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
154화 이간질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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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도 그랬지만, 현찬은 귀찮은 적을 상대할 때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았다.
그는 써먹을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최대한 이용하자는 주의였다.
악신회의 신들을 상대로 이곳에 대신 싸워줄 자들이 있는데 왜 현찬이 직접 싸운단 말인가?
이곳에서는 현찬이 무슨 행동을 해도 지적할 사람이 없으며 현찬이 지켜줘야 할 지구의 시민들도 없다.
그야말로 원하는 건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이다.
거기서 현찬은 당연하게도 이 세상의 신과 악신회의 신을 싸움 붙였다.
오랑캐는 오랑캐를 이용해서 제압한다.
악신은 악신을 이용해서 제압한다.
이보다 더 깔끔한 방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물론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고 행동해야 했지만.’
아무리 악신이라고 하더라도 처음 보는 현찬의 말을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현찬에게는 그런 악신조차 혹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바로 헤르메스의 말발!
헤르메스의 권능은 협상과 계약에서 우위를 점하게 해준다. 그것은 상대방을 설득하고 무언가 그럴싸하게 상황을 이끌어 나가는 데 주로 사용되고는 한다. 상대가 신이라고 하더라도 이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거기에 더해 현찬은 [카두케오스(caduceus)] 지팡이를 이용해 상대방의 정신을 아주 살짝 건드렸다.
직접 최면이나 세뇌를 건다면 상대가 눈치를 챘을 것이다. 현찬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상대방 또한 이 세계의 신이었으니까. 현찬은 매우 조심스럽게 능력을 조절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능력을 부족하게 사용한다면 설득이 먹히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티가 나게 사용하면 이상한 것을 눈치챌 것이다. 그 미묘한 중간을 현찬은 외줄 타듯이 정교하게 다루며 성공한 것이다.
신의 능력을 숨기고서 어떻게든 상대방의 비위를 살살 맞추며 권능을 발동하는 것은 현찬에게도 상당히 고된 일이었다. 하지만 그 고생의 과실은 매우 달콤한 것이어서 현찬은 밝게 웃을 수 있었다.
“이, 이이! 비겁한 녀석이!”
아수라는 휘둘러지는 뿌리를 베어내며 현찬에게 분통을 터뜨렸다. 현찬은 그런 아수라의 외침에 코웃음을 쳤다. 비겁하기는 누가 비겁하다는 건가. 먼저 악신회가 비겁하게 셋이서 한 명에게 덤벼들었다. 오히려 현찬은 지금 이 행동을 정당방위라 생각했다.
[이 빌어먹을 놈들이! 계속 귀찮게 구는구나!]
악신 <라쉬칼>.
라쉬칼족이 숭배하는 이 나무의 이름은 족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라쉬칼이라고 지은 거로 생각할 법했으나, 오히려 라쉬칼족이 이 악신의 이름을 따서 부족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것이다.
거목 <리쿠르드>를 숭배하는 종족은 리쿠르드족이라 불렀다. 이 세계의 법칙 중 하나였다.
라쉬칼은 매우 분노한 상태였다. 다른 세계의 신들이 자신의 영토를 침범하여 자신을 숭배하는 일족을 죽인 것도 화가 났다. 그것도 모자라서 녀석들은 자신의 공격을 막아내며 자신의 몸에 손상을 입히는 것이었다.
라쉬칼은 성격이 좋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최고라 생각했고 자신과 동격인 다른 거목들을 업신여기기까지 했다. 라쉬칼은 자만심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라쉬칼에게 있어서 모든 일은 본인 뜻대로 흘러가야 성이 찼다.
그런데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여섯 개의 팔을 가진 녀석, 모래를 다루는 녀석 그리고 뱀처럼 교활한 녀석까지.
전부 자신의 공격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다.
라쉬칼도 전력을 다한 건 아니었다. 본인도 이런 드잡이질에 많은 힘을 쓰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적당히 최소의 힘만 사용하여 쓰러뜨리려 했다. 그러나 상대도 신이라는 녀석답게, 쉽사리 당하지만은 않았다.
그 상황에 라쉬칼은 화가 났다.
‘어쭈? 먼저 내 영토에 침입한 녀석들이, 목이 뻣뻣하다?’
라쉬칼의 속내는 이랬다.
물론 악신회 멤버 또한 라쉬칼과 비슷한 생각이었다.
‘신으로서 권능조차 절대적으로 발현하지 못하는 나무 주제에 우리를 건드려?’
이곳이 아무리 라쉬칼의 홈그라운드라고 해도 악신회의 신들도 자존심이 매우 강했다. 이쪽이 침입자인 입장이더라도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서로 합의점이 없는 두 진영의 충돌은 시간이 흐를수록 격화일로를 달렸다.
[적당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면 봐주려고 했는데 안 되겠구나! 네놈들의 거만함을 탓해라!]
