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무한계약-174화 (174/265)

# 174

174화 드래곤의 둥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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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르살라의 눈동자에 초점이 사라졌다. 죽은 것이다.

현찬은 겔라드리온을 보며 물었다.

“상처가 좀 심한 것 같은데, 괜찮아?”

“괜찮습니다. 치명상은 전부 피했으니까요. 이 정도면 치료 마법 몇 번 하면 금방 낫습니다.”

겔라드리온의 말대로 그가 마법을 몇 번 사용하자 몸에 새겨진 상처는 순식간에 아물었다. 하지만 이미 흘린 피나, 떨어진 체력은 마법으로 메꿀 수 없는 것이었다. 겔라드리온의 두 눈동자에는 피로감이 가득했다.

“그보다 방금 말한 용신이라는 건 대체 뭐지?”

“용신 님은…… 저희 드래곤들이 유일하게 섬기는 존재입니다. 용족은 태어날 때부터 강한 능력을 타고나죠. 그리고 세월이 흐르며 성장할수록 더욱 강해집니다.”

그리고 용 중에서 최정상에 오른 이들이 바로 고룡급 드래곤들이다.

오래 살면 살수록 강해지는 드래곤들에게는 늙어서 노화하여 약해진다는 개념이 없다. 그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강해지며 주어진 수명의 끝에 도달했을 때 힘의 정점을 찍었다.

“아주 먼 옛날, 유일하게 한 드래곤이 자신에게 주어진 한계를 뛰어넘었다고 알려졌습니다.”

“한계를 뛰어넘어?”

“예. 수명이 다한 용은 결국 자신의 커지는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죽고 맙니다. 대부분의 고룡급 드래곤들은 그때가 되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엘 드라코>의 일부가 되어 사라지죠. 하지만 유일하게 그것을 거부한 드래곤이 저희가 용신 님이라 부르는 드래곤입니다.”

<용신 그랑데우스>.

태어날 때부터 모든 강한 능력을 타고난 드래곤이자 드래곤이 지니는 힘의 한계를 뛰어넘어 그 이상의 무언가가 된 존재.

“용신 님이 탄생할 때, <엘 드라코> 전체가 마치 그 탄생을 축복하듯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용신 님은 마지막에는 엄청난 빛과 함께 하늘로 사라지셨고 그분이 남긴 것은 딱 한 조각의 비늘이었습니다.”

그 비늘은 용신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였다.

“그 용신은 무슨 일족이었지?”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아무도 모른다고? 이상하지 않아? 비늘을 남겼다면 그 비늘의 색깔로 무슨 드래곤인지 알 거 아니야.”

“어찌 보면 당연한 생각입니다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하나 남은 비늘 조각은 그 어떠한 색도 없었으니까요. 아니, 색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색깔이 한데 뒤엉켜 있었습니다.”

겔라드리온은 딱 한 번 그 비늘을 본 적이 있었다.

모든 드래곤 중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드래곤 로드(Dragon Load)가 관리한다는 용신의 비늘. 그것은 붉은색도, 푸른색도, 녹색도, 황금색도, 흰색도, 검은색도 아닌 무지갯빛 같았다.

“그런데 왜 저 녀석이 그 용신의 이름을 부른 거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흠. 뭔가 있는 것 같은데.”

현찬은 용신의 존재에 관해서 추측했다. 그의 예상이 맞는다면 용신은 드래곤 중에서 유일하게 영령으로서의 격을 쌓은 존재였으리라.

<엘 드라코>의 드래곤들은 워낙 강하기 때문에 영령의 힘을 빌리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 업적을 쌓거나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명성을 쌓는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령으로 승격한 존재마저 없었다.

죽으면 그저 자연으로 되돌아간다.

드래곤들은 그런 종족이었다.

‘드래곤들 중에서 유일하게 영령으로 승화한 드래곤이라. 영령으로서의 격을 따진다면 당연히 신급 영령이겠지.’

하지만 현찬은 그런 용신의 기운을 느끼지 못했다. 이 세계에 넘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정작 헤르메스나 아테나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걸 보면 적어도 현찬이 무언가를 놓친 것 같지는 않았다.

“뭐. 그게 어찌 됐든 일단 싸움을 시작했으니 끝을 봐야겠지. 그 과격파가 머무는 장소는 어디인지 알아?”

