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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무한계약-167화 (167/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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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화 겔라드리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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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찬은 바쁜 나날을 보냈다.

다른 세계에서 들이닥친 적들은 지구의 헌터들로 현찬의 도움 없이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다. 최근에 딱 한 번, 부산 쪽에 다른 차원의 존재들이 습격하는 사건이 벌어졌었다. 그들은 갑옷으로 무장한 인간이었다. 지구를 우습게 봤는지 소수 부대만 들이닥친 그들은 마석으로 만든 총으로 일격을 맞고 쓰러졌다.

놈들을 생포하려는 순간 녀석들은 전부 죽고 말아서 정보를 캐낼 수는 없었다. 그래도 오버랭크 헌터의 도움 없이 일구어낸 첫 승리였기 때문에 그 사건이 시사한 바는 컸다.

우리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처치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 희망이 생겼다. 오버랭크 헌터에게 지나치게 의존할 필요가 없어진 것만으로도 다른 헌터들로 하여금 용기가 생긴 것이다.

현찬은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적당한 수준의 적에게는 대응 가능하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그러나 그런 기쁨도 잠시, 현찬은 더 바쁜 일들에 휩쓸리고 말았다.

“으어어. 지친다.”

조금 전까지 한 유명 잡지사와의 인터뷰와 신문 기자와의 인터뷰를 동시에 끝낸 현찬은 소파에 몸을 던져 누웠다. 현찬이 해야 할 인터뷰는 엄청나게 많았다. 그리고 현찬은 어지간해서는 그런 인터뷰에 응대해주었다.

[그러게 귀찮은 일을 왜 해? 그냥 거절하지.]

“어쩔 수 없어. 이것도 일종의 광고이니까.”

오버랭크 헌터로서 현찬의 입지는 굳건했지만, 조금 더 대중을 향해 친근하게 다가가는 게 필요했다. 최근에 혼자서 싸우는 일들이 너무 자주 있었다. 조금은 다시 대중에게 긍정적 이미지를 어필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얻는 게 뭔데?]

“사람들의 안도감, 평화, 안정 등. <세계연합>에서도 원하는 일이고 내 지갑까지 두툼해져. 그걸 제외하고도 뭐 여러 가지 효과가 있겠지. 아무튼, 얻는 게 좀 많으니까 하는 거야.”

그렇다 해도 막상 인터뷰에 응대해 보니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육체적으로 피곤하기보다는 정신적으로 지친다. 그래도 현찬이 오버랭크 헌터라서 그런지, 인터뷰를 주관한 사람들은 최대한 조심스러운 태도로 그를 대해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인터뷰만 하는 게 아니잖아.]

헤르메스의 지적은 맞는 말이었다.

현찬은 인터뷰만 하지 않았다. 주기적으로 열리는 헌터 아카데미 수료식에서 연설도 했고, 각국 대통령이나 고위직 인사들과 만나기도 했다. 특히나 서남아시아, 중동 거부들의 후원금을 얻기 위해서 직접 그쪽으로 간 적도 있었다.

“뭐, 가서 좋은 대접 받았으니 다행이지.”

역시 석유 부자들이 지내는 호텔은 급이 다르게 화려했다. 대화도 좋게 끝났고 <세계연합>에 막대한 후원금을 준다는 조건을 얻어냈다. 현찬은 해야 할 역할 그 이상의 일들을 충분히 해냈다.

위의 일들 말고도 다른 자잘한 일들까지 포함하면 최근 현찬은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오버랭크 헌터라는 자리에는 그만한 책임이 따랐다.

지금 시대에서 오버랭크 헌터들은 그냥 ‘강한 헌터’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들은 인류의 빛이자 영웅들이었고 사람들에게 희망을 선사했다.

[그래도 굳이 네가 할 필요가 있어?]

“야. 양 리화 씨랑 안드레이 씨도 하는데, 내가 안 하겠다고 뺄 수도 없잖아.”

사람들을 피하고 부끄러움이 많은 양 리화도 용기 내서 열심히 다른 사람들과 만나는 중이다. 그런데 여기서 현찬이 귀찮다고 발을 뺀다? 이보다 눈치 보이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쳇. 아무튼, 나는 그런 자리에 가는 건 반대야. 차라리 게이트 내부 던전을 탐색하는 게 훨씬 더 재밌겠다!]

