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
169화 드래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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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dragon)
예로부터 용은 강력하고 신묘한 존재로 숭상받았다.
서양에서는 파괴와 살육의 화신으로.
동양에서는 조화의 영물로.
성질은 다르지만, 용이란 근본부터 강력한 존재라는 인식이 강했다.
서양에서 묘사하는 용은 입에서 불을 뿜으며, 하늘을 날아다니며 단단한 비늘과 거대한 덩치로 공포심 위에 군림했다.
동양에서 묘사하는 용 또한 비와 바람을 뿌리며 신묘한 주술을 사용하고, 신의 대리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용이란 그런 존재다.
태생부터 강력하고, 인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종족.
그것은 이세계의 용이라고 할지라도 차이점은 없었다.
모든 능력을 선천적으로 타고난, 세계의 꼭대기에 선 존재들.
그것이 바로 드래곤이다.
“미치셨습니까?”
예의를 차리던 겔라드리온도 이 순간만큼은 그것을 지키지 못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그의 표정에도, 현찬은 그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이 세계에는 인간이 많습니다. 수십억이 넘죠. 저희 용들은 그 수가 인간들에 비하면 적은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혼자서 싸울 수 있을 정도로 적은 것도 아닙니다. 수백입니다. 아무리 약해도 혼자서 숲 하나를 날릴 수 있는 저희 종족이, 무려 수백입니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도 그들과 싸우러 혼자 간다는 말씀입니까?”
“조금 오해하신 듯한데, 완전히 혼자서 싸운다는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쪽의 평화와 균형을 추구하는 용족의 도움은 받겠죠.”
“그렇다 해도 무립니다. 파괴를 원하는 용은 저희의 숫자보다 2배 이상은 더 많고 개별로 지닌 무력은 더 강합니다.”
용들은 그들이 지닌 성향에 따라 고유로 지닌 힘의 방향성도 달라진다. 파괴에 물든 용들이 내뿜는 숨결은 더욱 강해지고 날카로우며, 무언가를 죽이고 파멸시키는데 특화된다. 반면 조화와 균형의 드래곤의 화염은 파괴를 원하는 용들의 브레스보다 약하다.
겔라드리온은 고개를 저었다.
“무립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예요.”
“그건 그쪽의 판단이죠. 저는 제가 생각해 봐도 딱히 꿀릴 것 같지는 않네요.”
“무엇을 믿고 그렇게 확신합니까? 당신은 혼자이지 않습니까.”
“아뇨. 저는 혼자가 아닙니다.”
현찬은 혼자가 아니다.
항상 그래왔다.
그에게는 뒤를 받쳐주는 훌륭한 동료들이 있으니까.
현찬의 당당한 태도에 겔라드리온은 할 말을 잊었다. 현찬의 확고한 눈빛을 보고 겔라드리온은 결국 고개를 푹 떨궜다. 그는 백기를 들었다.
“알겠습니다. 당신의 뜻이 그렇다면 존중해드리겠습니다. 단, 만약 당신의 신변에 무슨 위험한 일이 생긴다면 저는 가차 없이 지구의 다른 영웅에게 부탁하겠습니다. 도와달라고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뭐 만약 경우에 그렇게 된다면 상관없죠.”
“계약 성립이군요.”
겔라드리온은 양피지에 자신의 이름을 썼다. 그의 글씨체는 매우 정갈하고 아름다웠다. 과연 감수성이 풍부한 드래곤다웠다. 계약서에 서명이 끝나자 계약서는 황금가루로 흩어지더니 현찬과 겔라드리온에게 흡수되었다.
겔라드리온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이건……?”
“제 능력입니다. 대단하죠?”
“아, 아무리 강하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조화의 용족들을 한데 묶어버릴 정도의 힘이라니.”
어쩌면, 이 사람은 정말로 그가 호언장담한 대로…….
현찬을 향한 겔라드리온의 시선에 담긴 기색이 바뀌었다. 현찬은 정작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았다. 계약을 맺었으니, 한시라도 빠르게 <엘 드라코>로 넘어가서 적들과 싸울 일만 남았다.
“엘 드라코와 연결된 게이트는 어디에 있죠?”
“여기서 좀 상당히 멉니다. 저를 따라와 주십시오.”
