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
156화 움칼라족 (1)
_
“그것참 큰일이었겠군.”
홀로그램 화면 너머에서 알렉세이가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현찬이 지난날 겪은 이야기를 듣고 있는 건 알렉세이뿐만이 아니었다. <세계연합>에 소속된 사람 중 한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도 다수 있었고, 오버랭크 헌터들은 전부 다 있었다.
현찬은 대답을 독촉하지 않고 어둡고 커다란 브리핑실 내부를 천천히 돌아다녔다. 다른 간부들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은 대부분 상당히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악신이라는 존재들이 계약자도 없이 육신을 지니고 하계에 내려왔다.
이는 약 20년 전 발생했던 <대통합>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세계의 법칙을 근간부터 무시하는 일이었다.
“강현찬 헌터 님. 정말로 그것이 사실입니까?”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것을 증명할 자료는 없지만, 이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끄응.”
마냥 현찬의 말이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치부할 수 없었다. 이미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사태 때만 해도 <아포피스>가 등장하지 않았던가. 그 악신회라는 존재가 대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모르는 신을 강림시키는 방법이 있는 건 확실했다.
“대체 어떻게 신이나 되는 존재를, 지상으로 육신을 주면서 내려오게 할 수 있는 거죠?”
“솔직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저희가 이 세계에 관해서 아는 것은 극히 일부라 함부로 단언할 수도 없는 노릇이군요.”
“더 문제는 그 악신회에 소속된 신들이, 하나같이 다 위험한 신들임은 틀림없으며 그들의 숫자가 총 몇 명이나 되는지조차 확인 불가능하다는 거죠.”
다른 세계와의 싸움도 문제인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구 내부에서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악신회를 이끄는 자가 대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대놓고 신화 속에서 악명이 자자한 신들만 모으는 걸 보아서 좋은 의도는 없으리라.
“일단 신이 하계에 각성자의 도움 없이 내려올 수는 있습니다. 다만 거기에는 엄청나게 막대한 준비가 필요하죠. 신이 책임을 져야 할 필요도 있으며, 그 신격에 걸맞은 무언가가 하계에 준비돼 있어야 합니다.”
“그 준비라는 게 대체 뭐죠?”
한 중년 여성 의원의 질문에 현찬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모두가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제물입니다.”
현찬의 말에 몇몇 사람들이 숨을 집어삼켰다.
제물을 바치는 행위는 옛날에도 그랬지만 현대에서도 절대로 용서될 수 없는 끔찍한 것이다. 신을 하계에 강림시키기 위해서 인간과 짐승들의 목숨을 제물로 삼는다. 그것이 불러오는 후폭풍은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이 안 되는 건 아닙니다. 저희가 지금까지 그 방법을 알면서도 무시해왔을 뿐이죠.”
제물을 바치는 건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행위로 문제가 많았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 행위의 존재를 알고 그것을 통해 이루어낼 수 있는 결과물이 있음에도 애써 무시해왔다. 왜냐하면, 그것은 옳지 않은 일이니까.
“적들은 저희보다 훨씬 더 악독하고 잔혹한 자들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저희처럼 존엄성을 해치는 행위를 하지 않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악신을 부르는 자들에게 인간성을 바랄 수는 없습니다.”
모두가 바라는 대로 선한 인간만 존재한다면 이 세상에는 범죄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악한 자는 존재했고 그들은 문제를 일으켜왔다.
사람들의 표정이 모두 심각해졌다. 이 지구 어딘가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물론 제물을 사용할 확률이 높다고 할 뿐이지 그 사실을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이계의 존재들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저희가 모르는 다른 방도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신들에게 인신을 공양하여 그들을 하계로 불러올 확률이 가장 높다고 할 수 있었다. 옛 신화와 관련된 문헌에도 이런 언급은 상당히 많았다.
신들에게 바치는 각종 공양, 매년 마을의 처녀를 제물로 바치는 등 이야기는 셀 수 없이 많았다. 그것은 신에게 자신들의 충성심을 보여주는 행위이기도 했지만, 이 제물을 통해 강해진 신들에게 부디 자신들을 지켜달라는 애원이기도 했다.
