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무한계약-170화 (170/265)

# 170

170화 드래곤 (2)

_

“이런!”

알렉세이는 지면을 박차고 높이 뛰어올랐다. 그가 지닌 강력한 힘은 그의 거대한 덩치를 포탄처럼 쏘아 올렸다. 화아악! 조금 전까지 알렉세이가 있던 자리를 녹색의 거대한 기류가 휩쓸고 지나갔다.

녹색 기류는 그에 닿는 건 모조리 녹여버렸다. 아스팔트 도로도, 자동차도, 건물도 모두.

그 거대한 독 안개의 범위는 무려 반경 수백 미터에 달했다. 시민들의 대피가 늦었다면 저 한 공격에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죽었을 것이다.

‘무시무시한 위력이군!’

그마저도 진심을 모두 실은 공격이 아니었다. 알렉세이는 공중에 뜬 채로 눈앞의 괴물을 노려보았다. 비늘이 녹색으로 이루어져 있는 드래곤이다. 전설 속에서 듣던 드래곤과는 모습이 조금 달랐다.

머리에 자라난 뿔은 마치 사슴의 그것처럼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었으며 연록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신체도 뚱뚱하지 않고 매우 호리호리하고 4개의 다리는 길고 가늘었다.

마치 자연의 싱그러움을 담은 것 같은 외형이었지만, 그 안쪽에 잠재된 성향은 그야말로 난폭한 재앙 그 자체였다.

크아아아아!

그린 드래곤 ‘알루네라’가 입을 쩍 벌리며 포효를 내지르자 그 주변으로 마법진들이 떠올랐다. 알렉세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또 저 공격이다. 알렉세이는 머릿속으로 생각을 시작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지면에 착지하고 그대로 땅에 손을 박아 넣어 있는 힘껏 뒤집어엎었다. 녹아내린 땅이 해일처럼 일어났다. 일어난 땅의 높이만 무려 100m에 달했다. 하지만 알루네라의 덩치는 그보다 훨씬 더 컸다.

애초에 알렉세이도 알루네라를 노린 것이 아니었다. 해일처럼 뒤집힌 지면은 그대로 마법진에서 쏘아져 나온 각종 마법과 충돌하여 박살 났다. 하지만 그 덕에 주변으로 피해를 주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알렉세이는 파편들의 틈새로 몸을 숨기며 알루네라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주먹을 꽉 쥐며 알루네라의 몸통에 그대로 꽂았다. 꽈앙! 주변으로 충격파가 퍼지며, 알루네라의 주위를 맴도는 독기가 일순 바깥으로 확 밀려났다.

“건방진 녀석!”

알루네라는 드래곤의 단단한 비늘을 뚫고 들어오는 고통과 충격을 느끼고 분노를 토했다. 감히 열등한 한 명의 인간에게 자신이 이렇게 당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수치스러웠다.

혼자서 있었다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지금 이곳에 넘어온 드래곤이 알루네라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큭큭. 알루네라. 그 벌레를 데리고 그렇게 시간을 끌다니. 드래곤의 수치가 아닌가?”

“정 힘들다면 내가 도와줄까?”

“닥쳐라!”

두 드래곤이 알렉세이와 알루네라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푸른 비늘을 지닌 블루 드래곤은 ‘다르넥스’.

커다란 산양의 뿔이 달린 모양새에 마치 악어와 같은 체형, 거대한 입과 주둥이를 가진 이 드래곤은 청색 일족의 유망주였다.

다른 한 드래곤은 검은 비늘을 지닌 블랙 드래곤 ‘그란로기아’.

머리에 왕관처럼 자란 4개의 뿔과 온몸이 검은 비늘로 이루어진 이 드래곤은 그야말로 악마처럼 생겼다.

두 드래곤은 알루네라를 비웃고 있었다. 고작 그런 인간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냐는 반응이었다. 알루네라도 그 시선이 너무 싫어서 알렉세이를 쓰러뜨리려고 했지만, 알렉세이는 쉽게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알루네라가 더 밀리는 느낌이었다. 알루네라는 알렉세이에게 제대로 된 타격을 입히지 못했지만, 알렉세이는 꾸준히 알루네라에게 타격을 쌓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 열등한 벌레 녀석에게 내가 진다고?!’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에게 패배한다는 치욕감은 씻을 수 없다. 심지어 동족이 목격하고 있다면 더더욱. 이것은 두고두고 놀림감이 될 것이었다. 알루네라는 마음이 급해졌다.

정작 마음이 급한 건 알렉세이도 마찬가지였다.

‘젠장! 이렇게 때렸는데 쓰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잖아?’

이렇게 튼튼한 녀석은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난제와 싸울 때도 이렇게 힘을 담아서 두들겨 팼는데도 버티지 못했다. 그때보다 더 강해진 상태인데도 알렉세이의 공격은 드래곤을 쓰러뜨리지 못했다.

