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
163화 바쁜 일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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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디르는 자신의 부족원들을 잘 설득한 이후 현찬을 따라서 시내로 향했다. 시내는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자동차들이 많이 다녔다. 아렌디르는 그녀가 살던 곳과는 전혀 다른 이국적인 풍경 때문인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몸도 딱딱한 돌처럼 잔뜩 경직되었다. 아렌디르는 겁에 질린 새끼 고양이처럼 눈동자를 바쁘게 굴렸다. 말 그대로 다른 세계에 뚝 떨어진 상태다. 그녀는 오직 앞서 걸어가고 있는 현찬만 믿고 의지할 수 있었다.
“여기서 능력은 쓰지 마.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니까.”
아렌디르가 몸을 어둠에 숨기려는 순간 현찬이 귀신같이 알아채고 제지했다.
안 그래도 자신들에게 시선이 모이는데 여기서 어둠에 몸을 숨기는 능력을 사용하면 사람들이 알아채고 소란이 생길 것이다.
“저, 저들의 시선이 나를 향하는데 어쩌란 말이냐!”
사람들의 시선은 현찬을 향한 뒤 자연스럽게 현찬의 등 뒤에 매미처럼 달라붙은 아렌디르를 향했다. 현찬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유명인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알아보았으며, 오히려 그들의 관심사는 아렌디르였다.
대체 저 여자는 누구기에 강현찬 헌터와 함께 길을 걷고 있는 걸까?
게다가 이국적이면서도 아름다운 그녀의 외모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었다.
강현찬 헌터와 함께 다니는 아름다운 여성. 사람들의 호기심을 격하게 자극하기 충분했다.
현찬도 그 사실을 알았다. 아렌디르가 몸을 숨기지 않도록 어떻게 설득할까 하다가 칭찬으로 넘기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그거야 그쪽이 예쁘니까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거야.”
“예쁘다니. 여전사에게 그 말이 기분이 좋게 들릴 거로 생각한 건가?”
아렌디르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노려보았다. 현찬은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게다가 저들이 쳐다본다고 해서 딱히 문제 될 건 없잖아? 이미 우리는 동맹으로 맺어진 관계인데, 여기서 모습을 숨길 필요도 없고 말이지.”
“그, 그건…….”
아렌디르가 우물쭈물했지만, 현찬의 말이 사실이었다. 리쿠르드족은 자신들이 인정하지 않은 자에게는 모습을 보이지 않지만, 동료로 인정하면 모습을 보인다. 현찬과 계약 맺은 시점에서 리쿠르드족은 인간과 동맹 관계가 되었다.
이것은 신의 권능과 세계의 법칙으로 묶인 절대 불변의 사실이 되었다. 그것을 깨기 위해서는 헤르메스와 동급의 신 그것도 계약을 주관하는 다른 차원의 신이 손해를 감수하고 나서야만 했다. 그리고 그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무엇보다 저쪽이 딱히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잖아. 멀리서 바라만 볼 뿐이야. 누구도 다가오지 않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현찬의 말대로 사람들은 구경만 할 뿐 누구도 다가오지 않았다. 정확히는 다가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한 것에 가깝다. 현찬이 몰래 신력을 뿜어내며 사람들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현찬에게서 알 수 없는 위압감을 느껴 본능적으로 접근을 꺼리게 되었다.
‘길 안내 해주는데 괜히 사람들과 엮이면 귀찮아지지.’
아렌디르를 향한 현찬의 자그마한 배려였다.
이제 동맹을 맺었고, 서로 친하게 지내야 하는 사이가 되었으니 여러 부분에서 편의를 봐주는 게 옳았으니까.
현찬의 설득이 먹힌 건지 아렌디르는 조금 전보다 긴장이 많이 누그러진 상태였다. 다만 여전히 걱정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녀는 현찬의 곁에 찰싹 붙은 채 현찬을 따라다녔다.
“저, 저 거대한 건 무엇이냐?”
거리를 걸으면 걸을수록 도로를 다니는 자동차들의 숫자가 많아지고 하늘을 향해 뻗어있는 건물들이 높아져 갔다. 그녀가 살면서 본 거대한 것은 자신들이 믿고 따르는 신, 리쿠르드와 다른 거목들뿐이었다. 이렇게 거대한 건물들은 난생처음 보았다.
아렌디르는 손가락을 들어 멀리 보이는 가장 높은 건물을 가리켰다.
