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
162화 심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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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디르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원래부터 만나길 고대하던 상대였지만, 막상 마주하고 나니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상대는 본인의 일족을 벌레 잡듯 쓸어버린 강자다. 감히 자신이 함부로 대적할 수 없는 존재였다.
마음의 준비는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렌디르는 막상 현찬과 마주하자 거대한 무언가가 몸을 강하게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마력이나 신력 같은 기운 때문이 아닌, 현찬이 지닌 순수한 기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박이었다.
잔뜩 긴장한 아렌디르와 다르게 현찬은 여유가 넘쳤다.
“뭘 그렇게 잔뜩 긴장하고 그래? 편하게 있으라고.”
“누, 누가 긴장했다는 거냐.”
아렌디르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현찬을 쏘아붙였다. 현찬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녀의 기세에 밀려서 식은땀을 흘렸을 것이다. 하지만 현찬에게는 그런 아렌디르의 모습이 잔뜩 겁에 질린 새끼 고양이처럼 느껴졌다.
“어둠을 벗어던진 모습은 아름답게 생겼구나.”
“……!”
현찬의 말에 아렌디르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리쿠르드족은 어둠에 숨어 적에게 본인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 전사이다. 본인의 형상을 적에게 보이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이 진정으로 모습을 보일 때는 상대방의 능력을 자신의 종족과 대등하게 인정할 때뿐이다.
아렌디르는 자신의 모습을 보인 것에 수치심을 느꼈지만, 현찬은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처음 그녀와 싸웠을 때도 그녀의 모습은 얼핏 본 적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가까이서 천천히 시간을 들여 본 적이 없었을 뿐이었다. 다른 리쿠르드족과 다르게 아렌디르는 확실히 더 아름다웠다.
어딘지 윤기가 흐르는 회색빛 머리카락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적당하게 잡힌 근육과 탄력이 있는 갈색 피부는 그녀를 더욱 여전사처럼 보이게 만들어주었다.
현찬은 정보를 읽어내기 위해서 <헤르메스의 눈>을 발동했다.
지끈!
눈에 마력을 집중하는 순간 머리를 찌르는 고통에 현찬은 곧바로 마력을 회수했다. 움칼라를 쫓느라 지나치게 <헤르메스의 눈>을 사용한 여파인지 이 이상 권능을 멋대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원래대로 돌아오려면 며칠은 기다려야겠네.’
<헤르메스의 눈>으로 얻은 게 많은 입장으로서 꽤 아쉬운 일이었다. 현찬은 아픈 눈두덩을 가볍게 손가락으로 눌러주며 아렌디르를 바라보았다. 정보를 얻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서로 대화로 풀어나가면 그만이었다.
“너희들은 무슨 목적으로 우리 차원을 침공했지?”
“강한 자가 약한 자들의 세계를 침공하는 데 이유가 있는가?”
“하지만 너희는 패배했지. 이제 누가 강자고 누가 약자인지 제대로 알 거로 생각하는데?”
“…….”
아렌디르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정곡을 날카롭게 찔렀다. 현찬은 테이블 앞에 놓인 보고서를 가볍게 훑어보았다. 대충 심문을 통해 알아낸 기본적인 정보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대부분 현찬이 아는 것들이었다.
“너희들의 세계에 한번 가 봤다.”
“…….”
“신목들을 숭배하며 그들의 가호를 받고 있더군.”
“그, 그걸 어떻게!”
아렌디드는 현찬이 떠보려고 하는 말인 줄 알았지만, 신목 이야기가 나오자 아렌디르는 크게 동요했다. 정작 현찬으로서는 별거 아닌 일이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녀가 안다면 오히려 더 놀랐으리라.
“너희 말고 다른 부족이 살고 있다는 것도 알아. 리쿠르드족 말고도 라쉬칼족이나 다른 녀석들도 있었지. 뭐, 나무들 숫자만 놓고 본다면 부족만 최소 20개 이상이려나.”
현찬은 펼쳐놓았던 보고서를 잘 정리하여 가지런히 놔두었다. 그것을 ‘탁’ 소리 나게 책상에 놓은 현찬은 고개를 슬쩍 앞으로 뺐다.
“그런데 이상하단 말이지. 너희 세계에서 딱히 부족들끼리 반목하는 일들은 보이지 않았어.”
이미 <대통합> 때부터 합의했는지 각 신목끼리는 서로 어떤 규칙을 만들어 그것을 지키는 것 같았다. 서로 싸우지 않았고, 진짜 적들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너희들은 우리 세계를 침공했지.”
