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
173화 용 사냥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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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텔기아!”
“이 인간 놈이 감히 우리 위대한 드래곤에게……!”
베텔기아의 허무한 죽음은 남은 아홉 드래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현찬이 어떠한 수준의 힘을 지니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베텔기아가 일격에 죽은 이유도 그저 베텔기아가 방심했고 허점을 찔렸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현찬이 그저 무언가 요사스러운 술법을 부렸으며 천운에 천운이 겹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여겼다.
드래곤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신들이 최강이라는 생각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인간은 작고 약하고 멍청하기까지 하며 욕심만 많다. 그런 인간보다 고등한 자신들이 힘에 밀려서 졌다고 생각조차 못 했다.
그들이 시야를 넓게 하고 조금 더 넓은 세계를 보았다면 조금만 더 현명했다면.
모든 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오만에 찌든 드래곤들은 ‘인간’이 지닌 힘의 가능성을 무시했으며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 자리에 있는 드래곤 중에는 오직 겔라드리온만이 현찬의 진정한 힘을 알고 있었다.
그 또한 현찬의 힘에 관해 조금은 걱정이 되었지만, 조금 전 흑룡의 일족인 베텔기아를 한 방에 쓰러뜨린 것을 보고 확신이 섰다.
현찬은 마음만 먹으면 <엘 드라코>에 있는 모든 드래곤들을 다 쓸어버릴 수 있다.
“베텔기아의 원수를 갚아주마!”
성체 드래곤들이 마력을 일으켰다. 인간의 육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대한 육체는 거대한 마력의 탱크였다. 드래곤 하트는 거대한 마력의 흐름을 전부 제어했으며 드래곤의 육체 곳곳에 빠지지 않고 마력을 스며들게 했다.
드래곤들은 자신의 의지만으로 마법들을 발동했다. 분노로 인해 강하게 타오르는 마력은 발동되는 모든 마법의 격을 상승시켰다. 그것도 한 단계가 아닌 무려 수단계나 더.
그들이 일으키는 불꽃은 태양처럼 뜨거웠고 그들이 만드는 얼음은 거대한 빙하처럼 차가웠다.
하늘 가득했던 구름은 화염의 열기에 모조리 증발해서 사라졌다.
대지가 순식간에 얼음으로 뒤덮였고 주변의 땅이 크게 진동했다. 기압이 세졌고 강력한 마력 때문에 식물들은 가루처럼 사라졌다.
아홉 마리 드래곤이 동시에 내뿜는 기운은 세상을 크게 흔들었다.
한 마리만 나타나도 어지간한 나라 하나는 날아간다.
이것이 사상 최강의 종족인 드래곤.
이것이 분노한 용들의 힘.
“네놈의 뼛가루 하나도 남기지 않겠다!”
현찬은 자신을 향해 사방에서 몰아치는 마법을 보며 가만히 있었다. 피부를 저릿하게 만드는 위력은 확실히 위협적이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면 현찬은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소멸할 것이다.
그대로 맞아준다면 말이다.
콰아아아아!
마법과 마법이 서로 충돌하며 강렬한 충격파를 흩뿌렸다. 거대한 빙산이 맨땅에 솟아나고 지반이 붕괴하며 무지막지한 불기둥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엄청난 바람이 불고 벼락이 떨어졌다.
귀청을 찢는 소음과 눈을 따갑게 만드는 섬광의 연속. 대기가 충격에 울릴 때마다 드래곤들 또한 비늘이 가늘게 진동했다. 코를 찌르는 파괴의 향기가 그들의 기분을 더욱 고양했다.
성체 드래곤들은 현찬의 죽음을 확신했다. 그들은 바로 다음 표적으로 겔라드리온에게 향했다.
반면 고룡급 드래곤은 눈을 가늘게 뜨다가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크게 외쳤다.
“모두 조심해라! 인간 녀석은 죽지 않았다!”
