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
171화 용 사냥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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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에서 용은 매우 신성한 영물 취급을 받았다. 그들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세계의 위험을 해결하는 일을 도왔다. 간혹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 혹은 타락한 용이 불의 화신으로 변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동양에서 묘사하는 용들의 성정은 선했다.
반면 서양에서의 드래곤은 파괴의 화신이었다. 예로부터 서양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는 드래곤은 사람들을 해쳤고 입에서 불을 내뿜으며 모든 것들을 불태웠다. 그 강력한 힘에 누구도 대항하지 못했다.
또한, 험한 환경에서 살며 성격은 기본적으로 포악하다. 그리고 용들 대부분이 불로 영생에 가까우며 강력하다. 이렇듯 동양과 다르게 서양에서의 용은 흉포한 존재로 묘사된다.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하고는 한다.
전통적으로 존재하는 ‘악역’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드래곤을 보아라.
설화나 신화 속에서 악역이 등장한다면 당연히 그 대척점에 선 선한 역할도 존재하는 법이다.
드래곤은 공포와 파괴의 화신이었지만, 그들의 최후는 항상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흉포한 짐승이자 마수인 드래곤에게도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천적은 있었다.
그들은 바로 영웅들이다.
신화와 설화 속에서 흉폭한 용을 죽인, ‘용살자(Dragon Slayer)’들.
<카드모스>.
그리스의 옛 도시 테베의 건국자이자, 용아병의 기원이 된 영웅이다.
아게노르의 아들이자 거대한 용인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를 죽인 용살자이다.
결국엔 그 또한 마지막의 마지막에 아내와 함께 뱀이 되어 엘리시온으로 떠났지만, 그가 지닌 영령으로서의 격은 용살자에 맞춰져 있다.
<지크프리트>.
용살자이자 다른 이름으로는 불사신으로 불리는 영웅.
중세 영웅 서사시인 ‘니벨룽겐의 노래’에서 나타난 영웅이자 명검 [발뭉]의 주인이기도 하다.
악룡 파프니르를 죽인 장본인이기도 했다.
용을 벨 때 용의 피를 뒤집어쓰며 불사신이 되었지만, 그때 보리수 나뭇잎 한 장이 등에 붙어서 유일하게 그 부분을 공격당하면 죽는다는 약점이 생겼다. 그리고 그 부분을 공략당해 허무하게 생을 마감한 영웅이기도 했다.
당연히 ‘용살자’라는 이명에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이름이기도 했다.
<베오울프>.
북유럽 게르만인의 한 파 앵글로색슨족의 영웅이다.
악력이 매우 강해서 손아귀 힘이 장정 수십 명의 손아귀 힘을 합친 것 이상의 효과를 냈으며, 무기를 휘두르기만 해도 무기조차 전부 부서졌을 정도로 엄청나게 강한 영웅이었다.
괴물 그렌델, 그렌델의 어미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룡을 죽인 영웅이기도 했다.
[흐룬팅], [거인의 칼], [네일링], [잉의 검]의 주인이기도 했으며 마지막 중의 마지막까지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한 최고의 ‘용살자’였다.
<성 조지(게오르기우스)>.
명검 [아스칼론]의 주인이자 전설적 성인 중 하나다.
한 나라를 위험에 빠뜨리던 용을 한 번에 없애버린 최강의 용살자이자, 모든 용살자들 중에서도 가장 원로 격이며 최초의 용살자라고 불리는 영웅이었다.
이 넷의 영웅이 지닌 영령으로서의 공통 능력은 당연히 단 하나다.
용을 죽이는 데 모든 능력이 최적화되어 있으며 모든 기술과 권능이 용을 죽이는 데 특화되는 것.
그들 중 단 한 명만 있어도 어지간한 용족들은 고개를 들지 못할 영웅이다.
그런 영웅이 무려 넷이나 하나로 뭉쳤다.
그러므로 지금 현찬이 지닌 힘은 용을 상대로 거의 절대적인 상성을 발휘한다.
상대가 아무리 신에 근접한 존재라고 하더라도, 그 상대가 용족이라면 현찬은 무조건 상성에서 우위를 점한다.
쉽게 말하면.
현찬은 용을 상대로 절대로 패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이럴 수는 없다!”
그란로기아는 상당히 오래 산 드래곤이다. 알루네라와 다르넥스도 오래 살았지만, 드래곤들의 사이에서는 아직 젊은 측에 속한다. 그란로기아는 그래도 그 이상을 살아왔고 여러 방면으로 넓은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도 알 수 있었다.