“예. 하지만 거기까지 가려면 많은 드래곤들을 뚫고 가셔야 할 겁니다.”

“그거야 쉽지. 위치만 말해. 먼저 가 있을 테니까. 너는 체력을 좀 회복하고 남은 드래곤들을 이끌고 지원해주면 돼. 그래서 놈들의 본거지는 어디야?”

“이곳으로부터 남동쪽입니다. 온갖 숲과 다양한 환경을 넘어서면 하늘 높게 솟아난 거대한 산이 보일 겁니다.”

겔라드리온은 무언가 착잡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드래곤 로드의 레어. 그곳이 적들의 본거지입니다.”

&

[현찬아. 이대로 가도 괜찮겠어?]

빠른 속도로 목표를 향해 날아가는 현찬에게 헤르메스가 조금 걸리는 게 있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놈들의 본거지가 드래곤들 중에서 가장 강하다는 로드의 레어라는 것이 조금 걱정된 탓이다.

“확실히 거기에 백 이상이나 되는 수의 용이 있는데 혼자서 쳐들어가는 건 무모한 행동이지.”

현찬이 아무리 지금 용살자로서 힘을 지녔다 하더라도 이번만큼은 상대의 수나 격이 달랐다.

“무엇보다 로드의 레어라면 드래곤 로드 또한 적이라는 소리잖아.”

[어떻게 보면 그 로드가 라스트 보스일 수도 있지.]

“그리고 용신의 존재도 좀 걸리기는 해. 이 차원에 존재하는 유일한 영령이자 신급 영령일 텐데 우리에게 아직 아무런 접근이 없었으니까.”

[으음. 확실히 그래. 나도 뭔가 기운을 뿜어서 찾으려고 해도 잘 잡히지도 않아. 다만 흔적 같은 것이 남아있는 걸 보아서 허상의 존재는 아니야. 분명히 어딘가에 있어.]

“그 본거지에 간다면 알게 되겠지.”

현찬도 이번만큼은 어느 정도 긴장했다. 지금 현찬이 가는 곳은 과격파 드래곤들의 본거지다. 게다가 그들의 우두머리는 모든 드래곤들 중에서 가장 강하다는 드래곤 로드이기도 했다.

전력 차이를 생각하면 싸움 자체가 성립될 수 없었다.

“물론, 이쪽도 생각은 있지.”

&

<엘 드라코>에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게 솟아오른 산 하나가 있다. 지구의 에베레스트산보다 훨씬 더 높고 거대한 이 산은 다수의 드래곤이 함께 거주하는 공동 레어며 그 정상 부분에는 현세대 최강의 드래곤인 로드가 기거하는 장소가 있었다.

주변 곳곳에는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한 방어 마법이 지천에 있었고 현재 거주하는 드래곤의 수만 해도 세 자릿수였다. 전 차원을 통틀어도 이보다 더 뛰어난 요새는 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드래곤들은 조금 느긋하게 지내고 있었다.

굳이 그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단단히 방비할 필요는 없었다. 어떤 겁 없는 작자가 100마리가 넘는 드래곤의 레어에 쳐들어오겠는가.

다른 세계의 종족들? 그들은 드래곤과 비교하면 약해 빠졌다. 이미 몇 개의 차원을 드래곤들이 없애기도 했다.

그나마 상대할 만한 적은 자신들을 방해하는 온건파 드래곤이었지만, 그들은 절대로 먼저 싸움을 열지 않는다. 온건파는 과격파의 움직임에 맞추어서 반응한다. 과격파가 움직이지 않으면 그들도 사태의 추이를 지켜볼 뿐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 어떠한 드래곤도 이 둥지가 습격받을 거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 둥지를 향해 상처 입은 드래곤 한 마리가 힘겹게 날아가고 있었다.

“멈춰라.”

“누구냐.”

드래곤들이 게을리 퍼져있다고 하더라도 명색의 그들만의 요새다. 입구를 지키는 드래곤은 있었다.

“흑의 일족 그란로기아입니다.”

“음? 그대는 이번에 다른 차원으로 떠났던 흑의 일족이 아닌가? 다른 동족들은 어디에 두고 어째서 혼자 왔지? 그보다 그 상처는 또 뭔가?”

입구를 지키는 드래곤은 그제야 그란로기아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여러 종족 중 최강인 드래곤이, 상처를 입었다? 심지어 여럿이서 떠났는데 그란로기아 혼자서만 돌아왔다?

