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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무한계약-168화 (168/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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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화 겔라드리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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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수가! 이게 대체 뭡니까?! 이 맛! 이 극상의 미! 이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천상의 맛입니다!”

치킨의 위력은 대단했다. 겔라드리온은 원래 다른 세계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뭐든 다 신기했고 흥미로웠다. 그런 그에게 치킨 맛은 새로운 수준을 넘어선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역시 좀 먹을 줄 아는 녀석이네!]

[음! 이 음식을 싫어하는 자는 절대 존재하지 않지.]

헤르메스와 아테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겔라드리온을 향한 시선이 더 호의적으로 바뀌었다. 실체화한 헤르메스와 아테나도 큰 테이블에 둘러앉아 같이 치킨을 먹고 있었다.

“저희 세상에서도 나름 산해진미는 다 먹어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상 저의 미각을 만족시키는 음식은 다른 세상에도 존재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겔라드리온은 매우 감동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 느끼고 있는 맛조차 잃고 싶지 않아서, 겔라드리온은 자신의 혀끝에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 언제 다시 이 천상의 음식을 먹게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다른 생각을 품는 건 사치였다.

“아아. 이 세계는 역시나, 멋진 것들로 가득 차 있군요.”

식사를 끝낸 겔라드리온은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식사를 했다는 반응이었다.

“수백 년 동안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처음 먹어봅니다. 제게 이 만찬을 즐길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지구의 영웅이여.”

“다 먹었으면, 이제 슬슬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해 볼까요?”

“예. 그랬죠.”

자신의 동족에 관한 일이 떠올라서일까, 겔라드리온의 얼굴에 순식간에 씁쓸한 기운이 맴돌았다. 그는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망설였다. 동족들이 지금까지 저지른 과오를 다시 곱씹는다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저희 세계의 상황은 제가 조금 전에 말씀 드린 대로입니다. 저희 동족은 두 개로 파벌이 갈라졌고 저와 반대 선상에 선 다른 파벌이 다른 세계들을 침략하고 있죠.”

“그렇게 해서 얻는 게 뭐죠?”

“솔직히 말하자면 별로 없습니다. 약자를 짓밟는다는 행동에서 오는 쾌락, 그들을 노예로 부리면서 수족처럼 쓰는 편안함. 그게 전부입니다.”

‘다만,’ 하고 겔라드리온이 말을 이었다.

“저희 종족은 인간들처럼 여러 종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비늘 색깔, 뿔 모양 등 전체적인 생김새가 다양하죠. 그러나 모두가 공통으로 지닌 성향이 있으니, 태생적으로 ‘백지’라는 겁니다.”

“백지라고 한다면…….”

“지식이 부족하다는 게 아닙니다. 지닌 성정이나 성향이 그렇다는 겁니다. 백지라는 것. 모두가 서로 존중하며 조화를 추구하는 저희는 강력한 하나의 사상에 감화되기 쉽습니다.”

드래곤은 조화나 균형을 바라는 종족이고, 천부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타고났다. 그만큼 그들은 그들을 묶는 하나의 사상에 영향을 받기 쉬웠다.

그러한 성향은 처음 접하는 지식을 거부감 없이 빠르게 습득하고, 그것을 발전시키며 서로 잘 지내는 데 도움이 되지만, 그만큼 양날의 검처럼 그들을 타락하기도 쉬웠다.

“한번 맛 들인 과격한 사상, 그 어두운 마음은 쉽게 벗어던질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드래곤들은 자신들만 존재하는 세계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다른 세계와 연결되고 그에 관해서 알게 되며 자연스럽게 생각이 바뀌는 이들이 생겨났다.

우리가 이렇게 강한데 왜 조화를 추구하며 상대방을 배려해야 하는 거지?

그냥 전부 힘으로 짓밟고 빼앗으면 되는 게 아닌가?

굳이 귀찮은 방법을 유지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동족끼리만 오랫동안 살아오며 잊고 지냈던 거대한 욕망. 그것이 추악한 민낯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통칭 ‘과격파’에 속한 드래곤들은 자신의 힘을 이용해 다른 세계를 침략하여 그들을 마음껏 약탈하고 짓밟았다. 그럴수록 그들은 더 큰 쾌락에 사로잡히고 더 지독한 어둠에 먹혀갔다.

헤어 나올 수 없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진 드래곤들은 다른 동족들을 끌어들였다.

