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
157화 움칼라족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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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참 신기하단 말이지.”
알렉세이 윌터.
미국의 유일한 오버랭크 헌터이자 구국의 영웅이라 불리는 남자.
그는 커다란 바위에 걸터앉아 주변 풍경을 주시했다. 알렉세이 주변으로 참상이 펼쳐져 있었다. 치열한 싸움의 결과였다. <세계연합>의 헌터들이 싸움이 끝난 주변을 빠르게 정리하고 있었다.
싸움은 격렬했다. 게이트를 통해 넘어온 적들은 인간의 언어가 통하지 않았다. 피부는 녹색 껍질로 둘러 있었고, 겹눈에는 인간을 향한 살의가 담겨있었다. 기묘한 생물이 나오는 영화에서만 보던 징그러운 생명체들이었다.
‘생긴 것 이상으로, 엄청나게 강했지.’
조금 전의 싸움을 떠올리면서 알렉세이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사상자가 나오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싸웠다. 평소보다 더 많은 힘을 사용했고 더 빠르게 움직였다. 헌터들도 열심히 싸웠다.
결과만 놓고 본다면 그들은 승리했다. 알렉세이의 주먹 한 방에 지면이 뒤집히고 곤충들은 몸이 터져나가며 죽었다. 헌터들도 열심히 총을 쏘았고 무기를 꺼내 들어 싸움을 벌였다. 그렇다 해도 피해가 하나도 없을 수는 없었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
알렉세이는 들것에 실려 나가는 시체를 보며, 씁쓸함을 삼켰다.
죽은 적의 수보다 이쪽의 피해는 매우 적었다. 그러나 피해를 더 줄이고 싶고 더 완벽한 승리를 꿈꿨다. 인간의 욕심이란 으레 그런 것이었다.
‘이마저도 현찬의 경고가 아니었으면 더 큰 일 날 뻔했다는 거지.’
적들이 들이닥친 곳은 미국 중부지대의 아주 넓고 우거진 옥수수밭이었다. 20년 전부터 시작된 <대통합> 이후로 대도시와 떨어진 이런 외진 시골에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다. 그 상태로 수십 년간 방치되어서 그런지 옥수수가 하늘 높은지 모르고 자라나 밭이 아니라 숲처럼 변했다.
[신기하네. 이 시대의 옥수수는 이렇게나 크게, 열심히 자라는구나.]
“유전자 조작해서 만든 인공 옥수수라 그래. 그러니까 높이가 5m 이상 자라지.”
[아. 그거 영화에서 봤어. 돌연변이들이 이거 먹으면 능력 잃는다며?]
“그래서 내가 유기농 옥수수만 먹지. 친구.”
알렉세이는 글루스카베에게 그런 농을 던지면서도, 끝나버린 싸움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곤충 인간들은 이 구역에 자리를 잡고 점점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녹색의 껍질을 지닌 녀석들이라 그런지, 보호색이 적용되어 멀리서 보면 분간을 할 수 없었고 위성사진으로도 확인이 안 될 정도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현찬은 이런 녀석들의 등장을 예견했고 알렉세이에게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알렉세이가 처음에 신기하다고 했던 것도, 현찬의 이런 신통방통한 행동 때문이었다.
[친구. 대체 왜 그렇게 표정이 심각해?]
“아니. 이렇게 싸우면서도 피해가 생긴다면 나중에 더 큰 시련이 몰려올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싶어서.”
[뭘 그런 걸 걱정하고 그래? 그럴 때가 다가온다면, 우리는 더욱 강해져 있을 거잖아!]
“그래. 그렇겠지. 이거, 강현찬 헌터에게 계속 빚만 지고 있어서 너무 미안한걸.”
[뭐야. 이 싸움을 미리 알려준 것 때문에 그래?]
“그것도 있지만, 그것 말고도 많이 있지. 게다가 이런 도움을 받는 것이 이번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아서 말이야. 동료에게 손을 뻗치고 싶지 않다면 우리도 어서 적들의 침략을 대비할 수단을 마련해 놔야 할 텐데 말이지.”
알렉세이의 말에 글루스카베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다 해도 헤르메스의 신통방통함은 못 이기지. 그 녀석, 전투에는 소질이 크게 없지만, 그 외에 다양한 분야에서는 뛰어나. 범용성이 매우 넓은 신이라고 해야 할까? 헤르메스는 아무튼 그런 녀석이야.]
