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
165화 염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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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찬이 다시 지구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열린 축제에서 그란카는 그저 바보 같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현찬이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한다고 호언장담한 게 3일 전이다. 그 이후로 3일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현찬은 자신이 뱉은 말을 지켰다.
그란카의 염려와 다르게 현찬은 혼자서 <데우로파>와 <베라글드> 부족까지 찾아가서 그들에게 동맹 합의를 해낸 것이었다. 그란카에게도 듣는 귀가 있었고, 보는 눈이 있었다. 현찬이 각 악신의 계약자들과 한바탕 싸웠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렇다 쳐도 둘 다 이기고 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그란카의 시선이 <데우로파> 족장 클루파에게 향했다. 자신보다 덩치가 작고 매우 호리호리한 미남. 연한 붉은 피부에 황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녀석은 <데우로파> 역사상 당대 최강의 전사라고 불렸다.
녀석은 현찬과 싸움에서 패배했는지 한쪽 팔에 부목을 대고 있었고 몸 곳곳에 싸움의 흔적이 보였다. 저 정도로 다쳤음에도 축제까지 찾아올 정도로 움직일 수 있다는 건 그가 그만큼 뛰어난 회복력을 지녔다는 걸 의미하고 있었다.
‘그 성격 더러운 락다샤까지 왔어.’
<베라글드> 부족 족장 락다샤도 악신 <베라글드>와 계약 맺은 신급 영령의 계약자다. 여자임에도 남자 부럽지 않은 근육을 지녔고 덩치도 매우 커다란 그녀는, 매우 호전적인 성격으로 유명했다.
만나면 일단 싸운다. 그것이 그녀의 신조였다. 제대로 된 싸움이 아니라면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싸우는 싸움 광이었다.
다른 부족 족장들도 그녀만큼은 피했고 그녀 또한 친목을 도모하는 등의 쓸모없는 자리에는 잘 나서지 않았다.
그런 락다샤가 이 축제에 참여했다. 그녀에 관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이라면 이 이야기를 듣고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란카도 그랬고 축제를 주선한 <리쿠르드>의 아렌디르도 그랬다.
정작 본인은 현찬과의 싸움이 매우 만족스러웠는지 어딘가 후련하고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본인이 말하기로 거의 1년 치 싸움을 한 번에 했으며 변명의 여지가 없는 패배를 맞이했다고 한다. 그녀가 지닌 강력한 힘을 생각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현찬이 해냈다. 저 강한 두 족장을 상대로 단 3일 안에 승부를 보고 그들을 자신들의 동맹으로 끌어들였다.
‘이미 신들께서도 서로 합의가 끝났다고는 해도 대부분의 신들이 불편하게 여긴 두 부족의 족장을 상대로 이기다니…….’
그란카는 괴물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그 옆에서 아렌디르의 말을 들어주는 현찬을 바라보았다.
두 부족의 족장은 싸웠다는 흔적이 여실히 보일 정도로 몸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많이 회복됐음에도 여전히 다친 부분은 있었으니까.
하지만 현찬을 보라.
그는 첫날 이곳에 왔을 때 입었던 정갈한 정장 그대로였다. 옷 안에 상처를 숨기고 있나 했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저 둘과 싸우면서 상처를 입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 돼 먹은 무력이야? 이거, 진짜 괴물이잖아?’
그리고 이쪽 세계는 저런 현찬이 있는 지구에 싸움을 걸었었다. 지구에서 저 강력한 무력을 앞세워서 이쪽 세계를 지배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지구 측에서 서로 손 잡자고 동맹을 제의해준 부분에서 고마워해야 했다.
‘윽!’
그란카가 현찬을 향해 그런 평가를 하는 순간 현찬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시선을 느껴서 현찬이 본 건지 아니면 우연히 마주친 건지 모른다. 다만 막상 눈이 마주치니 그란카는 무언가 찔리는 게 있는 사람처럼 몸을 움츠렸다. 덩치 큰 그는 몸을 움츠려도 여전히 덩치가 커서 티가 나지 않았지만, 기세 자체는 확실히 죽었다.
자신이 저렇게 강한 자를 상대로 ‘무리나 하지 말라’고 말하며 그렇게 큰소리로 웃었으니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전사의 소양을 지닌 그란카로서는 자신이 3일 전에 했던 행동과 발언이 매우 부끄러운 것이었다.
“왜 가만히 앉아만 계세요? 혹시 술이 안 맞나요?”
