말았다. 그러므로 변명의 말은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아이야. 그리고 너 또한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 기억하고 있겠지 ]

“그, 그건……!”

[약속은 약속이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면 약속을 지금 당장 이행하도록 하거라.]

선조의 말은 그 자체로 힘을 지닌 듯 루브나브로의 몸 전체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것은 벗어날 수 없는 계약의 속박이었다. 루브나브로는 자신이 결국에는 끝의 끝까지 몰렸다는 것을 자각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미 자신은 더 어디로 벗어날 수 없는 처지라는 것도.

그 최후. 자신으로서는 모든 것을 위한다고 행동했던 것의 최후가 이렇게 허무하다는 것도.

전부 자각하고 말았다.

&

“음 ”

현찬은 루브나브로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던 녀석이 조금 전부터 갑자기 당황스러워하더니 이내 갑자기 고개를 푹 떨군 것이다. 포기라도 한 것일까  그런 생각이 미칠 무렵 그의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

촤아아악!

루브나브로의 비늘 색이 점점 밝아지더니 이내 눈부신 무지갯빛으로 변했다.

변한 것은 비늘 색깔만이 아니었다. 풍기는 분위기를 포함하여 거대한 신체에서 스며 나오는 기운의 질과 농도도 확연히 달라졌다.

“이건…… ”

현찬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발뭉]을 휘둘렀다. 연푸른 검기가 하늘을 가르며 그대로 루브나브로의 몸을 좌우로 갈라버릴 듯이 날아갔다. 그 순간 루브나브로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극에 달했다.

파아앗!

눈부신 칠색 광휘 때문에 현찬도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눈을 다시 떴을 때 보이는 건 아무런 상처를 입지 않은 채 고고히 하늘을 비행하는 루브나브로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달랐다.

녀석은 무언가 달라졌다. 겉모습만이 아닌 근본적인 무언가가 다르게 바뀐 듯했다.

“뭐야. 넌 누구지 ”

[눈치가 참 빠르군그래. 내가 루브나브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다니 말이야.]

“그 녀석은 기본적으로 거만함이 몸에 절어있었거든. 하지만 그쪽은 달라.”

[쯧. 녀석의 행동을 내가 봐 왔으니 뭐라고 비호의 말조차 하지 못하겠군. 그래 맞다. 나는 루브나브로가 아니야. 네가 눈치가 빠른 인간이라면 대충 짐작하고 있었을 텐데 ]

“…… 그래. 너였군. 드래곤 중에서 유일하게 영령의 자리까지 올라간 드래곤. 용신 그랑데우스.”

[내 이름을 알아줘서 기쁘군.]

현찬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갑자기 루브나브로의 육신을 차지한 그랑데우스의 의도가 의심스러웠다. 지금 보이는 저 여유로운 태도조차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현찬이 재차 [발뭉]을 휘두르려고 하는 순간 루브나브로의 몸을 빌린 그랑데우스가 먼저 선수 쳤다.

[이봐 진정해. 나는 자네와 싸울 생각이 없어.]

“지금 이 상황에서 진정하라고 말한들 내가 멈출 것 같아 ”

[일단 이야기해 보자고. 애초에, 멋대로 이 상황을 이렇게 끌고 간 것은 결국 현재의 로드 녀석의 독단적인 선택이었으니까.]

“그쪽은 녀석과 생각이 같아서 계약 맺은 게 아니었어  왜  수틀리니까 꼬리 자르고 도망가기라도 하는 건가 ”

[아니. 나는 그저 로드 녀석에게 길을 제시해줬을 뿐이야. 우리 동족의 미래가 걸린 일이라서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거든. 그래도 동족이니까, 대충 앞으로 일어날 일만 알려줬지. 영령이라는 자리에 올라가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거든.]

드래곤 중에서 유일하게 영령의 자리까지 올라간 그랑데우스는 격이 높아지면서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엘 드라코> 말고도 세계 곳곳에는 다양한 차원들이 존재했으며, 또 그 차원들이 하나로 합쳐지며 많은 영웅이 태어나고 죽고를 반복한다. 세계와 세계는 동맹을 맺기도 했으며, 혹은 서로 적대관계에 서서 싸우기도 했다.

그런 그랑데우스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자신의 일족의 미래였다.

드래곤은 결국에 멸망하고 만다.

중간 과정은 알 수 없이 오직 그런 결과만 있었을 뿐이었다.

[나야 이미 현세의 모든 것을 끊어내고 새로운 존재가 되었지만, 그래도 마지막 온정이라는 것이 남아 있었거든. 이 녀석에게 귀띔해 줬더니, 어떻게든 도와달라고 빌더라고. 그래서 서로 계약을 맺었지.]

“계약이라…….”

[나는 로드에게 미래를 말해주고, 그에게 내 힘의 일부를 빌려주었다. 남은 건 로드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렸었지. 거기에 나는 더 개입하지 않았어. 드래곤들의 미래를 선택하더라도, 이미 떠나간 일족이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자신의 선택 끝에 멸망이 도래할지 모른다는 사실이 두려운 게 아니라 ”

[…… 그것도 맞지. 아무튼, 로드는 나에게 대신 다른 조건을 내걸었지. 녀석의 선택이 그릇되었고, 그 결과가 결국에는 내가 말한 대로 이루어진다면 육체를 나에게 넘기겠다고 말이야.]

“뭐 ”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있다.

원래 계약자라 하더라도 모든 영령과 수월하게 계약이 성사되는 건 아니다.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는 영령과 계약을 맺는다면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태도 발생하고 만다.