“그 부족한 전투 부분은 전쟁의 여신 아테나에게 보강받고 말이지.”
[그러니까 그 인간은 그야말로 완전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리고 너무 욕심은 부리지 않는 게 좋아. 아무리 인간이 열심히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그 과학이라는 묘한 산물을 사용해도 신인 헤르메스의 능력과 맞먹을 수는 없으니까.]
글루스카베가 하고픈 말의 요는 이러했다. ‘너무 높은 산을 목표로 삼으면 이쪽만 피곤해진다. 그러니 적당히 수준을 낮추고 천천히 걸어가자’라는 것이다. 알렉세이도 그 말에 동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신의 권위에 도전하고픈 생각은 없어. 친구. 바벨탑을 지어서 무너지는 건, 인류 역사에서 한 번이면 충분하니까.”
[킥킥. 그래. 아무튼,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만 하면 되는 거야. 그렇지?]
“그렇지. 고맙군. 덕분에 갑갑하던 게 조금 나아졌어.”
[별말씀을. 우린 친구잖아?]
“그래. 친구지.”
알렉세이는 웃으면서 시선을 멀리 던졌다. 그 방향은 태평양 너머, 현찬이 머무는 한국이 있는 방향이었다. 그의 또 다른 동료이자 친구 또한 저곳에서 자신처럼 적들을 상대하며 치열하게 싸우고 있으리라.
‘그보다 그 악신회라는 녀석들이 지금 어떻게 움직이고 있을지가 걱정이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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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세트는 자신에게 배정된 방의 침대에 누우며 그런 말을 내뱉었다. 방은 좁지 않았다. 방 하나가 어지간한 대학교의 강의실 이상 크기를 방불케 할 정도로 컸다. 그리고 내부 인테리어도 고급스러운 물건들만 놓여 있어서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곳에 있으면서도 세트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최근에 받은 근신 처분 때문이었다.
세트의 독단적인 행동은 아니었지만, 그의 그릇된 판단으로 악신회는 <아수라 왕>이라는 귀중한 전력을 잃고 말았다. 현찬을 반드시 죽이겠다고 호언장담해 놓고, 실패하기는커녕 악신회의 멤버 중 하나를 잃고 돌아왔다.
세트를 향한 근신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오히려 여기서 끝나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세트도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불만을 표현할 뿐 행동으로 나서지 않았다.
‘이런 지루한 곳에서 다음 지시가 내려올 때까지 계속 기다리라고?’
이는 세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이왕 하계에 내려왔는데,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열등한 인간들을 죽이거나, 그들을 가지고 노는 재미는 매우 각별했다.
그러나 그에게 내려진 근신이라는 처분이 세트의 욕망을 억누르고 있었다.
‘그냥 다 무시하고 몰래 빠져나가? 아니면 깽판 한번 쳐?’
세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가 아무리 다혈질에 막 나가는 성격이라고 하더라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악신회다. 그리고 그에게 근신이라는 처분을 내린 자는 같은 악신회의 다른 신들이었다.
아무리 세트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생각과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다.
여기서 그만 강한 것이 아니었다. 다른 신들도 이집트의 신인 세트와 견줄만한 명성과 힘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악신회의 수장은 그런 다른 신들보다 훨씬 더 격이 높고 강대한 존재였다. 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는 세트조차도 그 힘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존재. 자신조차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그를 떠올리니 평소에 느껴보지 못한 무력감이 밀려왔다.
으득!
‘강현찬. 그 건방진 인간 놈. 네놈의 이름과 얼굴은 기억해뒀다. 반드시, 반드시 죽여주마!’
이 모든 상황이 전부 현찬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세트는 그를 향한 증오심을 불태우면서도 문득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 뇌리에서 떠올랐다.
‘에르카닐이라고 했던가?’
지구의 <대통합>을 앞당겨서 자신이 하계에 내려올 수 있는 지대한 공을 세운 이계의 존재. 그는 신이 아님에도 악신회에서 나름 높은 자리를 차지한 인물이었다.
‘그 녀석이, 지난번에 그랬었지.’
세트가 현찬을 잡으러 갈 때 얼굴에 새 가면을 쓴 에르카닐이 그에게 조심히 접근했었다. 거만한 세트는 그런 에르카닐을 하찮게 여기면서 쏘아붙였다. 에르카닐은 세트의 태도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정중한 어조로 말했었다.
