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
161화 심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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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남해 부근 기후에 이상 현상이 관측되었다.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하고 국지적 큰비가 쏟아졌고 그 주변 바다가 태풍을 만난 듯 거칠게 요동쳤다.
일기 예보에서는 날씨가 건조하고 하늘이 구름 없이 맑을 것이라고 했는데 실제 날씨는 어딘가 이상했다. 무엇보다 해당 장소는 강현찬 헌터가 마지막 남은 다른 차원의 생명체를 상대하러 간 곳이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황급히 지원 병력을 편성하여 보냈다. 그곳에는 한창 차기 오버랭크 헌터들을 가르치던 이한율 헌터도 포함되어 있었다.
“흐아암. 항상 제단에 갇혀 지내다가 밖으로 나온 건 좋은데, 나오자마자 이런 임무를 맡다니. 대체 뭐냐고.”
이한율은 헬기 의자에 앉아 투덜거렸다. 갑자기 기후에 이상이 생겼다는 이야기만 듣고 나오기는 했지만,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아니, 이상 기후쯤이야 흔히 발생하는 일 아닌가? 거기를 꼭 내가 확인하러 가야 하나?’
속으로 그렇게 불평을 토했기는 했지만, 그래도 맡은 임무이기에 착실히 확인할 생각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정말 무슨 일이 벌어졌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미 <대통합>이 끝나고 언제 다른 차원에서 습격할 줄 모르는 판국에 사소한 징후 하나라도 놓칠 수는 없었다.
‘뭐, 그래도 현찬이 있던 곳이라고 하는데…… 별문제는 없겠지.’
이한율은 현찬이 어떠한 존재와 싸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대상인 움칼라족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모르지만, 어차피 현찬이 이겼을 거로 생각했다. 사실상 지금 그녀가 가는 이유는 일종의 현장 정리에 가까웠으니까.
때마침 헬기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한율은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헬기에서 내렸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이게 대체 뭐야.”
헬기에서 받은 보고서에 의하면 그녀가 도착한 이 장소는 해식절벽이 아름답게 펼쳐진 바다라고 들었다. 근처에 숲이 있고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서 경치를 구경하기 좋은 자리라고 한다.
하지만 막상 도착해보니 눈앞에는 망망대해만 보였다. 아니, 완전히 바다만 보이는 건 아니었다. 다도해라고 불리는 남해답게 나름 자그마한 섬들은 곳곳에 즐비해 있었으니까.
다만, 원래 있어야 할 땅덩어리가 송두리째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저기요.”
“네.”
이한율은 지나다니던 정보 요원 하나를 붙잡고 물었다.
“여기 원래이랬어요?”
“무슨 말씀이신지…….”
“여기 이 장소, 보고서에 쓰여 있는 정보와는 매우 다른데요? 대충 눈으로만 보아도 땅덩어리가 대부분 소실되었어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그, 그게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상황을 전해 듣고 현장으로 나오자마자 이런 광경을 본 것이라 서요.”
그래도 지금은 처음보다 상황이 정리되어 나아진 것이었다. 처음 이 장소에 도착했을 때, 바다 안쪽에는 해양 몬스터 시체로 한가득했다. 몬스터들의 시체가 너무 많아서 지금도 대량의 거중기가 다 정리되지 않은 몬스터들의 시체를 건져내는 중이다.
“듣기로는 강현찬 헌터님께서 이곳에서 한바탕 싸움을 벌였다고 합니다.”
“그건 저도 알아요. 보아하니 제법 큰 싸움이 있었나 보네요. 괜히 붙잡아서 시간을 허비해서 죄송했어요.”
“아닙니다. 혹시나 궁금한 게 있다면 언제든 물어봐 주시면 됩니다.”
요원이 떠나가고 이한율은 눈앞의 참상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커다란 땅덩어리 일부가 마치 숟가락으로 퍼내기라도 한 듯 동그랗게 패어 거대한 구덩이를 만들었고, 그 안쪽으로 바다가 들어와 거대한 석호가 형성되었다.
석호의 안쪽에는 바닷물과 함께 쓸려온 몬스터들의 시체로 가득했다.
놀라운 점은 몬스터들의 시체로 들끓는 바다가 붉은 피로 더럽혀지지 않고 여전히 푸른빛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의아했지만, 이한율은 무엇 때문인지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이 힘. 신력이 맞죠? 할아버지?’
[그래. 그때 느꼈던 신력과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다른 것이로구나.]