“아, 아니. 그냥. 잠시 생각, 생각하고 있었지. 허허.”
그란카는 어색하게 웃었지만, 현찬은 그에게 부드러운 미소로 대응해주었다. 현찬의 배려에 경직된 몸이 풀렸다. 그란카는 감동 받았다. 저렇게 강한데 거만하지 않고 매우 사려 깊고 친절하다.
저만한 남자가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당장이라도 그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을 시집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다만.’
가늘게 좁혀진 그란카의 눈동자가, 현찬의 옆에 있는 아렌디르를 향했다.
‘쉽지 않겠단 말이지.’
아렌디르가 필사적으로 막겠지만 이쪽도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란카는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혼자서 김칫국을 마시고 있었다.
현찬은 편하게 앉아서 축제를 구경했다. 이쪽 세계는 기쁜 일이 있으면 이런 축제를 벌인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서서 축제에 참여하고 기쁘게 웃으며 음식을 먹는다.
마을 중앙에 피워 올린 커다란 불이 주변을 밝게 비추었고 나무들 위에 매달린 커다란 반딧불이가 숲을 아름답게 만들었다. 하늘에는 별이 가득했고 지상에도 별이 가득했다. 그 별들 사이에서 모두가 웃으며 춤을 췄다.
어디를 가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평화로운 광경에 현찬은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인간들에게 있어서 아주 먼 타지에 가까운 이세계지만, 현찬과 함께 온 <세계연합> 소속의 수행원들도 다른 종족들과 잘 어울리고 있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화합의 장면은 어딜 가도 쉽게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현찬은 주변이 시끌벅적해서 잠시 어디 좀 다녀온다며 자리를 떠났다. 인적이 드문 숲에서 현찬은 리쿠르드족 마을이 한눈에 보이는 자리에 섰다.
[인간이란 참 신기하구나.]
그런 현찬의 곁으로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찬은 놀라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마주 보았다.
그, 아니면 그녀일 수도 있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되지 않는 중성적인 외모였다. 허리까지 오는 연녹색 긴 머리카락은 밤의 어둠 속에서도 은은하게 빛났다. 몸에 걸치고 있는 새하얀 의복은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흔들렸다.
“이 기운. 당신이 <리쿠르드>시죠?”
[눈치가 참 빠르구나. 그래, 맞다. 내가 바로 저들이 섬기는 리쿠르드다.]
“설마 신께서 직접 영체로 저를 찾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저를 부르셨으면 찾아갔을 텐데요.”
현찬의 말투는 예의가 발랐지만, 실상은 다른 뜻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쪽의 신격을 생각하면, 계약자 없이 그렇게 영체로 움직이는 건 부담되지 않느냐.’
리쿠르드는 그 속뜻을 읽어냈다.
리쿠르드는 현찬의 소소한 도발을 가소롭다는 듯이 넘겼다.
[이곳의 나의 세계. 그리고 여기는 나의 영토다. 내 영토 내에서 내가 못 하는 것은 없다. 그러니 나를 향한 걱정은 접어두고 다른 세계에서 온 너의 계약 신 걱정부터 하는 게 어떠냐.]
“다행히 헤르메스는 경계를 넘어서는 신이기도 해서요. 이미 <대통합>이 끝난 뒤라면 다른 세계더라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습니다.”
[헤르메스인가. 그렇게 강한 무력을 지녔으면서, 정작 계약을 맺은 신은 전투와 관계없는 신이라니. 퍽 재미있는 인간이구나. 너를 보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참 신기하다고 느낀다.]
리쿠르드는 자신들을 믿고 따르는 부족들을 바라보았다.
그들뿐만 아니라 다른 신을 섬기는 부족들과 지구에서 넘어온 인간들을 한눈에 담았다.
모두 모여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인간들에 관해서는 나 또한 많이 들어보았다. 이기적이고, 탐욕이 가득하며, 같은 인간끼리 분쟁을 일삼는다고 했지.]
“구구절절 맞는 말씀이시네요.”
[막상 직접 본 인간들은 달랐다. 화합을 알고 배려를 알았지. 평화에 찌들어 약할 거로 생각했지만, 그들은 강했다.]
강하다고 말하면서 리쿠르드는 현찬을 보았다. 리쿠르드의 눈동자 안에는 현찬이라는 인간을 향한 경계심도 있으면서 동시에 그를 인정한다는 호의도 있었다.
[묻지. 너희 인간들이 바라는 건 대체 무엇이냐?]
“생존이죠.”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어 보이는데 말이다.]