그렇게 전염병처럼 퍼진 광기는 지금 이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

“놀라운 일이군요.”

현찬이 알던 드래곤이란 매우 강하고 오래 살며 강인한 정신력도 인간의 그것을 초월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엘 드라코>의 드래곤들은 현찬이 알던 개념과 달랐다. 그들은 신체적인 강한 능력과 강대한 마력을 타고났지만, 정신적인 측면에서는 매우 빈약했다.

‘정신력이 약해서 휘둘리기 쉬워, 무언가에 물드는 것이 쉬웠겠지.’

선과 악의 구분이 없었던 <엘 드라코>는 결국 두 개의 파벌로 갈라지고 말았다.

세상을 지배하려는 자들과 그런 그들을 막으려는 자들로.

“그렇다면 같은 종족끼리 분쟁을 벌이고 있다는 말씀인가요?”

“아직 크게 무력으로 충돌하는 일들은 없었습니다. 동족에게 이빨을 들이민다는 최악의 상황만큼은 일어나지 않도록 어떻게든 지켰으니까요. 하지만 그것도 머지않은 일이겠죠.”

지금은 온건파가 어떻게든 과격파를 진정시키고 있지만, 이미 악에 물든 그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예측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전체 드래곤 수 중에서 과격파에 소속된 드래곤의 비중이 훨씬 더 큰 게 문제였다.

“저희 쪽이 3. 반대쪽이 7이라고 보시면 될 겁니다. 어떻게든 진정시키며 막아보려고 노력은 하고 있지만, 이제 한계가 찾아왔습니다. 아마 얼마 가지 않아 그들은 어떻게든 지구를 침공하려고 들겠죠.”

그렇게 되면 끝이다.

지구의 무기로는 드래곤들에게 대적할 수 없다.

마석을 이용하여 만든 총은 위력적이다. 그러나 압도적으로 힘이 센 상대에게는 무용지물이다. 총알로 단단한 드래곤 비늘을 뚫을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다른 차원의 드래곤이라.’

겔라드리온만 봐도 그가 지닌 힘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지구에 그만 홀로 찾아온 걸 봐서는 온건파 중에서도 특출나게 강력한 드래곤인 건 맞지만, 상대편 드래곤 중에서 그보다 강한 드래곤이 과연 없을까?

‘골치 아프네.’

놈들이 지구로 넘어오는 순간 모든 건 끝이다. 그 어떠한 요새와 어떠한 방어도, 하늘을 날며 온갖 마법을 쓰고 입에서 강력한 브레스를 토하는 녀석들을 막지 못한다.

드래곤을 죽일 수 있는 건, 그와 준하는 강자뿐.

“겔라드리온 씨. 당신은 무엇을 바라시죠?”

“저는…… 그저 이 싸움이 벌어지지 않기를 원합니다.”

“평화라. 좋죠. 하지만 과격파는 그걸 전혀 바라지 않는 것 같은데요. 저희가 화친을 맺자고 제안해도 그쪽에서 받아줄 것 같나요?”

겔라드리온은 고개를 저었다.

누구보다도 그들의 성향을 잘 아는 그였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거기서 어떻게든 인간과 타협하려는 온건파 드래곤들을, 과격파가 어떻게 할 거로 생각하나요?”

“방해한다면…… 결국에는 큰일이 벌어지겠죠.”

순화해서 표현했지만, 요는 이거였다.

드래곤 종족은 이미 분열되었다. 한때 함께 지내던 동료는 이제 없고 서로 싸울 적만 남았다.

현찬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그의 눈동자는 겔라드리온의 속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겔라드리온 씨는, 이미 답을 내리고 있지 않나요? 제 눈에는 그렇게 보이네요.”

“그건…….”

“겔라드리온 씨가 저를 찾아온 이유는 경고나 그런 거창한 것 때문이 아니겠죠.”

현찬은 오른손을 들어 거기에 마력을 집중했다. 그러자 허공에 황금빛이 모이더니 이내 자그마한 양피지 종이 한 장이 떡하니 나타났다. 그 옆에는 깃털로 된 펜촉이 양피지 옆으로 떠다니고 있었다.

“바라는 건 바로, 저희와 힘을 합쳐서 과격파 드래곤들을 모두 쓸어버리려는 것 아닙니까?”

탁!

현찬은 양피지를 테이블에 소리 나게 놓았다.