현찬에게 위축되고 있는 자신의 상태를.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현찬이 자신을 이기는 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현찬은 인간이고, 인간은 드래곤과 비교하면 약해 빠진 종족이다.
그러나 현찬이 부르는 영령들이 지닌 힘으로 인한 가능성. 용살자인 그들이 하나로 합쳤을 때 강해지는 집합성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인간과 드래곤이라는 종족의 차이가 지닌 거대한 벽을 넘을 거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쪽은 무려 드래곤이 세 마리였다.
절대 질 수가 없는 싸움이었다.
그런데 그란로기아의 본능적 감각은 이 자리에서 어서 도망치라고 말하고 있었다.
현찬의 시선이 자신의 몸을 훑고 지나가자 그란로기아는 비늘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동등한 상대로 보지 않는 싸늘한 눈빛. 그것은 포식자가 피식자를 향한 그것과 같았다. 그 치욕적이고 모욕적인 시선을 받았음에도 그란로기아에게 든 느낌은 분노가 아닌 두려움이었다.
“여기에 있는 드래곤은 세 마리가 전부인 것 같고.”
알루네라, 다르넥스에게 옮겨간 시선이 다시 그란로기아에게 모였다.
“산성과 얼음의 브레스를 뿜는 녀석들이 아니라면…… 도시를 파괴한 녀석은 너로구나?”
“크윽……?!”
현찬의 몸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같은 인간도 견딜 수 없는 것이었지만, 지금 용살자들과 계약을 맺은 영향 때문인지 용들에게는 그 이상으로 더 거대하게 다가왔다.
“이, 이럴 수가.”
“인간이 맞단 말인가?”
알루네라와 다르넥스도 몸을 잔뜩 움츠리며 뒤로 한두 발자국씩 물러났다.
세 마리의 드래곤이 한 인간에게 겁을 먹고 있다.
하나하나의 덩치만 해도 인간보다 수백 배는 거대한 드래곤이,
모든 면에서 인간들보다 훨씬 더 우월한 드래곤이.
고작 한 인간에게 공포라는 감정을 품고 있었다.
“인정할 수 없다!”
그란로기아가 입을 쩍 벌렸다.
그의 입에 모인 불꽃이 압축되고 농축되며 짙은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리는 흑염(黑炎)은 그대로 공간 전체를 검게 물들였다.
아직 성장이 다 끝나지 않은 드래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브레스였다.
알루네라와 다르넥스가 사용한 브레스보다 더 강력한 위력을 지닌 공격은 상대가 제아무리 오버랭크 헌터라도 막아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뭘 인정할 수 없다는 거야.”
새하얀 백색 날개가 활짝 펼쳐지며 현찬의 몸을 보호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현찬의 등 뒤로 눈 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거대한 십자가 형상으로 변하며 주변에 따스한 온기를 선사했다.
영령 <게오르기우스>의 능력인 대천사의 축복과 성스러운 흔적의 힘이었다.
현찬은 날개를 펄럭이며 그란로기아의 코앞에 접근했다. 그리고 그대로 녀석의 코끝을 두 손으로 쥐었다. 꽈아악! 무시무시한 악력이 그란로기아의 비늘을 깨부수며 살까지 쥐어짰다.
영령 <베오울프>가 지닌 무시무시한 악력이 원래 권능보다 훨씬 더 강화되어 발동되었다.
현찬은 그대로 그란로기아의 거대한 몸을 지면에다가 패대기쳤다.
콰아아아앙!
키만 수백 미터가 넘고 무게는 수백 톤이 넘는 드래곤이 바닥에 충돌하자 주변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란로기아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꼬리를 휘둘렀지만, 현찬이 휘두른 검에 의해 꼬리가 잘려나갔다.
“네가 인정할 수 없으면 어쩔 건데.”
그란로기아의 머리 위에 올라탄 현찬은 주먹을 쥐고 녀석의 정수리에 그대로 주먹을 내다 꽂았다. 꽈아앙! 운석이 떨어진 것 같은 거대한 충격에 그란로기아의 머리가 지면에 파고들었다.
“네가 화나면 어쩔 건데.”
꽈앙! 꽈앙! 꽈아앙! 현찬의 주먹질은 계속되었다. 그란로기아의 머리가 지면에 파묻히고, 머리에 자라난 왕관 같은 뿔은 부러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지면 밖으로 나와 있는 몸통만이 간헐적으로 주먹질에 맞춰 떨고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죽도록 처맞아야 정신을 차릴 거야?”
“사, 살려…….”
그란로기아는 살고 싶었다. 자신이 하찮게 여긴 인간에게 비는 한이 있더라도 죽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짐승으로서 그리고 생명체로서 태초부터 타고난 생존본능이었다.