그것이 옛날에 벌어진 일이라고 하더라도, 지금 와서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세계가 발전해도 여전히 그런 끔찍한 사상을 가진 인간은 이 지구에 많이 있으니까.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제물은 조금 다릅니다.”
현찬은 그렇게 말하며 마석을 꺼내 들었다.
“이 마석이 보이십니까?”
“그 마석이 어쨌다는 거죠?”
“설마, 저들이 마석을 제물로 이용해서 신들을 불러 모았다는 말입니까?”
현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한 사람들만 모아놓아서 그런지 귀찮게 설명을 할 필요가 없었다.
“마석이 지닌 에너지는 아직 저희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성질이죠. 그리고 그런 마석을 이용한 응용 방법은 무궁무진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은 모두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홀로그램 속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마석을 이용한 기술 발전은 최근 그야말로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원래부터 마석의 가능성을 숨겨왔던 기업들이 세계를 위해서 자신들의 비전을 풀어냈기에 가능한 성장세였다.
마석을 사용한 무기는 기존의 무기와 차원이 달랐다. 몬스터에게 공격이 먹혔으며 심지어 다른 차원의 존재들에게도 확실하게 먹힌 것이 확인되었다.
고농도, 상급 마석을 이용한 에너지는 워프 게이트를 통해 사람들이 먼 거리를 움직일 수 있게 해주었다. 그것 말고도 자동차 산업에도 마석이 들어가며 그 외에 다양한 에너지 산업에서 마석은 필수다.
그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마석은 이미 현대 사회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
현찬은 그런 마석이 악신회에서 바치는 제물이 아닐까 하는 의견을 내고 있었다.
옆에서 잠자코 듣고만 있던 헤르메스와 아테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 마석을 제대로 다룰 줄만 안다면 하계에 신을 부르는 것도 마냥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 <난제>라고 불렸던 몬스터들의 마석의 힘을 생각하면, 확실히 신들을 부를 수 있다고 할 수 있겠구나.]
현찬의 말은 상당히 합당했다.
“잠깐. 그렇다는 건, 놈들의 꼬리라도 찾을 수 있을 확률이 늘어난다는 소리군요.”
“만약 마석을 이용한다는 가설이 사실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세계의 대부분의 마석은 <세계연합>의 담당입니다. 그중에서 최근 들어 마석 사용량이 급격하게 오른 곳을 위주로 살핀다면 뭔가 단서가 나올 겁니다.”
<대통합>이 일어나도 여전히 몬스터들은 게이트에서 많이 나타났고 헌터들은 그들을 사냥하여 마석을 채취했다. 미등록 마석 또한 엄연히 존재하며 아직도 암시장에서 돌아다니고 있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세계연합>이 관리하는 마석의 양은 어마무시하다.
전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마석의 95% 이상을 세계연합이 관리하고 있다. 신급 영령을 하계로 강림시키기 위해서라면 마석 사용량도 어마어마할 터. 그만한 마석을 모을 수 있는 자라면, 아마 사회적으로도 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분명했다.
“앞으로 행동의 방향성은 대충 갖춰졌군요.”
“자세한 사항은 추후 회의를 통해서 해결하도록 하죠. 일단은 악신회에 대한 정보가 우선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의견을 꺼내며 홀로그램을 껐다.
수십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회의실에는 현찬과 나머지 오버랭크 헌터 셋의 홀로그램이 남았다.
양 리화는 조금 전부터 입을 꾹 다문 채 멀뚱멀뚱 구경만 하다가 사람들이 사라지자 그제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사람들과 지내는 것이 서툰 그녀는 이런 자리가 거북했다.
최근에는 그나마 좀 나아져서 이런 자리까지 참석하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세상 참 좋아졌네요. 멀리 떨어진 사람이 마치 실제로 앞에 있는 것처럼 만날 수 있다니.”
이 홀로그램 기술 역시도 최근 들어 개발된 것이다. 마석을 이용한 개발 사업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전화나 화상채팅으로만 만나는 것을 넘어 홀로그램을 띄워 보다 입체적인 형상을 보일 수 있었다. 아직 상용화는 되지 않았지만, 그것도 머지않은 미래다.