그녀와 계약을 맺은 영령 <강감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힘을 예전에도 한 번 느낀 적 있었다.
<대통합>이 완전히 끝나기 전 <심연>과 문이 연결되었던 때의 일이었다.
검은 구덩이에서 튀어나온 온갖 괴물들은 세상을 없앨 듯 지면을 가득 메웠었다. 그 순간 현찬이 빛을 두르며 모든 일을 해결했다.
하늘을 가득 메우는 회오리와 번개들의 향연 그리고 이어지는 새하얀 섬광.
그 무시무시한 공격의 여파로 인해 <심연>과 연결된 문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그 자리에는 아직도 거대한 크레이터가 남아있었다.
이한율은 그때 멀리서나마 확실하게 신의 힘을 느꼈다.
피부가 저릿해지는 전율이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그 미세하지만 비슷한 힘의 일면이 저 푸른 바다에 잠들어 있었다.
‘헤르메스의 계약자라고 했으니, 삼촌인 포세이돈의 힘이라도 받은 건가?’
이한율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내 생각하기 귀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찌 됐든 그녀가 파악하건대 살아있는 몬스터들은 없었다. 주변에 다른 적들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진짜, 인간의 힘이 아니라니까.”
그날 대한민국 남부 해안 지대 국토가 5헥타르나 망가지는 일이 벌어졌다. 이는 축구장 넓이의 7배나 되는 면적이었다.
지도를 바꿔야 할 정도로 무지막지한 위력을 뽐낸 장본인인 현찬은 현재.
[앞으로는 절대! 절대로 포세이돈을 부르지 마라!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지혜의 여신 아테나에게 잔소리를 듣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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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나가 이렇게 화를 내는 건 처음이었지만, 그 화를 풀어주는 방법은 매우 쉬웠다.
오랜만에 고생했다는 말과 함께 치킨을 대량 주문하여 먹여주면 그만이니까. 어차피 현존하는 육체가 아닌 마력으로 만들어낸 육체라서 섭취할 수 있는 음식량에 한계도 없었다. 아테나는 오랜만에 폭식했다.
온갖 종류의 치킨에 맥주까지 시켰더니 그녀는 대체 언제 화를 냈냐는 듯 행복하게 치킨을 뜯었다. 시킨 음식이 많았기 때문에 현찬은 헤르메스와 에크티, 어스름달까지 전부 불러서 다 함께 식사했다.
법적으로는 혼자 사는 현찬임에도 딸린 식구가 무려 넷이나 되었다. 하나같이 다 개성이 넘치는 이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지루할 틈도 없었다.
때마침 TV 뉴스에서 현찬이 마지막 남은 움칼라와 싸웠던 장소를 비추고 있었다. 원래 땅이어야 할 그곳에는 그야말로 거대한 구덩이가 파여 바닷물이 밀려 들어와 있었다. 몬스터들의 시체는 다 건졌는지 바닷물은 맑았다.
“어. 오늘 싸웠던 곳이다.”
[계약자여. 정말 성대하게도 저질러 줬구나.]
아테나의 질책에 현찬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설마 그 정도의 위력을 지니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냐고.”
[트라이던트]로 조금 강하게 움칼라의 미간을 찌른 건 인정한다. 그렇다 쳐도 전력을 발휘한 건 아니었다. 힘 조절을 했다고 생각했는데도 그만한 위력이다. 괜히 제우스의 무기에 버금간다는 소리를 들은 것이 아니었다.
현찬도 자신이 벌인 사태의 크기를 짐작하고 있었다. 국토를 무지막지하게 날려 먹었으니, 자연스럽게 찔릴 수밖에 없었다. 전 세계를 위험하게 만들 녀석을 처리하기 위해서 과도하게 힘을 썼다고 했지만, 굳이 그렇게 국토를 날릴 필요까지는 없었다.
현찬이 평소보다 힘을 과하게 쓴 건 움칼라가 그를 화나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쳐도 [트라이던트]의 위력이 상상 이상으로 강했던 것도 국토손실에 한몫했다.
“뭐. 좋게 생각하자고. 어쨌든 위험한 녀석들을 전부 처리했잖아? 그 녀석들이 살아서 도망친 것에 비하면 국토손실 정도야 소소한 대가지.”
[필사적으로 정신 승리하는 모습이 애처롭네, 현찬아.]
“시끄러워. 너 치킨 안 준다?”
[아니, 비겁하게 치킨 가지고 그러기야?!]