“아. 잠시만요.”
휴대전화로 전화가 걸려왔다. 누구에게 전화가 왔는지 확인해보니 알렉세이였다. 그가 직접 연락을 취할 정도라면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이리라. 현찬은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알렉세이 씨? 무슨 일이세요? 직접 연락을 다 하시고.”
“현찬. 지금 어디지?”
“집인데요.”
“집이라. 그러면 TV를 틀어보겠나? 국제 뉴스 채널을 틀어봐.”
현찬은 리모컨으로 TV를 틀었다. 채널을 돌리자 화면 가득 폐허가 보였다. 처음에 그걸 봤을 때 할리우드 재난 영화를 보는 줄 알았다. 그러나 저것이 영화가 아닌, 뉴스라는 걸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여러분! 보이십니까? 이쪽은 난리가 났습니다!”
카메라를 통해 기자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카메라가 잡아주는 화면에는 거대한 도시였던 폐허밖에 보이지 않았다. 건물들은 무너져 내렸고, 곳곳에는 불길이 피어올랐다. 폐허 곳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매연과 뿌연 먼지가 주변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모든 것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기자가 한쪽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카메라가 기자의 손가락을 향했다. 도시의 저편, 뿌연 먼지구름이 황사처럼 일어나서 거대한 먼지의 벽이 형성되어 있었다. 카메라가 그 안쪽을 잡았다.
거대한 그림자였다.
먼지 안쪽에서 실시간으로 무슨 싸움이 나는 건지, 거대한 굉음과 함께 불빛이 번쩍거렸다. 그럴 때마다 먼지구름 안쪽에 있는 거대한 그림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15분 전, 저 괴물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등장과 동시에 도시를 궤멸시키고 헌터들을 휩쓸었습니다!”
상황을 설명하는 기자 주위로 지축을 울리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기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탈색되었다.
크와아아아아!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고함과 함께 카메라의 화면이 격하게 흔들렸다. 그러다 이내 신호가 잡히지 않는다는 글자가 화면에 떠올랐다. 채널은 황급히 데스크 화면을 비춰주었다.
“지금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예. 현 시각 15분 전.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거대한 게이트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엄청나게 거대한 몬스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몬스터들은 짧은 시간에 도시를 전부 파괴했다고 하는데요.”
“…… 15분 전에 벌어진 일이라고요?”
“지금도 실시간으로 일어나고 있다네. 몇 마리밖에 되지 않지만, 그 짧은 시간에 한 나라의 수도를 붕괴했어. 정확히 어떤 몬스터인지 파악이 되지 않았지만, 목격자의 증언을 따른다면 마치 용(Dragon)을 닮았다고 하더군. 나도 지금 바로 넘어가려고 한다네.”
“…… 바로 가도록 하죠.”
현찬은 바로 TV 전원을 껐다. 현찬과 함께 상황을 보던 겔라드리온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 반응만 봐도 저쪽이 빠르게 넘어온 걸 알겠네요.”
“저들이 어떻게…… 원래대로라면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을 텐데.”
“저기도 바보는 아니라는 뜻이겠죠. 하긴, 아무리 어둠에 물들었다고 하더라도 오래 살았으면 돌아가는 머리는 있겠죠. 제대로 한 방 먹었네요.”
“이, 이러면 안 됩니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저들을 막아야.”
“그러니 제가 지금 가려는 거죠.”
현찬이 한쪽 손을 뻗자, 가만히 있던 어스름달의 육체가 검은 액체로 변했다. 그리고 그것은 빠르게 현찬의 손을 타고 몸 전체를 뒤덮었다. 얼핏 보면 검은 타이즈처럼 보이는 그 모습에 겔라드리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테나. 슬슬 싸울 준비를 해야겠어.”
[그래야겠지.]
헤르메스와 아테나 또한 영체로 변했고 에크티 또한 황금 가루로 사라지며 [테레이오스테]로 흡수되었다. 순식간에 넷이나 되는 사람이 사라지자 겔라드리온은 낮도깨비를 마주친 사람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 집에는 평범한 사람은 안 삽니까?”
“뭐, 어쩌다 이렇게 됐네요. 일단 가 볼까요?”
“예. 제 등에 타시겠습니까? 제가 빠르게 날아간다면 이 세계에 있는 비행기라는 것보다 더 빠릅니다.”