“썩은 고목이 어딜 감히 큰소리를 치느냐!”
라쉬칼은 자신의 공격에도 쉽게 쓰러지지 않은 악신회에 분노했고 악신회는 현찬을 죽이는 걸 방해하는 라쉬칼에게 분노했다.
우우우웅!
라쉬칼이 자신의 힘을 더 끌어다 쓰자 주변의 숲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원래 넓던 공터가 점점 그 면적을 넓혔다. 라쉬칼 영역 바깥에 있던 나무들이 순식간에 생기를 잃고 쓰러져갔다.
엄청난 범위의 생명력 흡수!
현찬은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 황급히 마력을 일으켜 몸에 둘렀다. 라쉬칼의 능력 중 하나인 ‘생명력 흡수’는 매우 강력했다. 마력을 둘렀음에도 현찬의 피부가 저릿했다.
‘과연, 이쪽 신도 만만치 않다는 거겠지.’
각 차원에는 다양한 신들이 있었다. 유난히 지구 차원에 신들이 많았을 뿐이지 각 신이 지닌 힘의 크기를 생각하면 이계의 신도 지구의 신에 꿀리지 않았다.
라쉬칼이 주변의 생명력을 흡수하려 들자 라쉬칼족은 혼비백산하며 도망쳤다. 라쉬칼 주변의 대지는 순식간에 죽음의 땅으로 변모했다. 나무와 풀도, 땅속에 사는 생명체들도, 나무 근처에 있던 새들도.
모조리 삐쩍 말라 가루로 흩어졌다.
[라쉬칼! 이게 무슨 짓이냐!]
[우리 영토에 권능을 사용하다니! 조약을 깰 생각인가?!]
당연히 다른 거목들에게 라쉬칼을 향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라쉬칼은 그런 신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귀찮았는지 자신의 신력을 통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영상화하여 주변 거목들에게 전부 보냈다.
[음. 이계의 신이라니.]
[건방진 것들. 감히 우리 차원을 공격해? 그것도 가장 약하다는 지구 차원이?]
[라쉬칼, 그대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번만큼은 그 무례를 넘어가도록 하지.]
상황을 모두 전해 받은 거목들은 라쉬칼을 이해했으며 몇몇 거목은 오히려 라쉬칼을 옹호해주기까지 했다. 이들 세계도 신들이 <대통합>을 위해서 서로 합의점을 찾아 지내는 중이다. 이계의 신이 쳐들어 왔으니 자신들끼리 힘을 합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정해진 상황이었다.
현찬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와. 예기치 못한 지원군이 늘어난 기분인걸?”
[이쪽 신들은 나름대로 합의가 잘돼있나 보네.]
[그렇지. 원래 명확한 적이 생긴다면 사이가 안 좋은 녀석들도 서로 손을 잡고 적을 타도하는 법이다. 이 세계의 신들에게 있어서 저 악신회는 함께 힘을 합쳐 물리쳐야 할 적이지.]
어찌 되었든 현찬에게는 상황이 더 좋게 흘러갔다.
다른 거목들은 자신이 지닌 힘과 생명력 일부를 라쉬칼에게 전해주었다.
[이 힘을 받아라. 해 줄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지만, 도움이 되기를 빌지.]
[저 간악한 이계의 신들에게 쓴맛을 보여줘라.]
[크하핫! 너희들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고!]
라쉬칼은 평소에 느껴보지 못한 풍족한 힘을 느끼며 다시 한번 제대로 능력을 발동시켰다. 그의 나뭇가지들이 움직이고 뿌리가 곳곳에서 솟구쳐 올랐다. 현찬은 그 모습에서 예전에 사냥했던 난제 중 하나인 <스왈로우>가 떠올랐다.
하지만 라쉬칼은 스왈로우보다 훨씬 더 강하고, 훨씬 더 위협적인 존재다. 현찬마저도 라쉬칼이 뿜어내는 살기에 저절로 섬뜩해질 정도였다. 높이만 800m가 넘는 나무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처럼 움직이니 그만큼 위협적인 광경이 또 없었다.
현찬은 [탈라리아]를 신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저들의 싸움의 영향이 미치지 않을 정도로 거리를 벌린 후에 눈에 힘을 주고 싸움을 지켜보았다.
“아. 팝콘 가져올걸.”
[아. 그러네. 원래 이렇게 싸우는 거 구경하는 게 최고잖아.]
[난 치킨에 맥주가 좋다. 계약자여.]
모래 폭풍이 몰아치고, 검은 기운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뱀이 나무를 휘감았다. 여섯 개의 보랏빛 검기가 어둠을 밝히며 라쉬칼의 몸을 베어냈다.