‘세트 님. 강현찬이라는 인물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뭐? 네놈, 지금 나 보고 그런 인간을 조심하라고 한 거냐?’
‘그렇게 들렸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 녀석은 평범한 인간과는 거리가 멉니다. 신과 계약을 맺은 것도 있지만, 아직 밝혀지지 않은 숨겨진 힘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 봤자 인간이다.’
‘그렇다 해도 위험한 존재임은 변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녀석의 가장 큰 무기는 그가 지닌 힘도, 숨겨진 힘도 아닙니다. 바로 상황을 이끌고 나가는 판단력과 상대방의 허점을 찌르는 의외성입니다.’
에르카닐은 세트에게 친절하게 경고해주었지만, 세트는 그 말을 무시했다. 어차피 세트에게 있어서 인간이란 발로 밟으면 터져 죽는 벌레와 하등 다를 바 없었으니까.
문제는 세트가 그 벌레처럼 여겼던 녀석에게 강하게 쏘이고 만 것이다.
그 말을 무시했던 자신에게 화가 나면서도 에르카닐의 판단력을 조금은 인정하고 말았다.
‘다음번에 만난다면 반드시 죽이고 말 테다.’
세트는 언제가 될지 모를 미래를 기약하며 분노를 속으로 꼭꼭 눌러 담았다.
중요한 순간에 쌓아둔 분노를 전부 불러 모아 상대를 불태우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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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쳐들어오는 녀석들은 움칼라족이라는 녀석들인가.’
전남 광주광역시. 그곳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외곽의 무등산. 현찬을 필두로 <세계연합>의 헌터들이 무기를 들고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이곳에 게이트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이곳 또한 침략의 범위 내였기에 방심할 수 없었다.
레인져 계열의 헌터들이 주변을 수색하는 동안에도 현찬은 곧 넘어올 존재들의 정보를 읽기 바빴다.
‘이번 녀석들은 조금 위험한데.’
움칼라족은 소수 종족이다. 자신들이 사는 세계 자체가 워낙 척박한 곳이라서 살아남은 개체가 별로 없었고 그런 녀석들에게 있어 자원이 풍부한 지구는 당연히 최고의 먹잇감이었다.
녀석들은 인간과 달랐다. 딱히 정해진 외형이 없으며, 심지어 번식도 많이 하지 않는다. 지금의 숫자가 소수라고 하더라도 그 숫자는 줄어들면 줄어들지 늘어나지 않을 정도로 어딘가 기묘한 종족들이었다.
현찬이 위험하다고 생각한 것은 바로 그거였다.
놈들은 개개인의 강한 수준이 딱히 정해지지 않았다.
좋게 말하면 약한 녀석도 있지만, 나쁘게 말하면 한계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녀석도 있다는 것이었다.
‘진화하는 종족. 그것이 바로 움칼라족.’
현찬이 읽은 정보는 이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녀석들이 오늘 내로 이 무등산 어딘가에 나타난다는 것도 말이다. 그 이상은 현찬도 알 수 없었다.
‘어떻게든 등장과 동시에 잡아야 한다.’
잡는 것이 여의치 않는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거해야 했다.
아직 딱히 무언가 반응이 없는 걸 보아서 나타나지 않은 것 같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였다.
이번 작전에 참여한 헌터들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전 강원도에서 싸웠던 헌터들과는 다른 부대였다. 그러나 리쿠르드족이 보여준 무위는 녹화된 영상을 보고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이계에는 저런 말도 안 되는 놈들이 수두룩하다. 이번에 넘어오는 녀석들도 최소 리쿠르드족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순간 현찬의 피부를 타고 무언가 묘한 파동이 느껴졌다.
“게이트 반응! 느껴집니다!”
“방향은?!”
“여기서 북서쪽으로 약 7km!”
“어서 움직인다!”
헌터들이 움직였다. 현찬은 왠지 이번에는 느낌이 좋지 않아서, [탈라리아]를 신고 먼저 날아갔다. 목표는 게이트 반응이 일어난 장소.
[왜 이렇게 빨리 가?]
‘감이 안 좋아.’
그리고 현찬의 감은 어지간하면 들어맞는다.
현찬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목표 지점으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