게이트 경계를 넘나드는 헤르메스는 언제나 자유롭다. 그로서 현찬이 오버랭크 헌터라는 자리에 묶여서 여기저기 불려 나가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현찬도 헤르메스의 마음을 이해했다.

계약을 통해 끈끈하게 연결된 현찬에게도 헤르메스의 감정이 고스란히 흘러들어왔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해야 하는 일들은 거의 다 끝내서, 이제 더 어디 돌아다닐 필요 없으니까.”

[그래도…….]

[현찬. 헤르메스는 그것만 싫은 것이 아니다.]

“음? 또 뭔데?”

아테나는 부모님께 동생의 잘못을 고자질하는 누나처럼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헤르메스는 지금 며칠 동안 치킨을 먹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풉!”

아테나의 말에 현찬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 근육녀가! 너도 먹고 싶어 했잖아! 나만 그런 것처럼 말하지 말라고!]

[헹! 나는 이미 충분히 치킨을 많이 먹었기 때문에 멀쩡하다! 너는 아니겠지?]

[그걸 지금 자랑이라고 말하는 거야?]

또다시 시작되는 유치한 남매 싸움에 현찬은 결국 참지 못하고 크게 웃었다. 그래. 이런 거였다. 이게 현찬이 바라던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기분에 현찬은 마음이 편해졌다.

“주인님. 저도 치킨 먹고 싶어요.”

“…….”

어스름달도 그렇게 말했고, 집안일을 하던 에크티도 이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이 간절했다. 설마 했던 에크티도 치킨의 매력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 오랜만에 먹자.”

그렇게 치킨을 주문하고 나서 잠시 쉬고 있는 와중 누군가 베란다 문을 두드렸다. 커튼이 쳐져 있었기 때문에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치킨이다!”

치킨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던 헤르메스가 고개를 번쩍 들며 빠르게 반응했다.

“무척 빨리 왔네!”

“요즘 치킨은 창문으로 배달 오나요?”

“알 게 뭐야!”

어스름달의 타당한 질문에도 불구하고, 이미 치킨에 눈이 먼 헤르메스는 커튼을 확 젖혔다. 그리고 헤르메스의 아름다운 얼굴 위 표정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현찬을 찾아온 건 치킨집 배달원이 아니라 낯선 남자와 낯익은 도깨비 둘이기 때문이다.

“넌 뭐야!”

“안녕하십니까. 저는 겔라드리온이라고 합니다. 여기가 강 현찬 님 댁 맞습니까?”

“네. 맞는데요.”

현찬은 도깨비들이 데려온 상대가 범상치 않은 존재라는 걸 깨닫고 앞으로 나섰다. 겔라드리온은 현찬을 보더니 반갑다는 미소를 지으며 집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다.

“잠시만요. 신발은 벗고 들어와 주세요.”

“이런. 실례했군요. 이 세계의 율법은 저도 아직 잘 모르는지라.”

자연스럽게 신발을 벗는 겔라드리온을 보며 현찬은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대강 알 수 있었다.

“다른 세계에서 오셨군요? 심지어 도깨비들을 대동하고 오다니. 환몽촌에 들렀다 오신 겁니까?”

“네. 맞습니다.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아니, 상황을 파악하는 것 자체가 뛰어나신 것인가요.”

현찬과 눈이 마주친 두 도깨비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현찬에게 예를 표했다. 현찬은 혹여나 누가 볼까 걱정했지만, 이매망량인 그들이 지닌 주술적인 힘을 믿었다. 주술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올 수 있었겠지.

“달걸과 경루 님은 잘 지내시나요?”

“예. 덕분에 저희 마을은 다시 평화를 되찾았습니다. 달걸 님은 촌장님의 직속 싸움꾼이 되어 그분을 잘 보필하고 계십니다.”

“그것참 다행이네요. 계속 거기 세워놓기도 뭣 한데 들어오세요.”

“아닙니다. 저희는 여기 있는 게 더 편합니다. 아랫것들이, 어찌 감히 은인과 같은 자리에 있겠습니까.”

도깨비들은 그렇게 말하더니 현찬의 제안을 더 듣기 싫다는 듯 빗자루로 변해버렸다. 본인들이 싫다는데 더 권유할 수도 없었다. 현찬은 베란다의 문을 닫으며 겔라드리온을 보았다. 그는 현찬의 집 내부가 신기한지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있었다.

“저를 무슨 목적으로 찾아오신 건가요?”