겔라드리온의 눈동자는 잘게 떨렸다. 그의 시선은 양피지에 고정되어 떨어질 줄 몰랐다.

그는 꾹 다물어진 입술을 가까스로 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셨죠?”

“뭔가 이상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경고만 전하기 위해서, 당신만 한 용이 직접 저를 찾아온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됐거든요. 조금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거나 더 광범위하게 정보를 뿌리지도 않았습니다. 그게 의심되는 이유였죠.”

“무언가 바라는 게 있고 생각이 있으니까 저를 찾아오셨겠죠. 게다가 그냥 찾아온 것도 아니고, 환몽촌에 방문해서 도깨비들의 도움까지 받으셨죠. 이미 저에 관한 정보는 수집했다는 거고, 나름의 시간도 들였다는 게 됩니다. 한시가 급하시다면서, 그럴 시간이 어디에 있었죠? 정말 급했다면, 당장 저의 집에 찾아와서 문을 땅땅 두드리셨겠죠.”

“…….”

겔라드리온은 입을 꾹 다물었다.

현찬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을 계속 이었다.

“처음에는 무슨 목적인지 잘 몰라서 긴가민가했지만, 방금 이야기를 듣고 확신했습니다. 겔라드리온 씨. 당신이 무엇을 바라는지요.”

“…… 제가 바라는 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은 저, 그리고 저희 인간들과 손을 잡고 과격파 드래곤들을 없애려는 생각이시지 않습니까?”

“그건……!”

급작스레 겔라드리온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 순간 그의 양옆에서 대기하던 에크티와 어스름달이 반응했다.

어스름달의 몸이 검게 녹아내리며 날카로운 가시처럼 자라나 겔라드리온을 겨누었고, 에크티도 거대한 황금 할버드를 꺼내서 그를 겨누었다.

현찬은 괜찮다며 둘을 진정시켰다.

“그건…….”

“정확했죠?”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신 거죠?”

“왜냐하면, 그것이…… 당신들이 그토록 바라는 균형을 유지하는 일일 테니까요.”

“…….”

현찬의 말은 잔잔한 수면에 커다란 바위를 던진 것과 같이 파문을 이루었다.

겔라드리온은 크게 한 방 먹었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다 이내, 그는 고개를 푹 떨구듯이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역시, 영웅의 눈은 피하지 못하겠네요.”

과격파 드래곤들은 그들이 태생부터 타고난 운명인 ‘균형’을 무너뜨렸다. 균형을 지켜야 할 힘으로 오히려 혼돈을 초래하는 그들은 더 좌시할 수 없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겔라드리온은 그들을 막고자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계속 실패했다.

그 순간 겔라드리온은 보았다. 지구에서 가장 강하다는 인간의 무력을.

“당신이라면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희 온건파는 과격파보다 수가 부족하지만, 현찬 님이 도와주신다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했죠. 현찬 님 말고도, 오버랭크 헌터라 불린 자들이 나서준다면 전황을 뒤바꿀 수 있습니다.”

현찬에게 일부 사실을 숨기기는 했지만, 겔라드리온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는 진정으로 자신의 동족이 더 타락하여 다른 생명을 헤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설사 그것이 자신의 손에 동족의 피를 묻히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균형과 조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같은 드래곤을 죽인다라…….”

겔라드리온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알고 있습니다. 저의 행동이 얼마나 모순적인지. 평화를 바란다면서도 싸움을 벌이려고 하고 있어요. 이보다 더한 모순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에는 조화도, 균형도 없습니다.”

그렇다 해도.

그는 해야만 했다.

그것이 세계를 위한 일이었으니까.

“대단하시군요. 진심입니다. 어중간한 마음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죠. 제가 보기에 겔라드리온 씨는 오히려 가장 훌륭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결국 자신이 옳다고 여긴 가치를 선택했다. 현찬은 그것을 지적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스스로 신념을 위해 앞으로 걸어 나가는 그의 행동은 칭찬받아 마땅했다.

“좋습니다. 도와드리죠.”

“정말입니까?!”

“그럴 수밖에 없죠. 어차피 당신의 제안을 거절해도, 과격파 드래곤들과 저희는 싸울 운명이니까요. 그럴 바에는 서로 손을 잡고 함께 싸우는 것이 좋겠죠.”

‘단,’ 하고 현찬은 손을 뻗어 계약서를 툭툭 두드렸다.

“싸우러 가는 사람은 저 혼자면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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