현찬은 그란로기아의 처절한 애걸에 비웃음만 던졌다.
“인간보다 월등하고, 고등한 존재라고 하더니…… 너희도 결국에는 죽음 앞에서 약해지는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구나.”
그란로기아의 애걸은 현찬의 결심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어주었다.
역시 이 녀석들은 절대로 살아서는 안 되는 놈들이었다.
“스스로 잘났다고 지껄이는 네 녀석보다도, 죽음 앞에서 자신의 가족을 위해 몸을 던진 인간이 훨씬 더 위대해. 이 말을, 지옥에 가서도 잊지 말아라.”
“자, 잠깐만…….”
퍼억!
그란로기아의 뒷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현찬의 주먹은 그대로 그란로기아의 머리와 뇌를 산산조각내고 말았으니까. 그란로기아의 거대한 몸통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경직되고 말았다.
그 광경을 얼어붙은 채 지켜보던 남은 두 드래곤은 몸을 덜덜 떨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찬은 팔에 묻은 드래곤의 피를 털어냈다.
“어스름달. 이 녀석, 먹어치워.”
“정말 그래도 돼요?”
“어차피 이 녀석 빼고 다른 놈들 많아. 포상이다.”
“네!”
어스름달이 현찬의 몸에서 튀어나와 그대로 그란로기아의 몸을 천천히 잠식해 나갔다. 현찬의 방어 능력 대부분을 실행하는 어스름달이지만, 지금 용살자를 부른 현찬에게 어스름달의 도움은 필요 없었다.
“내가 말했지? 너희는 여기서 전부 죽는다고.”
“이, 이익! 웃기지 마라!”
남은 두 드래곤은 한낱 인간에게 겁을 먹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분한지 이를 갈며 현찬에게 달려들었다.
만약에 이 자리에서 그란로기아가 살아있었다면 그는 필사적으로 둘을 말렸을 것이다. 저 인간은 이길 수 없다고, 무조건 도망가라고. 여기에 있으면 그저 개죽음일 뿐이라고.
하지만 그란로기아는 이미 죽었고 남은 두 드래곤은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녀석들이었다.
그들의 최후는 결국 그들이 선택하고 말았다.
&
“미치겠군.”
알렉세이는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다.
“저렇게 강한 모습도 처음 보지만, 저렇게 화난 모습도 처음 봐.”
평소에 화를 잘 내지 않는 사람이 화를 낼 때 유독 더 무섭다고 했다. 특히나 같은 오버랭크 헌터라고 하더라도 잠재력에 따라 전투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는 현찬이라면 더더욱 심하리라. 그의 분노가 인간이 아닌 드래곤을 향한 게 천만다행이었다.
“현찬. 괜찮나?”
그란로기아에 이어 나머지 두 드래곤도 죽었다. 그들은 현찬에게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했다. 둘은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 압도적인 모습을 보았음에도 알렉세이는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요. 저 셋을 상대로 화도 좀 풀렸고요.”
“그렇군. 그보다 저 위에는…….”
아직도 하늘에 떠 있는 붉은색 용을 보며 알렉세이는 뒷말을 삼켰다.
현찬과 함께 온 것을 보면 저 드래곤은 딱히 나쁜 쪽은 아닌 것 같았다.
“저희와 화친을 맺고 싶어 하는 용족입니다. 저쪽도 두 파로 나뉘어서 서로 치열하게 견제 중이라고 하더라고요.”
“그중에서 나쁜 쪽이 몰래 이쪽으로 넘어와서 깽판을 친 건가?”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그래서. 이제 어쩔 건가?”
현찬은 뭘 당연한 걸 묻냐는 어투로 대답했다.
“저쪽 용들이 넘어온 게이트, 아직 남아있죠?”
“음? 뭐. 그렇겠지. 위치야 뭐, 저런 녀석들이 넘어왔을 정도면 무척 클 테고 찾기도 쉬울 거야. 그런데 그것 왜 묻나?”
“왜 묻기는요.”
현찬은 자신의 창을 휘두르며 창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저쪽이 이쪽에서 깽판을 쳤으니, 이쪽도 저쪽에서 깽판을 쳐야 수지 타산에 맞지 않겠습니까.”
알렉세이는 그렇게 말하는 현찬을 향해 진정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또한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내가 너를 걱정할 필요가 있기는 한가 싶군. 적당히 하고 와.”
“안 그래도 그럴 생각입니다.”
현찬은 그렇게 말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드래곤들의 세계, <엘 드라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