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
155화 이간질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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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찬이 게이트 바깥으로 나왔을 때 헌터들이 기절한 리쿠르드족을 모두 생포하고 데려가고 있었다. 게이트 주위에서 혹시나 추가로 적들이 더 나타나지 않을까 대비하던 헌터들은 게이트에서 누군가 튀어나오자 총을 겨누었다.
“잠……! 중지! 쏘지 마!”
눈썰미가 좋은 지휘자가 소리 질렀다. 게이트에서 넘어온 것이 현찬임을 눈치챈 것이다. 그는 헐레벌떡 현찬에게 뛰어갔다.
“몸은 괜찮으세요?”
“네. 별다른 일은 없었어요. 그보다 주변 정리는 끝났나요?”
“네. 생포한 이들은 거의 다 이동시켰습니다. 중간에 저들의 대장으로 보이던 자가 깨어나서 난동을 부렸지만, 마취총을 쏘아서 제압했습니다.”
지성을 지닌 생명체에게 마취총을 쏘아서 제압하는 건 인권 존중에 문제가 있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이세계 인간에게도 인권을 적용할 정도로 지구의 상황이 여유롭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라도 확실하게 상황을 정리한 지휘관의 행동은 칭찬받아 마땅했다.
“강현찬 헌터님. 혹시 게이트 안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일이 있기는 했죠. 하지만 일단 적습은 더 없을 겁니다. 저 안쪽에 대비하는 병력은 없었거든요.”
‘다만’, 하고 현찬이 말을 이었다.
“일단 여기 있는 인원들, 빠르게 전부 이동시켜 이 자리를 벗어나세요. 기지는 버립니다. 어차피 싸움의 여파 때문에 반쯤 무너져서 수리해야 하지만, 그건 나중에 해야겠죠.”
“네, 네?”
이곳에서 대피해야 한다는 갑작스러운 현찬의 말에 지휘관은 당황했다. 그러나 이내 행동을 차분히 다잡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찬은 오버랭크 헌터이자 대한민국 최강의 헌터다. 그의 직위상 허튼소리를 할 인물은 아니다.
“알겠습니다. 다들 들었나! 빨리빨리 움직여라! 늦는 녀석들은 내가 먼저 엉덩이를 걷어차 주마!”
“넵!”
지휘관의 서슬 퍼런 협박에 현장에서 움직이던 헌터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세계연합>에 소속된 헌터들은 평소에도 고강도의 훈련을 받아왔기 때문인지 위계질서와 군기가 확실하게 잡혀 있었다.
헌터들이 움직이는 속도가 현저하게 올라갔다.
어지럽던 현장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현찬은 그 모습을 보면서 시간 안에 퇴각을 끝낼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혹시나 움직임이 늦어진다면, 언제 게이트 안쪽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악신회에 뒤를 잡힐 수도 있었으니까.
‘녀석들. 분명히 열이 제대로 올랐을 거란 말이지.’
현찬의 이간질 때문에 싸우게 된 것도 화가 날 일인데 현찬은 그에 더해 떠나기 전에 악신회에 크게 한 방 먹여주었다. 그 공격으로 인해 악신회는 분명히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그쪽이 이계의 신인 라쉬칼에게서 쉽게 도망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들이 공격이 아닌 수비에만 집중해서 빠르게 후퇴하며 게이트를 넘어오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었다.
분노한 그들이 이곳에 등장하면 어떤 행동을 벌일지는 자명했다.
“철수한 이후 3일 동안은 이곳에 방어 인력을 배치하지 마세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한다고 배치하면 큰일이 생길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제가 책임질 테니 물리세요.”
“정말로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네. 저쪽 세계 존재들도 한번 크게 당했으니까 쉽사리 넘어오지 못할 거예요. 저희는 인질을 생포하고 싸움 뒤처리만 하면 됩니다. 자세한 상황은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일단은 최대한 빠르게 이 자리를 벗어나도록 하죠.”
“네. 알겠습니다.”