이건 일이 터져도 뭔가 단단히 터졌다는 걸 의미했다.

“큰일입니다. 온건파 녀석들이 다른 차원과 동맹을 맺고 저희를 공격했습니다!”

“뭐라?!”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온건파의 모든 전력이 한곳에 모여 있어서 어찌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다른 차원의 강자는 저희 동족의 성체와 맞먹는 힘을 지니기도 했습니다. 저 혼자서만 가까스로 도망쳐 나온 겁니다.”

“온건파 녀석들이 먼저 움직였단 말인가? 이 드래곤의 자존심도 모두 갖다 버린 놈들! 열등한 존재들과 손을 잡다니!”

“지금 이럴 때가 아닙니다! 놈들은 벌써 저희 둥지를 습격할 준비를 끝냈습니다. 다른 분들께도 빠르게 이 사실을 전해야 합니다!”

“알겠네. 하지만 상처가 심해 보이니 자네는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게. 우리가 들어가서 상황을 알리도록 하지.”

“지금 그럴 시간도 없단 말입니다! 당장이라도 적들이 들이닥칠지 모르는데, 이깟 상처가 중요합니까? 제가 빨리 로드께 이 사실을 알리겠습니다!”

그란로기아의 기백에 입구를 지키는 드래곤들이 일순 움찔했다.

“하, 하지만 아무리 놈들이라도 이 둥지를 바로 습격하는 건 불가능하다. 게다가 로드께서는 지금 본인의 레어에 계셔서 바쁘시니 함부로 만날 수 있지 않다.”

“싸우면 저희가 이길 겁니다. 하지만 대비하지 못한 싸움에 희생될 저희 동족들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저희가 조금이라도 미리 준비할수록 동족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제가 직접 가야만,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께 상황을 전해 줄 시간이 없습니다!”

“크흠. 허나…….”

“무엇보다 용신 님과 관련된 일도 있습니다. 다른 세계의 신이 개입했습니다.”

“뭐, 뭐라?! 그거 큰일이군!”

입구를 지키는 드래곤들은 서로 마주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입구를 가득 채운 마력을 다루어 방어벽을 해체했다.

“어서 들어가 보게. 한시가 급해.”

“감사합니다.”

그란로기아는 그리고 드래곤들도 통과할 수 있는 거대한 동굴로 들어갔다. 상처를 입은 상태라 그런지 움직이는 속도는 더뎠지만, 거기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나아갔다. 그렇게 다른 드래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순간 그란로기아의 발걸음이 멈췄다.

“야. 없냐? 없지?”

[응. 갔다. 갔어.]

그란로기아에게서 흘러나오는 건 현찬의 목소리였다.

사실 지금 이 드래곤은 그란로기아가 아니었다. 그란로기아 탈을 쓴 현찬이었다.

[세상에. 이런 단순한 방법이 먹혀들 줄이야.]

[여신이시여. 그것은 다 저의 능력 때문입니다.]

허탈하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아테나에게 말을 건 것은 바로 <카드모스>였다.

아게노르의 아들이자 용을 죽여서 신의 분노를 산 그는 용살자 중에서도 상당히 불행한 삶을 살았다. 그는 마지막엔 스스로 용이 되어 낙원으로 떠남으로써 신화 속에서 종적을 감춘다.

즉 <카드모스>는 용살자이자 용으로 변할 수 있는 영령이다.

물론 진짜 드래곤과 똑같은 힘과 권능을 똑같이 얻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겉모습만 따라 하는 정도라면 무리가 아니었다.

“애초에 드래곤은 누가 자기들의 모습을 따라 할 수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 할걸?”

이곳에 모인 드래곤들은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놈들이다.

그들은 너무 거만해서 적이 자신들의 모습을 흉내 내서 들어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지나친 그들의 오만과 우둔함이 지금의 안일한 결과를 낳고 만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쉽게 들어올 수 있었지.”

침입자에 대한 제대로 된 대비조차 하지 않은 용들.

용의 모습으로 변신해서 뛰어난 연기력으로 적의 본거지에 침투한 현찬.

심지어 현찬은 용신이라는 강력한 패까지 꺼내 들었다.

이 모든 것이 서로 조화를 일으켰고 현찬은 둥지로 침입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자. 이제 로드라는 놈을 만나러 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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