“그게 뭐 어쨌다는 것이냐.”
“이상하지 않아? 내가 본 다른 부족들은 딱히 다른 세계를 침략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어. 오히려 적들이 침략해 올 것을 대비해서 방어에 급급했지.”
특히나 악신 라쉬칼의 추종자들인 라쉬칼족의 행동을 보면 더욱 그러했다. 그들의 성향은 리쿠르드족 보다 더 악하고 과격했지만, 어딘가를 먼저 공격하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왜 너희 부족은 우리 세계를 먼저 공격했을까?”
“다른 부족과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다른 세계의 땅과 자원이 더 필요했으니까.”
“거짓말에 서툴구나. 진짜 목적은 그게 아니잖아?”
현찬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쏘아보았다.
악신회 소속 세트가 갑자기 그 게이트 장소에 나타난 것도 매우 공교로운 상황이었다. 만약에 다른 차원의 침략에 제삼자의 간섭이 있다면?
음모론이나 망상이라고 치부할 수 있었지만, 마냥 가능성이 없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너희가 우리 세계를 쳐들어오도록 뒤에서 일을 부추긴 자가 있는 거지?”
“…….”
대답은 없었다. 없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미 아렌디르는 어딘가 불안한 표정으로 현찬에게 답을 말해주었으니까.
현찬은 어깨를 으쓱였다.
“뭐, 내가 알아낸 사실은 대충 이게 전부야. 나는 내가 가진 패를 다 꺼냈고, 너는 졌어.”
“그래서 목적이 대체 뭐냐? 알아낼 건 다 알아냈으니 죽일 거냐?”
“죽이다니. 너무 우리를 야만인처럼 보지 말아주겠어? 우리가 왜 너희들을 살려서 밥도 먹여주고 재워줬다고 생각해?”
현찬은 아렌디르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다. 오래된 양피지로 된 종이였다. 거기에는 아렌디르도 알아볼 수 있는 그녀의 언어로 된 글들이 적혀있었다.
“너희들이 알고 있는 진실을 전부 털어놔. 너희들을 배후에서 조종한 게 누구인지, 그들과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 하나도 남김없이 싹 다.”
“…… 이건 뭐지?”
“계약서야. 들어봤지?”
아렌디르도 알고 있다. 리쿠르드족은 주로 전투 이외의 일은 하지 않았지만, 각 부족끼리 협정을 맺을 때 계약서를 작성하고는 했다. 그녀들의 부족 또한 이해관계가 없이 무의미한 싸움을 할 정도로 비이성적이지 않았다.
현찬은 턱짓으로 계약서를 가리켰다.
“여기에 서명해. 너희가 아는 정보를 모두 말하겠다는 조건이야. 거기에 응한다면, 우리는 너희들과 동맹을 맺고 너희 세계에 필요한 물건이나 자원을 지원해주지.”
이건 이미 <세계연합> 내부에서 결정된 사안이었다. 지구는 아직 자원이 풍부하지만, 뛰어난 전투 인원의 수가 매우 부족한 실정이었다. 그렇기에 가장 필요한 건 지금 당장이라도 적과 싸울 수 있는 헌터들이었다.
리쿠르드족은 그런 <세계연합>의 바람에 잘 들어맞는 부족이었다. 리쿠르드족 말고도 그녀의 차원에는 그와 비슷한 다른 부족들도 많이 있으리라. 그들을 아군으로 포섭한다면 충분히 괜찮은 조건이었다.
“우리를 받아주겠다고? 너희들이 우리에 관해서 뭘 안다는 거지?”
“우리는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걸 알고 있지. 그리고 마음만 먹는다면 더 많은 걸 알 수 있고 말이야.”
“…….”
아렌디르는 말없이 계약서를 쭉 훑어보았다. 그녀가 걱정하는 부당한 조건은 없었다.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양쪽 다 적극적으로 협력하자는 취지의 괜찮은 조건들이었다.
그러나 그렇기에 아렌디르는 더욱 불안해졌다.
“대체 이 계약서의 뭘 믿고 서약을 하라는 거지? 만약에 우리가 서약하더라도 그것을 꼭 지킨다는 보장이 어디 있는 거냐.”
아렌디르의 지적을 옳았다. 고작 계약서다. 상대방이 계약서에 서명했다고 그것을 그대로 따른다는 보장이 없었다. 만약 계약서에 서명해 놓고 조약을 전부 어기는 일도 벌일 수 있었다.
현찬은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그거야 모두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계약서일 경우에만 그런 거고.”