현찬은 혹시나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최면술을 사용해서라도 모두 물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현찬이라도 아군들에게 멋대로 최면을 거는 건 조금 그랬다.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자! 어서 철수! 빨리 돌아가서 쉬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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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들이 철수하고 빈 공터로 남은 게이트의 근처에 빛이 뿜어져 나오며 두 개의 인형이 게이트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그 둘은 오로치와 세트였다. 아수라 왕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고 지구로 넘어온 둘의 상태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제길! 드디어 돌아온 건가?”
세트는 지구의 모래바람을 느끼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영령의 세계에 있던 시절에는 육체의 굴레에 속박되지 않아서 숨을 쉬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하계에 내려온 그는 육신을 가지게 되어 생명 활동을 해야만 했다.
그는 좋든 싫든 간에 육신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육신을 가진 적이 없는 세트나 오로치에게 있어서 거친 싸움 이후의 끝없는 탈력감과 체력 저하는 매우 괴로웠다.
하지만 그들은 역시 신의 힘을 지녔기 때문에, 회복의 속도도 매우 빨랐다.
몇 분 지나지 않았는데도 몸의 상처는 아물었고 체력도 상당히 회복되었다. 그들은 신력을 이용해 피투성이에 찢어진 의복을 원래대로 복구했다.
“이 버러지 같은 인간 놈! 어디에 있어?!”
세트는 체력이 조금 나아지자 눈에 불을 켜고 현찬을 찾았다. 현찬에게 당한 것만 생각하면 현찬을 그대로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았다.
‘이 개 같은 놈이, 감히 다른 녀석들과 싸움을 붙이고 통수까지 쳐?!’
세트가 어딜 가서 인간에게 이런 일을 겪겠는가. 비록 그는 신화 속 이야기에서 패배한 바 있지만, 그것은 엄연히 상대도 같은 신이었기 때문이다. 평소에 하찮게 여겼으며 자신을 숭배하기 바빴던 인간에게 이렇게 호되게 당한 건 처음이었다.
평소에 벌레만도 못하게 여긴 존재에게 크게 당했다는 사실이 세트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세트에게서 참을 수 없는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옆에 있는 오로치가 눈살을 찌푸렸다.
신의 진심 어린 살기는 피부가 저릿할 정도로 끔찍했다.
‘이거 참. 멋대로 뒤를 쫓아서 들어간 게 누군데 이렇게 화를 내는지 모르겠군요.’
오로치는 속으로 세트를 고깝게 여겼다. 그는 뭔가 꿍꿍이가 있을 것 같다고 말렸었다. 아수라와 세트는 그 말을 듣지 않고 자신만만하게 들어갔었다.
오로치도 현찬에게 호되게 당한 걸 생각하면 화가 났지만,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이성은 있었다.
오로치가 무슨 생각을 품든 간에 세트는 현찬을 향해 분노를 터뜨렸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씻고 주변을 찾아봐도 현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현찬뿐만 아니라 다른 인간들의 모습도 없었다.
“어디야? 이 자식들 다 어딜 간 거야?”
심지어 게이트 근처에 쓰러져 있던 리쿠르드족까지 모두 사라졌다. 오로치는 바닥에 새겨진 발자국과 바쁘게 움직인 흔적들을 보며 가느다란 눈동자를 더욱 가늘게 좁혔다.
“아무래도 전부 퇴각한 것 같습니다만.”
“뭐?”
“그쪽 입장에서는, 이미 저희에게 한 방 먹였으니 이 이상 싸울 필요가 없다는 거겠죠. 무엇보다 준비도 안 된 참에 신을 상대로 싸울 수도 없으니까요. 흔적을 보니 이 자리를 뜬 지 꽤 시간이 지났습니다.”
“여기서 도망쳤다고?!”
현찬이 도망쳤다는 사실은 세트의 불같은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세트는 현찬이 병력을 이끌고 자신들과 맞붙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 분노를 고스란히 권능으로 발현하여 모조리 쓸어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이게 뭐란 말인가!
인간은커녕, 그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다니.