고룡급 드래곤들은 보았다.
마법이 닿기 직전 아주 찰나의 순간에 현찬의 모습이 허깨비처럼 사라진 것을.
그들의 공격은 그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갈랐을 뿐이고 적은 그곳에 없었다.
“그게 무슨…… 크아악!”
성체 드래곤들이 의아해하는 순간 한 드래곤이 비명을 지르며 지상으로 추락했다. 그 드래곤의 몸 곳곳에는 구멍이 송송 뚫려 있었고 거기에서 붉은 피가 쏟아져 내렸다.
아주 짧은 시간에 이어진 연속 공격에 드래곤은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적이다! 인간이 아직 살아있어!”
“어디냐! 대체 어디에 있는 거냐!”
드래곤들은 거대한 머리를 흔들며 현찬의 모습을 찾으려 애를 썼다. 그런 드래곤들의 사이로 새하얀 빛을 내는 무언가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드래곤들은 움직임을 인지조차 못 했다.
빛이 번쩍이는 듯하더니 또 한 마리의 드래곤이 지상으로 처참하게 추락했다.
빛에 휘감긴 현찬은 자신을 비웃었던 적색 드래곤 하나를 쓰러뜨린 후에 다시 빠르게 움직였다.
“너희는 강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는 내게 안 돼.”
드래곤들의 공격은 강했다. 하지만 맞지 않는 공격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놈들은 강하고 거대했지만, 결정적으로 기동력과 스피드가 부족하다. 먼 거리를 날 때는 빠르게 날 수 있겠지만, 이렇게 한정된 범위에서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는 현찬에게 대응할 수 있는 자들은 거의 없었다.
“건방진 놈! 우리를 우습게 보지 마라!”
현찬의 도발에 분노한 드래곤 몇 마리가 사방으로 마법을 난사했다. 워낙 마력이 뛰어나서 광범위한 공격들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드래곤들은 하늘을 나는 현찬을 이 마법들로 뒤덮을 생각이었다.
무식하지만 확실히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다만 이 작전이 효과를 보려면 한 가지 전제가 깔려야 한다. 상대방이 이런 마법에 당할 정도로 방어력이 형편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현찬은 그 전제가 전혀 통하지 않았다.
쏴아아아악!
새하얀 빛줄기는 그대로 마법들을 반으로 갈랐다. 성스러운 기운으로 가득 찬 현찬은 용이 사용하는 모든 마력에 간섭할 수 있었다. 그들이 뿜는 불, 얼음, 바람 모든 것을, 현찬은 이 창으로 꿰뚫을 수 있었다.
콰아앙!
“크아아악!”
현찬의 주먹에 얻어맞은 한 드래곤이 지상으로 추락했다. 엄청난 스피드가 <베오울프>가 지닌 힘에 더해지자 주먹질 하나로도 드래곤들을 쓰러뜨리는 힘이 되었다. 현찬에게 제대로 이마를 얻어맞은 드래곤은 비늘과 함께 두개골이 산산조각났다.
“저기다!”
“죽어라!”
남은 드래곤들이 일제히 숨을 크게 들이쉬며 브레스를 뿜었다. 드래곤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무기는 그들의 육체도 마력도 아닌 그들의 숨결이었다.
각 속성을 지닌 다양한 숨결이 광범위하게 뿜어져 나오며 세상을 뒤덮었다.
겔라드리온이 끼어들려고 했지만, 그의 앞에 고룡급 용 한 마리가 막아섰다.
“겔라드리온. 네놈은 내 상대를 해 줘야겠다.”
“케르살라!”
“저 인간이 네가 데려온 만큼 강하다는 것은 인정하마. 하지만 여러 드래곤들이 내뿜는 브레스를 과연 견딜 수 있을까? 네놈의 간계는 여기서 끝이다. 그리고 네놈은 이 자리에서 내가 처리해주지!”