라쉬칼도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수십만 개가 넘는 뿌리를 움직여 공격을 가했고 주변에 강력한 에너지 드레인 필드를 펼쳐 움직임을 제한시켰다. 심지어 그 나무의 일부가 떨어져 나와 나무로 이루어진 기괴한 생명체로 변해 악신회에 달려들었다.
“오오. 꽤 치열하네.”
[이거 오래간만에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어.]
[치킨과 맥주를 챙겨오지 못한 것이 한이구나.]
“엇. 라쉬칼이 공격받았다!”
[그래도 아수라도 피해가 커!]
[후방 지원해주는 녀석들도 지쳐 보이는구나.]
한 명의 인간과 두 신은 눈에서 빛을 내며 흥미롭게 싸움을 구경했다.
아테나조차 옛날이었으면 상상조차 하지 못할 칠칠치 못한 모습으로, 즐겁게 싸움을 보고 있었다. 계약자인 현찬에게 전투사로서 카리스마를 내보이지 못할망정 그의 성격에 영향을 받아버렸다.
3대 1의 싸움이었지만, 라쉬칼은 다른 거목들의 지원을 빵빵하게 받고 있었다. 평소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권능을 마음껏 발휘하며 미친 듯이 악신회를 몰아쳤다.
이것은 악신과 악신 간의 싸움이 아닌 지구의 신과 이계 신의 싸움이라는 ‘집단 싸움’까지 되고 말았다. 당연히 그 싸움의 스케일은 블록버스터 영화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고 그 여파는 더욱 거대했다.
몇 킬로미터 바깥에 떨어져 있음에도 현찬은 피부를 울리는 충격을 느꼈다.
“이제 곧 끝나는 거 같지?”
[아무래도. 악신회 쪽이 상당히 불리해 보이는걸.]
[그야 당연하다. 애초에 이쪽 세계는 저 거목들의 세계다. 아무리 육신을 가져서 마음껏 다른 세계를 활보할 수 있는 신이라고 하더라도 제한을 받는 게 없는 건 아니지.]
그것이 결국 두 진영의 승패의 차이를 갈랐다.
시종일관 치열하게 싸우던 악신회는 점차 강해지는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팽팽하게 부딪치던 두 집단의 균형이 한쪽으로 기우는 순간이었다.
현찬은 그 광경을 신나서 지켜보았다.
[우리는 슬슬 빼야 하지 않을까?]
“응. 나도 느끼고 있어.”
이쪽 세계의 신들도 바보는 아니다. 눈치가 빠른 몇몇 거목은 현찬의 존재를 조금씩이지만 알아차리려고 하고 있었다. 현찬도 오래 머물면 저들의 표적이 되리라. 현찬은 [탈라리아]를 신고서 빠르게 게이트로 날아갔다.
때마침 싸움이 끝나가려 하고 있었다. 라쉬칼의 강렬한 공세를 견디지 못하는 악신회는 결국 후퇴를 생각하는지 점점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라쉬칼은 쉽게 그들을 보내주려고 하지 않았지만, 악신회도 단지 당하고만 있을 정도의 인물들이 아니었다.
현찬은 <헤르메스의 눈>을 통해 그 상황을 지켜보다가 게이트 근처에서 멈춰섰다.
[왜?]
“가기 전에 선물 하나는 주고 가야겠지.”
이쪽 신들과 싸움을 붙여서 즐겁게 구경하기는 했지만, 현찬도 나름 악신회에 쌓인 게 있었다.
‘감히 3대 1로 나를 치려고 해?’
원래라면 리쿠르드족을 막아내고 싸움을 끝낼 현찬이었지만, 악신회 때문에 의도치 않은 일들을 겪어야만 했다. 그것을 생각하면 한 방 먹여줘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어쩌려고?]
“이러려고.”
현찬은 억눌렀던 신력을 최대한 활용했다. 현찬에게서 강렬한 빛의 기둥이 뿜어져 나오며 밤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당연히 악신회에 정신이 팔린 거목들, 이 세계의 신들은 당황하며 현찬의 존재를 인식했다.
[무, 무슨!]
[다른 녀석도 있었던 건가?!]
그들이 무언가 반응해보기도 전에 현찬이 더 빨리 움직였다.
리쿠르드족을 상대할 때 선보였던 힘.
여신 아테나의 권능이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그 모습을 드러냈다.
<심판의 창>
하늘이 쩍 갈라지며 하늘에서 거대한 빛의 창이 떨어져 내렸다. 현찬의 남은 마력을 몽땅 때려 박은 일격이었다. 리쿠르드족에 사용했던 창보다 그 크기가 몇 배는 더 거대했다.
창날 길이만 200m, 창끝에서 끝까지의 길이만 킬로미터 단위가 넘는다. 폭 또한 수십 미터에 달한다. 그것이 정화가게 악신회 세 신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이, 이이 빌어먹으으으을!!”
세트의 괴성이 여기까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현찬은 창이 떨어져 내리는 광경을 보며 게이트로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