‘그리고 뒤에서 구경하는 저 두 괴물이 언제 다시 끼어들 줄 몰라.’

알렉세이도 저들이 평범한 괴물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놈들은 지성이 있다. 그것도 굉장히 고등한 지성이다. 생각할 줄 알고, 대화할 줄 알았다. 그 지성을 기반으로 놈들은 인간들을 농락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대로 시간을 끌었다가는 이쪽이 무조건 불리해진다.’

다른 지원을 바랄 처지가 아니었다. 오버랭크 헌터인 그이기에 막아낼 수 있는 거였지, 다른 헌터들은 놈들에게 제대로 된 타격조차 줄 수 없을 테니까.

마석을 이용한 무기를 만들고 있지만, 드래곤에게 먹힐만한 수준의 무기는 아직 발명되지 않았다.

저만한 녀석들에게는 핵조차 먹히지 않으리라.

‘이대로 끝나는 건가.’

알렉세이는 일단 후퇴하기로 생각했다. 다른 오버랭크 헌터들과 힘을 합쳐야만 녀석들을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중요한 건 놈들이 더 넘어올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저 세 마리만 해도 감당이 안 되는데 그 이상의 능력을 지닌 드래곤이 나타나면 어떻게 된단 말인가?

그렇게 된다면 지구는 끝이다.

‘일단 최대한 뒤로 물러나서…….’

“이놈! 어딜 감히 도망가려고 하는 것이냐!”

알렉세이가 빠지려는 낌새를 눈치챘는지 알루네라가 분노를 터뜨렸다. 자신을 무시한 것도 모자라서 이 상황을 모면하려는 인간의 모습이 알루네라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고 말았다.

“적당히 봐주려고 했는데 이젠 끝이다!”

알루네라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대량의 공기가 알루네라의 입으로 빨려 들어가자 호리호리했던 알루네라의 육체가 빵빵하게 부풀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최대 크기의 브레스. 그것을 알렉세이를 향해 쏘아낼 생각이었다.

평균적인 크기의 브레스만 해도 도시 하나를 날릴 정도의 위력을 지녔지만, 진심을 담은 것이라면 파괴력은 당연히 그 이상이다. 알렉세이는 식은땀을 흘렸다. 저건 피할 수 없다. 그렇다고 몸으로 직격으로 맞아 때울 수 있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친구! 도망쳐!”

‘늦었어!’

이렇게 된 이상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놈이 브레스를 뿜기 전에 쓰러뜨려야만 했다. 때마침 무방비한 상태가 되었으니 지금이 마지막 기회이리라.

그러나 알렉세이가 알루네라를 향해 달려드는 일은 없었다.

“저런, 그건 안 되지. 우리 동료의 체면을 좀 세워 줘야 하지 않겠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거대한 악어처럼 생긴 청색의 드래곤 ‘다르넥스’가 얼음 마법을 이용해 알렉세이의 앞길을 방해했다. 아주 미세한 방해였지만, 찰나의 공격을 다투는 상황에서 돌이킬 수 없는 공격이기도 했다.

‘큰일 났……!’

“죽어라!”

알루네라가 입을 벌려 브레스를 뿜기 바로 직전이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새하얀 빛줄기가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드래곤들도 알렉세이도 채 반응할 수 없는 속도로 떨어지며 그대로 알루네라의 몸통을 꿰뚫었다.

단단한 녹색의 비늘도 밀도 높은 근육도 마력의 방어막도 심지어 어지간한 금속 이상에 버금가는 뼈마저도.

일격에 꿰뚫렸다.

“크아아악!”

최대 브레스를 머금던 알루네라는 큰 타격을 입고 비명을 내질렀다. 문제는 다음에 벌어졌다. 제어하지 못한 산성 브레스는, 그대로 알루네라의 몸속에서 거칠게 요동치며 사방으로 퍼져나간 것이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악!”

“알루네라!”

알루네라의 머리 곳곳에서 녹색 가스가 뿜어져 나왔다. 알루네라의 비늘을 뚫고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고 상처를 통해서 막대한 증기가 뿜어져 나오며 주변을 뒤덮었다. 제어하지 못한 브레스는, 오히려 양날의 검이 되어 알루네라의 속을 진탕했다.

“제길. 누구냐!”

블랙 드래곤 그란로기아가 눈을 부라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겔라드리온!”

하늘을 뒤덮은 거대한 붉은 비늘의 드래곤.

적색의 일족 중 최강의 용이라 평가받는 겔라드리온, 그가 하늘에서 그들을 내려보고 있었다.

‘녀석 혼자인가? 아니, 그보다 조금 전의 일격은 녀석의 것이 아니었다!’

그란로기아가 눈에 힘을 주고 자세히 바라보자 겔라드리온의 등 뒤에 있는 누군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조금 전에 던졌던 자신의 창을 회수하고 있던 현찬이었다.