“쉽게 당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건 붙어봐야 알겠지.”
두 드래곤이 서로 부닥쳤다. 겔라드리온과 녹의 일족 케르살라는 입을 쩍 벌리며 날카로운 이빨로 상대방의 몸을 물어뜯으려 했고 꼬리를 휘두르며 공격을 가했다. 드래곤끼리 싸움에서 마법은 의미가 없다. 중요한 건 육탄전이었다.
두 드래곤이 싸우는 동안 남은 여섯 마리 드래곤은 계속 브레스를 뿜었다. 그러면서 현찬이 도망치지 못하게 고개를 사방으로 돌리며 숨결을 흩뿌렸다. 다양한 색깔의 브레스가 하늘을 알록달록하게 물들었다.
하늘이라는 거대한 화폭에 다양한 물감으로 덧대어 색칠한 듯한 광경이 펼쳐졌다. 모든 생명체는 그 색깔에 닿는 순간 순식간에 사라진다. 아름다운 풍경과는 다르게 사실상 그곳은 지옥도였다.
그 지옥 속에서도 한 인간은 아직도 살아 있었다.
“투창. 전개.”
현찬이 창을 손에 쥐고 들어 올리자 빛으로 생성된 다른 창들이 생겨났다. 그것은 순식간에 20자루로 늘어나 부채꼴처럼 펼쳐졌다. 그것은 현찬의 창끝을 따라 목표물을 향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그렇게 잘난 덩치도, 날개가 없다면 날지도 못하겠지. 볼품없이 떨어져라. 도마뱀들아.”
현찬은 선언과 함께 빛의 창들을 그 움직임의 궤적을 남기며 드래곤들을 향해 쏘았다.
“위험하다! 피해라!”
마지막 고룡의 외침에 몇몇 드래곤들은 산개했지만, 아직도 인간의 공격을 피하고 싶지 않다는 오기를 부리는 드래곤들 또한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몸 주위로 마력을 철저하게 둘러서 방어 마법을 겹겹이 발동시켰다.
운석이 떨어져도 절대 뚫리지 않을 절대적인 방어. 게다가 어지간한 공격은 모두 무위로 돌려버리는 튼튼한 비늘.
맞붙어 공격하는 것보다는 방어를 선택한 드래곤은 절대 죽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수십 갈래의 빛이 방어를 선택한 드래곤들을 향했다.
그리고 그것은 드래곤들의 방어 마법을 무참히 찢어발기며 그대로 놈들의 날개를 걸레짝으로 만들었다.
구멍이 가득 뚫린 피막은 바람이 쉽게 통과했다. 드래곤들은 망가진 날개로 자신의 거대한 덩치를 감당하지 못했다. 그들은 지면으로 추락했고 빛의 창은 떨어지는 드래곤들을 끝까지 쫓아 놈들의 목을 물어뜯었다.
빛의 창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드래곤들을 죽이겠다는 의지를 지녔는지 빛의 창은 다음 타겟을 노리며 허공에 새하얀 궤적들을 그렸다.
그것은 목표로 한 드래곤들이 모두 죽기 전까지 절대로 멈추지 않는 공격이었다.
마지막 남은 고룡급 드래곤이자 적색 용인 살루리온은 날개를 활짝 펼치며 땅으로부터 수직으로 솟구쳐 올랐다. 살루리온의 뒤를 빛의 창들이 쫓아왔다. 그의 비행 궤적을 쫓아 빛의 창은 허공에 새하얀 그림을 그렸다.
“이런!”
살루리온은 몸을 옆으로 틀어 빠르게 회전했다. 조금 전까지 그의 날개가 있던 자리를 빛의 창들이 스쳐 지나갔다.
살루리온은 빛의 창을 향해 브레스를 내뿜었다. 그 일격으로 자신을 쫓는 빛의 창을 없애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살루리온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빛의 창을 없앤 건 좋지만 정작 현찬의 모습은 놓쳤다. 그는 다시 고도를 낮추며 내려왔다.