“이 세계에도 저토록 거대한 것이 존재하는 것이냐? 저것의 이름은 무엇이지?”
“아 저거? 롯데타워라고 하는데.”
“롯데타워라는 신인가. 저 높이와 크기를 생각하면 매우 지고한 존재겠구나.”
“…… 아니. 저건 신이 아니라, 인공적인 건축물이야.”
현찬은 아렌디르가 다른 세계의 존재라는 걸 새삼 자각했다. 그녀로서는 저렇게 거대한 건축물은 사람이 사는 건물이 아닌 자신들이 숭배하는 거목과 비슷한 존재처럼 비친 것이다.
“뭣?! 믿을 수 없다!”
현찬의 예상대로 아렌디르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격하게 반응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순간 그녀의 감정에 영향을 받아 조금 곤두섰다.
“이 세계는 과학이 매우 발전한 곳이야. 땅은 좁은데 사람들은 많으니까 자연스럽게 건물이 높아졌지. 솔직히 우리로서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게 자란 너희 세계의 신목들이 더 신기해.”
“그, 그렇지. 여기는 다른 세계였지.”
아렌디르는 계속 걸으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 그보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이냐?”
“말했잖아. 밥 한 끼 대접하고, 네가 앞으로 계속 보게 될 세상을 구경시켜준다고. 안내해주겠다고 자처한 사람이 한 명 더 있어서, 약속 장소로 가는 중이야.”
“약속 장소?”
“어. 다 왔다.”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니는 자그마한 광장이었는데, 그곳의 분수대에서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다. 그 인파의 벽을 보며, 현찬은 자신이 알맞게 찾아 왔다는 걸 깨달았다.
“잠시 지나갈게요.”
현찬이 말을 하자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현찬을 알아보더니 모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 강현찬 헌터야.”
“정말? 진짜네. 와. 나 실물로 본 거 처음이야.”
“옆에 여자는 누구지?”
“네가 물어봐.”
“야. 내가 어떻게 물어봐. 우리나라 최고의 헌터가 나랑 말을 섞어 주겠냐?”
사람들은 저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현찬의 앞길을 열어주었다. 은연중에 내뿜는 신의 기운 때문인지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현찬에게 경외심을 품었다.
그를 쳐다볼 수는 있지만, 직접 말을 걸기엔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현찬이 다가오면 옆으로 길을 비켜주었다.
수백 명의 사람이 자연스럽게 좌우로 갈라지는 모습은 나름의 볼거리였다.
아렌디르는 그 광경을 보며 새삼 현찬이 얼마나 대단한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남자. 자연스럽게 기운을 내뿜으며 사람들을 휘어잡고 있다.’
그녀 또한 부족의 족장으로서 리쿠르드족의 존경을 받는 몸이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피땀 나는 노력을 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마저도 함께 동고동락하며 지냈기 때문에 그녀를 인정해 준 것이다.
반면 현찬은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자신에게 대항할 수 없는 경외감을 끌어내고 있었다.
이는 현찬이 지닌 힘이 본질에서 그녀보다 훨씬 더 높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세계에, 이 남자 같은 강자가 대체 몇이나 있는 거지?’
아렌디르의 머리가 팽팽 굴러갔다. 그 순간 그녀의 이마가 현찬의 등에 부딪혔다. 앞서가던 현찬이 멈춰 선 것이다.
“아. 다은아. 기다렸어?”
현찬이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은 오를레앙의 성녀 <잔 다르크>와 계약을 맺은 서다은이었다.
사람들이 이곳에 많이 모여 있는 이유도 서다은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A랭크의 힐러 계열 헌터, 실질적인 파티 기여도를 생각하면 S랭크 헌터에 맞먹는다는 성녀 서다은은 당연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충분한 유명인이었다.
아름답고 고고하며, 강하다.
이한율이나 황설영과는 다른 의미로 컬트적인 인기를 끄는 그녀는 대한민국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유명 인사였다.
“약속 시각보다 얼마나 더 일찍 나온 거야?”
“별로요. 그냥 시간이 남아서 일찍 나왔을 뿐이에요.”
다은은 새침하게 대답하면서, 곁눈질로 현찬의 곁에 붙어있는 아렌디르를 흘겨보았다.
“오빠. 그 옆에 있는 사람이 이야기한 그 사람이에요?”
“어. 인사해. 아렌디르야. 아렌디르, 여기는 서다은이라고 해.”