‘인간? 조금 전의 공격은 녀석이 한 것이었나?’

다른 기척은 없었다. 그렇다는 건 조금 전 알루네라를 쓰러뜨린 일격이 현찬의 것이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찮은 인간이 이 정도의 힘을? 아무리 알루네라가 그렇게 싸움에 강한 녀석은 아니라고는 하지만 우리와 같은 동족. 당연히 기본적인 능력은 매우 출중하다. 그런데 한 방에 쓰러졌다고?’

옆에서 상황을 파악한 다르넥스가 이빨을 드러내 보이며 분노를 표출했다.

“네놈. 누구냐.”

“나? 그것참 이상하네.”

현찬은 겔라드리온의 등 뒤에서 떨어져 내리며 [탈라리아]를 착용했다. 현찬의 몸은 적당한 높이에서 내려와 그대로 허공에 정지했다.

“멋대로 남의 세계에 쳐들어온 불청객에게 내가 정체를 밝혀야 할 필요가 있는 건가?”

“이 건방진 놈!”

“안 돼! 다르넥스!”

동료가 당했다는 분노 때문인지 다르넥스가 화를 참지 못하고 현찬을 향해 입을 쩍 벌렸다. 다르넥스의 입안에 막대한 냉기가 모였다. 그의 입 주변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으며 싸늘한 기운을 만들어냈다.

블루 드래곤이 사용하는 냉기의 숨결. 초저온의 숨결으로 상대방을 모조리 얼려서 깨뜨려버리는 극악의 브레스였다. 다르넥스는 이 브레스에 적중당하고 살 수 있는 인간은 모든 차원을 통틀어서 존재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물론 그것은 다르넥스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무언가 상황이 이상함을 깨달은 그란로기아가 말렸지만 이미 화살은 쏘아진 뒤였다.

새하얀 브레스가 주변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것은 닿는 것을 모조리 얼렸다. 지면도 얼어붙었고 공기도 모두 얼어버렸다. 무시무시한 얼음은 강한 기류를 타고 모든 것들을 찢어버렸다.

그리고 세상이 반으로 갈라졌다.

하늘도, 땅도, 모든 것이.

새하얀 브레스가 그 앞에 펼쳐진 세상을 순식간에 일직선으로 반으로 갈랐다.

다르넥스도 위험을 느끼고 몸을 뒤틀지 않았다면 그도 정수리부터 꼬리까지 몸이 반으로 쭉 갈라졌을 것이다.

물론 완전히 회피하지는 못했다. 몸을 급하게 뒤틀었지만, 거대한 일격은 다르넥스의 몸을 가로질러 그의 오른쪽 앞다리와 뒷다리가 잘려나가고 말았다.

거대한 다리가 지면에 떨어지자 붉은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크아아악! 어, 어떻게!”

“어떻게고 자시고.”

현찬은 싸늘한 표정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다르넥스를 내려다보았다.

“너희들은 오늘 이 자리에서 살아나갈 수 없을 것이다.”

“이, 이 무슨……! 겔라드리온! 네놈도 우리의 동족이라면, 우리를 지켜라! 우리와 함께 싸우란 말이다!”

“미안하지만 그란로기아. 나는 너희들을 동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 용족은 예로부터 조화를 추구해왔다. 그것을 깨뜨린 이상 너희들은 드래곤이 아니다. 그저 피와 살육에 물든 괴물일 뿐이지.”

“이 머저리 같은 놈! 우리처럼 강대한 존재가 왜 그런 귀찮은 일들을 맡아야 한단 말이냐! 좋다! 이 자리에서, 네놈을 포함해서 모든 인간을 멸절시키겠다!”

그란로기아가 마법을 발동시키자, 상처 입은 다르넥스와 거의 치명상을 겪은 알루네라의 상처가 빠르게 회복되었다. 막대한 마력을 쏟아부은 회복 마법이었다. 물론 모든 상처를 전부 치료하지는 못했지만, 전투에 참여할 정도는 될 것이다.

“현찬 님.”

“끼어들지 마세요. 겔라드리온. 녀석들은 제가 혼자서 처리합니다.”

현찬은 창을 쥐며 기운을 끌어모았다.

세 마리 드래곤. 두 마리는 크게 다쳤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드래곤이다.

무려 3대 1이라는 불리한 싸움에서도 현찬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용은, 예로부터 위대한 종족이었지.”

하지만 그들도 사냥당한 적은 많다.

[다중 계약]

<용살자 지그하르트>

<용살자 게오르기우스>

<용살자 카드모스>

신화 속에서 용들을 사냥했던 모든 영령의 힘이 한곳에 뭉쳤다.

[삼중 계약]

<드래곤 슬레이어>

현찬의 눈빛이 흉흉하게 빛났다.

“죽여주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