특히나 정신이 나약한 인간이 <악령>이나 <괴물>과 계약을 맺었을 경우 그들의 사상에 오염되거나, 지나치게 그들과 가까워진다면 오히려 자아를 잃고 육신을 빼앗기는 일도 있었다.

지금 그랑데우스가 한 짓은 딱 그 꼴이었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  강력한 힘을 이용해, 마지막까지 동족을 살리기 위한 발버둥이라도 치려고 ”

[아니. 오히려 반대야. 로드 녀석은 내가 그렇게 해줄 거라 믿고 몸을 줬겠지만, 실상은 다르지.]

그랑데우스는 드래곤 주제에 입을 씨익 찢으며 웃었다.

[나는 이제 내 맘대로 살 거야.]

“뭐 ”

그 책임감 없는 말에 현찬은 그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자유롭게 살 거야. 영령으로서 격이 오른 것은 좋지만, 이 세계의 영령은 나 혼자야. 그게 얼마나 지루한지 알아  드래곤 세계가 다른 세상과 연결됐다고는 하지만, 결국 이쪽 세계의 영령은 계약자가 없으면 다른 세계의 영령들과 접촉도 힘들어. 그쪽 세계로 넘어가는 것도 힘들지.]

그랑데우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리 그래도 혼자서, 이 쓸쓸한 곳에서 미친 듯이 오래 살 수는 없잖아  적어도 나의 용 인생에 즐거움은 있어야지. 그래서 이 몸을 차지해서 다른 세계를 돌아다닐 생각이야.]

“…… 미치겠군.”

설마 용신이라는 작자가 이렇게나 무책임할 줄은 몰랐다.

현찬은 저 녀석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됐다. 죽여야 하는가  그러기에는 상대는 싸우기 싫어했고 적의도 없다. 그렇다고 놔둬야 하는가  그러기에는 어딘가 불안했다.

저 속을 알 수 없는 드래곤이 당장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몰랐으니까.

“애초에 너희 일족은 모두 죽지는 않아. 온건파 녀석들은 살아남을 테니까. 하지만 너는 모든 드래곤이 멸망하면 녀석의 몸을 빼앗고 나타난다고 했어. 로드 녀석과 한 약속을 어긴 거야.”

[지금 당장은 그렇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을 거야.]

그랑데우스는 자신했다. 신의 격까지 오른 드래곤이 그렇게 말하니 분명히 무언가 확신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 순간 멀리서부터 거대한 존재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온건파 드래곤들이었다. 수는 많지 않았지만, 다들 하나같이 강한 녀석들이었다.

선두에 선 용은 겔라드리온이었다.

“현찬 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둥지를 지키는 다른 일족들과 싸우느라.”

“아니. 딱히 상관은 없어. 그보다…….”

현찬은 겔라드리온 주위에 포진한 드래곤들을 보며 물었다.

“꽤 많이 몰려왔네 ”

“로드를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이 정도 수는 와야 하니까요.”

“그래…….”

분명히 별것 없는 대화였다.

하지만 현찬은 자꾸 무언가가 자신을 쿡쿡 찌르는 느낌을 받았다.

<헤르메스의 눈>을 사용할 수 없는 지금, 유일하게 현찬이 믿고 따를 수 있는 것은 직감이었다.

그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위험하다고.

“…….”

현찬은 말없이 그랑데우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무언가, 무언가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겔라드리온.”

“예.”

“조금 전에 적들과 싸우느라 늦었다고 했지 ”

“예. 그렇죠.”

“…….”

현찬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상황을 파악하고 현재 상황에 관한 정보와 자료를 떠올리며 머리로 빠르게 정리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서도, 몸의 본능도 확실히 일깨워 제6의 감각을 최대한 발휘했다.

“겔라드리온.”

현찬은 다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예.”

“너희 온건파는…… 세계의 균형과 조화를 맞춘다고 했지 ”

“현찬 님. 지금 상황에서 대체 왜 그런 질문을…… ”

“로드는 신경 안 써도 괜찮아. 중요한 건 이거야. 어서 대답해.”

현찬의 말에 겔라드리온은 당황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세계의 균형. 그것이 저희가 바라는 것이지요.”

“과격파 드래곤은 강한 힘을 지녔으면서 그것을 옳지 않은 방식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너희들이 잘라내려는 것이고.”

“…… 예.”

“너희들에게 있어서 종족을 지키는 것보다 세계의 균형을 지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겠지 ”

“그게 저희의 사명이니까요.”

점점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다른 드래곤들은 이런 상황에서 계속 쓸데없는 질문만 하는 현찬에게 슬슬 짜증 난다는 기색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랑데우스만이 즐겁다는 듯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너희는…… 세계의 균형을 위협하는 존재는 당연히 제거해야겠군 ”

“…….”

대답을 잇던 겔라드리온도 이번만큼은 입을 다물었다.

현찬은 알아차리고 말았다.

결국, 이런 결말이었구나.

“너희 온건파의 관점에서 보자면…… 한 인간이 강대한 한 종족의 태반을 멸망시킬 힘을 지니고 있다면, 그 또한 균형을 해치는 존재겠지 ”

온건파 드래곤들은 ‘균형’과 평화를 수호한다.

자신들의 세계만이 아닌 다른 세계까지.

그것은 선한 의도라고 볼 수 있겠지만, 다른 의미로는 다른 세계마저 자신들의 뜻대로 흘러가게 만들겠다는 또 다른 오만과 위선의 증표였다.

온건파가 이곳까지 찾아온 진정한 의도는 따로 있었다.

그렇다. 지금 모인 이 드래곤들은.

전부 현찬을 죽이기 위해서 이 자리까지 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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