“만나서 반가워요. 아렌디르 씨.”
다은의 목소리는 어딘가 매우 쌀쌀맞았다. 현찬과 대화할 때와는 톤 자체가 상당히 차이 났다. 아렌디르는 자기도 모르게 서다은을 경계했다.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이유 모를 소소한 적의와 그녀도 범상치 않은 실력자라는 사실을 느낀 것이다.
“…… 아렌디르다.”
“인사도 나눴으니, 일단 움직이도록 할까요.”
애써 아닌 척했지만, 다은은 사람들의 시선이 이렇게 많이 모이는 장소에 오래 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사인해 달라고 해도 그녀는 일부러 사람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 쌀쌀맞게 굴기도 했다.
자애로운 성녀 <잔 다르크>와 다르게 서다은은 자신과 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확실하게 선을 긋는 성향이었다.
간혹 그녀의 차가운 시선이나 센 어투 때문에 무서워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은근히 저런 성격을 좋아해서 꼬이는 사람들도 있단 말이지.’
그런 다은의 여왕님 같은 성격이 좋다고 따라다니는 팬들도 있었다. 자기들 말로는 ‘우리 업계에서는 포상’이라고 한단다.
‘참 재밌는 사람들이야.’
현찬은 속으로 웃으면서 다은을 따라 함께 걸었다. 아렌디르도 황급히 현찬을 쫓아 그의 옆에 섰다. 이렇게 셋이서, 현찬을 중심으로 두고 양옆에 다은과 아렌디르가 선 형태로 걷게 되었다.
그 이후의 일들은 별거 없었다.
아렌디르의 옷을 맞춰준다고 다은이 아렌디르를 마치 마네킹처럼 이용하며 험하게 굴리고 그걸로 서로 투덕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참고로 아렌디르도 먹어본 음식 중 치킨이 가장 맛있다고 했다.
[뭘 좀 아는 친구네.]
[흠. 역시 강인한 여전사라 그런지, 입맛도 아주 훌륭하구나.]
이제는 위엄이라고는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는 신들의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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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누구입니까?”
환몽촌.
현찬에게 도움받았던 이매망량들의 마을에서 촌장 경루는 눈앞의 남자를 보며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갑자기 환몽촌의 결계를 뚫고 나타난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지 않고 당당하게 드러냈다.
“겔라드리온이라고 합니다.”
“…… 이계에서 오신 분입니까?”
“맞습니다.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이계의 존재.
<대통합>이 완전히 벌어진 건 그들 또한 알고 있었다. 다만 한반도의 이매망량은 현찬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 가만히 결계 속에서 숨어 지내는 중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듣는 귀와 보는 눈은 있었다.
경루는 눈앞의 남자가 범상치 않은 존재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채 숨기지 못해 흘러나오는 강렬한 기운은 도저히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 없었으니까.
‘아니. 저 인간의 모습은 그저 겉모습에 지나지 않아. 본질은 분명히 다르겠지.’
남자는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미남이었다. 옷은 중세 시대 귀족이나 입을 것처럼 화려하면서도 활동하기 편한 의복을 입고 있었다. 동양적인 분위기의 환몽촌과는 상당히 대비되는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무슨 이유로 저희 마을에 방문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사람을 한 분 만나 뵙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일이군요. 이곳은 이매망량들의 마을. 사람은 살지 않습니다. 혹시 착각하신 게 아니신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한 사람과 연이 닿고 있다는 사실을요.”
“…….”
겔라드리온의 말에 주변에서 가만히 앉아서 듣고 있던 다른 도깨비들이 눈썹을 꿈틀했다. 특히 마을에서 ‘장사’라고 불리는 달걸은 벌써 그에게 달려들 준비를 끝마친 뒤였다. 잠시 겔라드리온의 눈빛을 바라본 경루는 손을 들어 도깨비들을 진정시켰다.
상대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왔다.
숨길 수는 없겠지.
“저희 은인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지?”
“나쁜 의도로 접근하려는 건 아닙니다. 오해하게 했다면 사과를 드리고 싶군요.”
“나쁜 의도가 아니라는 건 다른 어떤 의도가 있다는 건지요?”
“예.”
겔라드리온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남자. 강현찬과 만남을 주선해 주시겠습니까?”
또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남자.
겔레드리온은 그렇게 환몽촌의 도깨비들과 처음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