현찬이 가져온 이 계약서는 달랐다. 아렌디르도 현찬의 말에 무언가를 느꼈는지 계약서를 집중해서 바라보았다. 계약서에 실린 대부분의 능력이 봉인된 상태였지만, 그녀의 뛰어난 안목은 계약서에 실린 자그마한 힘을 읽어냈다.
“이건?”
“신의 힘이 담긴 계약서다.”
이것은 계약의 신 <헤르메스>의 권능이 고스란히 담긴 양피지.
이곳에 서명하는 순간 헤르메스가 지닌 ‘계약’이라는 권능이 발동된다.
“이 계약서에 서명하는 순간, 세계의 법칙이 적용되지. 거기에 빈틈은 존재하지 않아.”
혹여나 누군가 서명해 놓고 계약서의 조항을 어긴다면.
“신의 벌이 내릴 거야. 나무 신을 숭배하는 너희들이라면 신의 벌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는 잘 알고 있으리라 믿고 싶네.”
“…….”
“자. 어떻게 하겠어? 서명할 거야? 안 할 거야?”
아렌디르는 현찬의 말이 거짓말일 가능성을 고려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거짓말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양피지에 스며있는 신의 힘은 그녀가 현찬과 싸움에서 느꼈던 것과는 비슷하면서 다른 종류였다.
‘대체 이자의 정체는 뭐지?’
지구라는 차원은 전해 들은 것 이상으로 매우 강력했다. 방심한 이유도 있었지만, 현찬 같은 규격 외의 강자가 있다는 것부터 모든 상황은 뒤틀린 뒤였다.
아렌디르는 이 이상 마땅한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현찬은 그녀에게 많이 양보해 주고 있었다. 여기서 자존심을 부리고 이를 드러내는 건, 오히려 그녀를 따르는 일족들을 볼 면목을 없게 만든다.
꾹 다물어진 아렌디르의 입술이 열렸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모든 모욕감과 분노를 감내하듯 대답했다.
“서명…… 하겠다.”
“잘 생각했어.”
아렌디르가 양피지에 서명하는 순간, 양피지는 눈부신 황금빛을 내뿜더니 허공에 녹아들 듯 사라졌다. 그리고 그 황금의 빛은 그대로 아렌디르와 현찬의 몸에 스며들어 오른쪽 손등에 황금빛 글자를 남겼다.
“이제 서로 동맹이네.”
“이걸로 끝인 건가?”
“응. 끝이야. 원래 이런 과정은 번거로울수록 더 귀찮은 법이니까. 그냥 깔끔하게 서명하고 끝내면 되거든.”
“우리 부족들은…….”
“너희 부족들은 전부 다 풀려날 거야. 서약을 맺은 시점에서 너희 부족도 무언가 일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았겠지. 그쪽에서 반발이 일어난다면 그걸 잘 타일러야 하는 건 너의 몫이야. 우리는 아무 짓도 하지 않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어. 중요한 건 그거겠지.”
현찬은 손등에 새겨진 황금빛 문양을 왼손으로 쓰다듬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자 점차 흐려지며 사라졌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보이지 않을 뿐이지, 그 안쪽에 담긴 힘은 여전히 남아있었으니까.
“너희들을 뒤에서 종용한 녀석들은 누구지?”
“…… 내가 알고 있는 건 일단 한 녀석이다.”
아렌디르는 갑자기 등장한 녀석과의 첫 만남부터 차근차근 이야기해 나갔다.
“녀석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 나조차도 제대로 기척을 잡지 못하는 녀석. 얼굴에 이상한 가면을 쓴 녀석이 말이지.”
“얼굴에 이상한 가면을 썼다고? 무슨 가면이었기에?”
“자세한 이름은 나도 모른다. 다만, 두 눈에 검은 구멍이 뻥 뚫린…….”
아렌디르는 가면의 모양을 대략적인 손짓으로 표현했다.
“새 모양 가면이었다.”
과연.
현찬은 그 대답을 듣자마자 속으로 생각했다.
<대통합>을 앞당긴 에르카닐이 대체 어디론가 도망갔나 했더니 악신회와 연이 닿아 있었던 것이다.
‘그 악신회의 회주라는 녀석이 누구인지 궁금할 따름이네.’
어찌 됐든 소득은 있었다.
현찬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렌디르의 수갑을 벗겨주었다.
“이왕 서로 좋은 동맹 관계가 되었으니 이쪽 세계에 관해서 조금 안내해주도록 하지.”
“어, 어디로 갈 생각인가?”
“일단 뭐라도 먹어야 하지 않겠어?”
현찬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
“혹시 치킨, 좋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