그리고 그는 볼 수 있었다.
남은 다섯 마리의 드래곤들이 모두 싸늘한 시체가 되어 바닥을 뒹굴고 있는 것을.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었고 적수마저 없었던 드래곤들이…… 단 한 명의 인간에게 패배하여 모두 죽고 말았다. 이 충격적인 사실에 살루리온은 눈을 부릅떴다.
그런 살루리온의 등 뒤로, 새하얀 빛으로 이루어진 현찬이 천천히 내려왔다.
살루리온은 굳어서 잘 움직이지 않는 목을 돌려 현찬을 바라보았다. 한 손에는 창을 쥐고, 등 뒤로 강렬한 후광을 뿜는 현찬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살루리온을 벌레처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아.”
살루리온은 깨달았다.
저것은 인간이 아니다. 고작 인간 따위가 아니다.
저자는 거만하고 타락해버린 용들을 모두 쓸어버리기 위해서 신이 직접 보낸 사자다.
세상의 모든 타락한 용을 멸하고 그 죄업의 낙인을 찍는 ‘용살자’ 그 자체였다.
살루리온은 저항을 포기했다.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여기서 무슨 발악을 해도 그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기정사실이었다. 살루리온은 자신의 최후를 직감하고 달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우리는…… 너무나도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구나.’
그것이 살루리온이 죽기 직전 생의 마지막에 떠올린 생각이었다.
그 직후 날카롭게 벼른 빛의 창이 살루리온의 미간을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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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억! 허억!”
겔라드리온과 케르살라의 싸움은 치열했다. 겔라드리온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상대 또한 자신의 일족에서 거의 최고의 자리에 오른 고룡급 드래곤이다. 오히려 그보다 더 어린 겔라드리온이 불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겔라드리온은 그 처절한 싸움의 끝에 결국 승리했다.
케르살라는 피투성이가 된 상태로 일어서지도 못한 채 지면에 쓰러져 있었다.
겔라드리온의 몸 곳곳에서도 상처가 있었지만 케르살라 정도는 아니었다.
“강하구나. 과연 적색 일족의 최강의 드래곤이라 불릴 만해.”
“너 또한 강했다 케르살라. 만약에 그쪽이 조금만 방심하지 않았더라면 쓰러진 건 내가 됐겠지.”
“큭큭. 가장 성격이 불같다는 적색 일족 중에서도 예의 바른 녀석 같으니라고. 하지만 이걸로 기뻐하지 말라. 아직, 우리의 뜻에 동참하는 동료들은 많이 남았으니까. 나보다 훨씬 강한 많은 용이 그대를 맞이할 것이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현찬 님!”
케르살라는 현찬이 승리했음을 직감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인간이 이렇게 멀쩡하게 다가올 수는 없었을 테니까.
“오만에 빠진 너희 과격파 드래곤들은…… 오늘 내 손에 모두 죽게 될 거니까.”
“오만한 건 과연 우리일까, 아니면 너일까. 인간이여, 네가 강하다는 건 인정하지만 개인의 강함은 언젠가 한계를 맞이할 뿐이다.”
“개인이라면 그렇겠지.”
“뭐?”
케르살라는 눈을 크게 떴다. 그의 거대한 눈동자는 현찬의 모습을 자세히 담았다.
“나는 혼자서 싸우지 않아.”
케르살라는 그제야 볼 수 있었다. 현찬의 등 뒤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휘, 그 안쪽에 흐릿하지만 하나둘씩 서 있는 영령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신화와 설화 속에서 용들을 쓰러뜨린 용살자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모든 힘을 현찬에게 빌려주고 있었다.
케르살라는 현찬이 지닌 강한 능력의 비결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깨닫고 말았다.
“아아. 용신이시여.”
케르살라의 비애 담긴 목소리는 더 이어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