“아! 흠흠. 죄송합니다. 이거 제가 실례를 범했군요. 다른 세계의 문물에 관심이 많다 보니 저도 모르게 그만…….”

겔라드리온은 헛기침하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는 우아하고 절도있는 자세를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붉은 용의 일족, 겔라드리온이 지구의 영웅을 뵙습니다.”

“붉은 용?”

“예.”

겔라드리온은 이마를 덮었던 자신의 앞머리를 들어 올렸다. 덮여 있던 머리카락 너머로 이마 위에 아주 작지만 뾰족한 뿔이 나 있었다.

“저는 드래곤입니다.”

“허.”

다른 차원의 존재라는 것은 알았지만, 설마 드래곤일 줄은 몰랐다.

드래곤이 무엇인가.

신화, 역사 속에 나오는 신수이자 최강의 종족이다. 하늘을 날아다니고 입에서 불을 뿜는다. 높은 지성과 오랫동안 쌓아 온 경험으로 인한 노련함은 그들을 자연스럽게 최상위의 종족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 어떤 무기로도 뚫지 못하는 단단한 비늘은 물론이거니와 농축된 마력으로 행하는 각종 마법, 거대한 덩치와 질량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체력. 인간과는 궤를 달리하는 고등한 존재였다.

그런 그가, 현찬의 앞에 나타났다.

“저는 저희의 세계, <엘 드라코>에서 왔습니다. 그곳에는 저 말고도 다양한 용 족이 살아가는 곳이죠.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용들밖에 없는…… 그야말로 용들의 세계입니다.”

“…… 그쪽에서 저를 찾아온 이유가 대체 뭐죠.”

현찬은 범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겔라드리온은 숨기는 것 없이 전부 다 털어놓았다. 현찬을 포함하여 어스름달, 헤르메스, 아테나, 에크티 모두 귀를 쫑긋 세우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이 세계가 위험합니다.”

“갑자기 그렇게 말씀하시면 잘 이해가 안 되네요.”

“저희의 세계, <엘 드라코>는 용 족이 사는 세계입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저희 드래곤들은 좀…… 자존심이 많이 세죠. 다들 강한 만큼, 어쩔 수가 없습니다.”

예의 바른 드래곤이 그런 말을 하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엘 드라코>도 <대통합>을 겪었습니다. 그것에 대응하기 위해서 저희는 서로 뭉쳤죠. 원래 종족 간 반목이 별로 없었기에 쉬운 일이었습니다.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해서라도 신중해야 했고요. 하지만 문제가 발생했죠. 다른 차원의 존재들이 저희보다 상당히 약하다는 걸 알게 된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 모든 드래곤이 다 같은 성향, 같은 성격을 가졌을 리가 없다.

특히 태생부터 강인한 그들은 기본적으로 성격이 대부분 거만했다.

“호전적이고 싸움을 좋아하는 동족이 다른 차원들을 습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압도적인 무력을 앞세워서 이미 몇 개나 되는 차원을 정복했다고 한다. 겔라드리온은 그런 과격한 일족을 말리려고 했지만, 그들의 세력은 너무 컸고 자신의 입지가 작아서 막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들의 다음 목표가 이 세계입니다.”

“그걸 왜 제게 와서 말씀하시는 거죠?”

“왜냐하면, 당신이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겔라드리온의 두 눈동자는 파충류의 그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눈동자는 현찬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신의 힘을 지닌 인간. 당신이야말로, 오만과 아집에 사로잡힌 저의 동족들을 막아 줄 유일한 사람이자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 말고도 신의 힘을 지닌 인간은 많을 텐데요.”

“아뇨. 당신은 그들과 본질에서 다릅니다. 당신은 스스로 지닌 힘을 잘 모르는 것 같지만, 저는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죠?”

현찬이 그에 관해 물어보려는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헤르메스의 귀가 움찔거렸다. 진지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눈 녹듯 사라졌다. 헤르메스의 눈이 붉게 충혈되고, 아테나의 입에 침이 고였다.

현찬은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잠시.”

현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을 끝내고 치킨을 받아온 현찬은, 치킨이 가득 담긴 봉투를 들어 보이며 겔라드리온에게 물었다.

“일단 이거 드실래요?”

겔라드리온은 코를 찌르는 매혹적인 향기를 느끼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제안은 도저히 거절할 수 없다고.

“네.”

그는 힘차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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