“살기 위해서 노력한 결과물이죠. 살기 위해서 뭉쳤고 살기 위해서 강해졌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된 건가. 내가 보기엔 생존에 썩 부족하지 않아 보이는데 말이다.]
“그래도 부족합니다. 세상에는 저희가 모르는 자들이 있고, 저희보다 훨씬 더 강한 자들이 있습니다.”
당장에 현찬이 알고 있는 녀석 중에도 악마가 있었다.
5대 마왕을 희망하는 녀석들의 힘은 강했다. 지금의 인류가 지닌 무력은 아직 그들과 대적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그렇게까지 해서 강해지면, 그다음에 뭘 하려는 거지?]
“글쎄요. 살기 위해서 발버둥 친 인간이 스스로 안전을 확신하게 되는 순간이 오기는 할까요?”
[‘만약’이라는 것도 있지. 미래는 모르는 일이니까.]
“만약이라…….”
현찬도 리쿠르드와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서로 함께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을.
“그래도 역시 그렇게 된다면…… 다 함께 사이좋게 지내는 게 좋겠죠.”
인류의 역사는 언제나 투쟁의 역사였다.
인류는 계속해서 싸워왔다. 국가 및 인종을 나누고, 이념을 나누며 서로 다투었다. 그들이 하나가 되어도 다른 세계의 적들이 나타나 다툼은 끝나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의 끝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서로 화합하며 더욱 발전할지, 새로운 분열을 낳고 싸울지.
현찬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역시, 평화로운 게 최고잖아요?”
현찬의 말에 리쿠르드는 피식 웃었다.
[그것이, 너희 지구 인류의 대답이라고 하면 되겠느냐?]
“제가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것도 웃기네요. 그저 제 의견이었습니다. 아닌 사람들도 있겠죠.”
[그래도 그대는 평화를 원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거면 됐다.]
리쿠르드의 시선 끝에 무언가 보였다. 자신을 따르는 부족 족장 아렌디르였다. 마을 밖으로 나간 현찬이 돌아오지 않자 걱정돼서 찾으러 오는 것이었다. 현찬도 아렌디르를 발견했다.
“신님을 가장 충실하게 믿고 따르는 아이가 오네요.”
[그렇지.]
“아직 계약 안 하셨다면서요? 보니까 다들 자기 부족의 족장에게 권능을 내리시던데. 언제 주실 생각이세요?”
[아직 때가 이르다. 조금 더 기다리면, 어련히 스스로 기회를 찾아낼 것이야.]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 치고는 그쪽도 꽤 바라는 눈치인 것 같은데요.”
[모든 일에는 흐름이 있는 법이다. 그것을 앞당기고 그러는 짓은, 별로 내키지 않아.]
“그래서 다른 신들이 족장들과 계약을 맺을 때도 혼자서 가만히 계신 건가요?”
[나는 조화를 상징하니까. 그것이 나의 근간이다.]
“뭐, 본인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저는 더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그럼 이만 일어나보죠.”
[강현찬이라고 했지.]
현찬이 가려는 순간 뒤에서 리쿠르드의 말이 현찬을 붙잡았다.
[조심해라. 그대가 가고자 하는 길은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니까. 지구를 노리는 차원은 많아. 내 아이들이 한 짓을 생각하면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지만 신의 충고다. 새겨들어라.]
“물론이죠.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현찬도 알고 있다.
지구를 노리는 녀석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는 모른다. 지금 지구의 인류 수준에서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는 녀석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예상을 깨고 무슨 일을 벌이는 놈들은 반드시 나타나리라.
혹시 모를 미래를 위해서라도 항상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상대가 누구더라도 곱게 당해 줄 생각은 없습니다.”
[지구에는 너만 한 강자들이 더 있는가?]
“실시간으로 키우는 중입니다.”
현찬이 직접 선별한 신급 영령의 계약자들은 머지않은 미래에 큰 전력이 될 것이다.
‘그 애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슬슬 찾아가 봐야겠지.’
그런 생각을 품으면서 현찬은 아렌디르와 마주쳤다. 어딜 갔었냐는 그녀의 질문에 현찬은 바람을 쐬고 왔다며 둘러댔다. 아렌디르는 아직 리쿠르드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만나보게 되는 순간은 어쩌면 리쿠르드의 말대로 때가 됐을 때이리라.
현찬은 리쿠르드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리쿠르드는 그런 현찬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래. 나중에 다시 만나자꾸나.]
리쿠르드도 그 말을 남기며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