아테나는 둘의 대화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치킨을 매우 전투적으로 먹어댔다. 어스름달도 여전히 자그마한 어린아이의 형태로 치킨을 뜯었고 에크티도 치킨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식사가 끝나고 아테나는 만족한 얼굴로 자신의 배를 두드렸다.
[그렇게 먹으면 살쪄. 아니, 이미 쪘나?]
[뭐라?!]
헤르메스의 한마디에 다시 분기탱천한 아테나와 추격전을 벌인 건 소소한 일이었다.
결국, 헤르메스를 붙잡지 못한 아테나는 씩씩거리다가 자신을 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현찬을 향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아, 안 쪘다!]
“누가 뭐래.”
어차피 현존하는 육체가 아니라서 살이 찌지 않는 건 현찬도 안다. 다만 아테나는 무의식적으로 살이 찔까 봐 불안한 인식을 지닌 듯했다.
소파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현찬의 휴대전화 번호를 아는 사람은 매우 극소수기 때문에 걸려오는 전화는 무시할 수 없었다.
“황설영입니다.”
“네. 말씀하세요.”
“지난번에 현찬 님이 포로로 삼은 종족의 수장이 현찬 님을 만나고 싶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랬다. 아렌디르는 다른 차원의 존재라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 가까스로 마법을 사용해서 언어 장벽을 허무는 건 좋았지만, 그녀가 계속 현찬을 만나고 싶다고 고집을 피운다고 한다.
심문하는 사람들도 그녀의 강력한 기세에 눌려서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한 채 현찬에게 알릴까 말까 고민하다가 어쩔 수 없이 전화한 것이었다.
“어차피 이제 일이 없어서 여유가 생긴 참이었는데 직접 만나보도록 하죠.”
아렌디르는 언젠가 만날 생각이기는 했다. 그 일정이 조금 당겨졌을 뿐. 게다가 아렌디르와 리쿠르드족이 수용된 시설은 차기 오버랭크 헌터들을 육성하는 시설과 매우 가까웠다. 사실상 바로 옆이라고 해도 좋았다. 대한민국에서 보안이 가장 훌륭한 곳이라 당연한 결과였다.
현찬으로서는 동생이나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히 훈련받는지 확인도 하고 싶었던 참이라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선배로서 후배들을 놀라게 할 생각으로 현찬은 조용히 집을 나서서 <영웅의 근원>으로 향했다.
“오빠!”
동생인 현지와 다른 교육생들은 놀랍게도 현찬이 찾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 현찬이 어떻게 알았냐고 묻자 동생 현지는 배시시 웃으며, 그녀의 등 뒤에 숨어 있는 한성주를 가리켰다.
“성주가 알려줬어. 오늘 귀인이 오는 날이라고 하더라고. 애 되게 쩐다? 막 별자리 보고 운명을 점칠 수 있대. 나도 그래서 운세 좀 봤어.”
일곱 별의 힘을 사용하는 칠성신의 계약자답게 한성주는 별과 관련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같은 신급 영령의 계약자인 현찬이 찾아온다는 사실까지 점칠 수 있을 정도이니 그녀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보다 그건 뭐냐?”
현찬은 여동생의 품 안에 안긴 자그마한 생명체를 보며 물었다.
“히히. 귀엽지?”
현지가 품 안에 안고 있는 것은 새끼 멧돼지였다.
<칼리돈의 괴물 멧돼지>
신화 속에서 아르테미스가 칼리돈에게 분노하여 내린 재앙이었다. 그녀의 권능을 타고난 현지는 자연스럽게 이 멧돼지를 소환해서 부릴 수 있었다. 다만 아직은 능력이 미숙하여 멧돼지가 아주 작았다.
이렇게 귀여운 아기 돼지가 나중에 커서 탱크처럼 주변을 다 쓸어버리는 거대 멧돼지가 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무튼, 다들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리네넷도 진 차이도, 샤도 전부 건강해 보였다. 고된 훈련 때문에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다들 표정이 밝은 걸 보니 큰 문제는 없는 듯싶었다.
현찬은 그들의 모습에 만족하며 <영웅의 근원>을 나와 수용소로 향했다.
이미 사전에 이야기가 끝난 뒤라 준비는 갖춰진 뒤였다. 현찬은 신원 확인 절차도 거치지 않고 수용소에 들어가 준비된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팔다리에 거대한 수갑이 채워진 아렌디르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현찬을 보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랜만이지?”
현찬은 아렌디르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손에 깍지를 끼고 앉아 그녀의 두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나를 불렀으니, 어디 한번 이야기를 해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