“현찬. 너의 말대로 마석의 활용은 무궁무진하지. 이미 이것 말고도 다양한 제품들이 출시되고 있지. 유명한 스포츠카 회사에서는 마석을 이용한 고급차량을 만들어서 나에게 선물까지 줬더라고.”
“그것참 빠르겠네요.”
“다른 차들에 비하면 더 빠르기는 하지. 그래도 내가 뛰는 것보다는 느려. 뭐, 차차 나아질 걸 생각하면 나쁜 것도 아니야.”
서로 의미 없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알렉세이가 본론을 꺼냈다.
“어찌 됐든, 악신회의 존재는 우리에게 영 달갑지 않단 말이지.”
그들의 개개인의 무력도 무력이지만, 그들의 숫자가 총 몇 명인지도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런 상대가 지난번처럼 기습해 오는 순간 이쪽은 큰 피해를 보고 말 것이다.
“아무쪼록, 우리도 일단 조심히 움직여야겠어. 아무리 우리가 신과 계약을 맺었다고 하더라도 다른 신들이 그렇게 뭉쳐서 나서면 위험하니까.”
오버랭크 헌터는 세상을 이끄는 고급인력이자 모두의 희망을 품은 하나의 상징이었다. 이 넷 중에서 한 명이라도 죽는 순간 세계에 얼마나 큰 파장이 몰아칠지 예측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도 한동안은 괜찮을 겁니다. 그쪽도 이번에 큰 피해를 보았으니까요. 섣불리 움직인 탓에 그런 꼴을 당했으니 악신회도 움직임을 사리겠죠.”
“어찌 됐든, 우리도 혼자 다니는 건 좋지 않겠어. 나중에 오버랭크 헌터들이 더 늘어난다면 그때 팀을 이뤄서 움직여야 마음이 놓이겠지.”
“…… 저. 그러고 보니, 저희 뒤를 이을 아이들은 지금 어떤가요?”
“나 또한 그게 궁금하군.”
가만히 있던 양 리화와 안드레이가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현찬도 그 부분에 관해서 설명해주려고 했었다.
“총 여섯 명의 차기 오버랭크 헌터들의 생도들은 현재 매우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조차 놀랄 정도예요.”
1년 만에 오버랭크 헌터를 달성한 현찬이 그렇게 말할 정도로 차기 오버랭크 헌터들의 성장세는 매우 가팔랐다. 일단 그들이 지닌 재능부터 신들에게 선택을 받은 것들이다. 당연히 일반 헌터들보다 훨씬 월등했다.
무엇보다 그 6명은 헌터들 중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하는 S랭크 헌터들을 교사로 개인 교습을 받고 있다. 받는 교육의 질부터 다른 데다가 항상 최상의 환경으로 이루어져 있고 재능까지 출중하니 그 모든 것이 한데 뭉쳐 최고의 효과를 자아내고 있었다.
“실제 전투와 연습의 차이는 크지만, 이대로만 가준다면 머지않아 매우 큰 전력이 될 겁니다.”
어떻게 보면 조금 질투 날 정도로 좋은 환경에서 성장하는 그들이지만, 세계의 운명을 함께 지고 가야 할 동료가 빠르게 강해지는데 싫어할 사람들은 이 자리에 없었다.
“저희는 후배들이 잘 따라올 수 있도록 길을 열심히 닦아 놔야죠.”
그것이 선배인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 오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도록 하지. 현찬, 네가 말했던 것처럼 이쪽에도 이계의 침공이 보이려고 하거든.”
“저도요.”
“뭐 피차 서로 바쁜 몸이니까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뵙도록 하죠.”
무엇보다 리쿠르드족의 본격적인 침공 이후로 다른 차원의 침략이 더욱 활발해지려는 기미가 보였다. 현찬은 <헤르메스의 눈>을 통해 언제 어디서 침략이 일어나려고 하는지 읽어 냈다.
모든 정보를 완벽하게 읽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부분만 얻어낸 것만 해도 큰 성과다.
‘이번에는 전남 쪽인가.’
앞으로 하루. 바로 내일, 전남의 광주광역시에 또 다른 적들이 들이닥칠 예정이었다.
‘참 바쁘네, 바빠.’
현찬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자신의 무기를 챙겨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