“아뇨. 그럴 필요까지 없습니다.”
현찬은 정중하게 겔라드리온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쪽에는 워프 게이트가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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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상황인지라 현찬은 빠르게 워프 게이트를 사용했다.
목적지는 우루과이.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매우 가까운 국가였다. 현찬의 직위가 직위인지라 겔라드리온을 막는 사람들은 없었다. 애초에, 누가 와도 지금 너무 상황이 바쁘게 흘러가서 알아차릴 겨를이 없었다.
온갖 다양한 헌터들과 군인들이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기갑 병력이 줄을 지어 있었고 여기저기에서 무전기와 전화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주변의 공간은 농밀한 긴장감과 고함으로 가득 찼다.
“엄청나게 시끄럽네요.”
“녀석들의 목표가 바로 여기일 수 있으니까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우루과이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다. 도시 하나를 순식간에 쑥대밭으로 만든 녀석들이니, 당연히 긴장할 수밖에.
“갑시다.”
“그냥 가도 되는 건가요?”
“저 정도 된다면 그냥 가도 돼요.”
오버랭크 헌터들은 작전 지휘권이 생기며, 심지어 다른 누군가에게 허락을 받고 어디를 돌아다닐 필요도 없었다. 그들에게는 어디를 가더라도 제약 없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특권이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오버랭크 헌터의 동행자에게도 그 권한은 함께 부여된다. 이 자리에서 현찬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수송 헬기들이 헌터들을 태우고 날아가고 있었다. 현찬은 [탈라리아]를 신고 하늘로 떠올랐다. 겔라드리온 또한 마법을 이용해 날아올랐다. 현찬을 보고 그 정체를 알아차린 헌터들이 눈을 크게 떴다.
“강현찬 헌터다!”
“알렉세이에 이어서 그도 왔어!”
“그 옆에 붉은 머리의 남자는 누구지?”
‘알렉세이는 이미 먼저 떠난 것 같네.’
현찬은 <헤르메스의 눈>을 발동하려다 눈을 바늘로 찌르는 고통을 느끼며 사용을 취소했다. 지나치게 많이 사용하다 보니 아직도 능력이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어차피 싸우러 가는 상황에서 <헤르메스의 눈>을 사용할 필요는 없었다. 현찬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드래곤들이 있는 방향을 향해 날아갔다.
&
“여긴가.”
빠르게 도착한 장소는 TV에서 봤을 때 보다 훨씬 더 처참했다. 건물들은 다 무너져 내렸고 도로에 가득 찬 자동차들은 불길을 뿜으며 타오르고 있었다. 거대한 재앙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어떤 건물들 혹은 블록은 무너진 흔적이 없었다. 다만 검게 그을리고 녹아내린 흔적만 가득했을 뿐. 마치 거대한 무언가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검게 탄 흔적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건…… 처참하네.]
[끔찍하구나.]
수많은 전장을 넘어온 현찬조차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건, 바로 곳곳에 즐비한 사람들의 시체였다. 뉴스를 통해서 봤을 때는 화면이 흔들리고 상황이 워낙 긴박하다 보니 잘 보이지 않았지만, 가까이서 본 부에노스아이레스는 현세의 ‘지옥’이었다.
채 도망치지 못하고 검게 타서 그 뼈대만 남은 시체들이 도로에 즐비해 있었다. 그들은 마치 무언가에서 벗어나려고 달리는 자세 그대로 타서 죽어있었다.
코를 찌르는 시체가 타는 악취에 현찬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시체들의 사이에서 문득 눈에 띄는 시체가 있었다.
자그마한 무언가를 껴안고 있는 시체였다. 다른 시체는 모두 도망가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는데 유독 저 시체만 자세가 달랐다.
어린아이를 껴안고 있는 어머니의 시체였다.
현찬은 조금 눈시울이 붉어진 채 그 시체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부터 여전히 치열한 싸움이 계속되고 있는지, 굉음이 들리고 있었다.
아마 먼저 간 알렉세이 윌터가 싸우고 있으리라.
현찬은 무기를 뽑아 들었다.
그 흉흉한 기세에 겔라드리온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현찬을 따랐다.
현찬은 지금 제대로 화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