현찬과 관계가 없는 헌터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 화가 났다. 현찬이 없더라도, 다른 누군가 있다면 그를 대상으로 화풀이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마저 불가능하게 되었으니 어찌 당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장 쫓으면 된다! 어차피 녀석들이 아무리 멀리 갔다고 하더라도 이 자그마한 땅덩어리 안이다! 우리가 마음만 먹는다면 쫓아갈 수 있어!”
세트의 말에 오로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저희 상황을 보고도 그렇게 싸우자는 말씀이 나옵니까?”
오로치와 세트는 겉이 멀쩡해 보여도 라쉬칼과의 치열한 전투 때문에 많은 힘을 소모한 상태였다. 여기서 더 이상의 전투는 그들에게 무리였다.
“무엇보다 저희는 이미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감정에 휩쓸려서 경거망동했다가 돌이킬 수 없는 손해를 볼 게 뻔한데 어떻게 싸우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대로 당하고만 있으란 말이냐!”
“이미 거기서 저희는 크게 실책을 범했습니다. 이 이상의 실책을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저희에게 있어서 뜻을 같이한 동료를 잃는다는 건 절대로 악신회에서 괄시하지 않는 문제입니다만.”
“큭!”
오로치의 말은 옳았다. 지금 지나치게 감정적인 상태라서 그렇지, 세트의 이성도 더 싸우면 위험하다고 외치고 있었다. 무엇보다 아수라 왕이 죽는 건 악신회에 매우 큰 손해였다.
다른 차원에서 다른 신격과 싸움을 벌이던 아수라 왕은 결국 하계에 내려온 육신을 잃고 말았다. 그들이 죽는다는 건 존재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수라 왕은 다시 영령의 세계로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신격에 큰 상처를 입었고 심지어 자신의 권능과 힘 일부를 영구적으로 손실하고 말았다. 무엇보다 당장 전력에 도움이 될 그가 하계에서 사라지고 말았으니 어찌 큰 손해가 아닐 수 있을까.
여기서 더 싸울 수 없었다. 그들은 후퇴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은 패배했다.
그것도 아주 처참하게.
“제길! 제길! 제기이이이일!”
세트의 분노어린 목소리가 밤하늘의 어둠에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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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하하! 대단해! 악신회라는 녀석들이 있는지도 몰랐지만, 기습을 당했는데도 오히려 녀석들에게 한 방 먹여주다니!]
로키는 게이트 주변에서 바닥을 발로 쿵쿵 내려찍으며 분노를 표출하는 세트를 보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녀 또한 어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염탐하는 일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었다. 오딘에게서 몰래 훔쳐 배운, 미미르의 샘을 거울처럼 사용하는 그녀만의 비기였다.
물론 범위도 한정되어 있으며 이세계에서 현찬과 악신회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명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악신회 신들이 셋이 들어가서 둘이 나오고, 심지어 그 둘의 몰골도 말이 아닐 정도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현찬은 자신을 상대한 세 명의 악신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여준 것이다.
로키는 그 사실에 참을 수 없는 기쁨과 환희를 느꼈다.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 이렇게 다시 증명되었다. 이미 확신하는 단계였지만 이런 기분은 언제나 느껴도 색다른 즐거움을 주었다.
주현창은 기뻐하는 로키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는 말없이 조금 전 현찬이 보여주었던 전투를 곱씹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대한 창 그리고 게이트 너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신이라는 존재 중 하나를 없애고 둘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주현창은 생각했다. 과연 자신이 현찬과 똑같은 상황이 된다면 저렇게 대처할 수 있을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현찬은 현찬이고 자신은 자신이다. 여기서 현찬을 인정하는 순간 빠져나올 수 없는 자괴감의 늪으로 몸을 던지는 짓이었다.
‘아직. 아직이다. 아직은 내가 약해서 함부로 움직일 수 없겠지만.’
주현창은 눈을 빛냈다.
‘시간이 흐른다면, 그때는 달라질 것이다.’
그때를 위해서라도 그는 자신의 능력을 갈고닦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