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
153화 이간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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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악신회 신들을 공격하는 자들은 리쿠르드족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리쿠르드족이 갈색 피부를 지녔으며 인간의 외양과 비슷했다면 이들의 피부색은 더 칙칙하고 어두운 회색이었다. 성별은 구분할 수 있었지만, 머리카락이 없이 전부 민머리였고 커다란 눈동자는 전부 흰색이었다.
그들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독특한 무기를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까드득!
놈들의 손끝이 기괴하게 뒤틀리며 늘어나더니 하나의 화살이 되었다. 그것을 활시위에 걸고 당기자 조금 전처럼 허공에 수백 발이 넘는 화살들이 동시에 악신들을 향해 빗발쳤다.
“이런 열등한 것들이 감히!”
세트는 현찬을 앞에 두고 갑작스레 등장한 이상한 녀석들에게 방해를 받자 분노를 터뜨렸다. 그가 손을 휘젓자 지면이 지진이 일어난 듯 떨리더니 이내 땅에서 모래가 솟아올라 주변에 단단한 벽을 만들었다.
고밀도로 압축된 모래는 그 강도가 금속의 강도를 웃돈다. 세트의 신력이 깃든 모래이니 단단함은 그 이상이었다. 징그러운 입의 모양새를 한 화살촉은 입을 벌리다가 모래 벽에 막혔다. 모래 벽은 끊임없이 회전하며 화살들을 잘게 갈아버렸다.
‘젠장! 대체 왜 이 자식들은 저 녀석을 공격하지 않는 거야!’
세트는 눈살을 찌푸리며 거목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현찬을 노려보았다. 첫 만남에서 현찬을 내려다보던 세트는 지금 현찬을 올려다보는 상황에 부닥쳤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현찬을 찢어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현찬과의 거리는 상당히 멀었고 무엇보다 현찬을 향해 다가가는 걸 이계인들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런 빌어먹을!”
세트가 자신 주변에 세운 모래 벽에 공격이 막히자 이계의 존재들은 화살을 거의 수직으로 쏘아 올려 곡사포처럼 신들의 정수리를 노렸다. 그 공격에 보통 신들이라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겠지만, 악신회에 소속된 신들은 달랐다.
‘귀찮게 됐네요.’
오로치는 혀를 찼다.
어둠 속에 느껴지는 기척만 해도 500명이 넘었다. 게다가 하나하나 모두 숙련된 전사들이다. 녀석들이 이쪽을 노리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귀찮은 일이었다. 그런데 놈들은 이계 존재들답게 기괴한 방식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손가락이 화살로 변하는 것도 놀랍지만, 그것에 입이 달려서 목표물을 물어뜯으려고 하다니. 어떻게 된 능력인지요.’
저런 녀석들 따위 몇천이 덤벼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들이 제대로 권능만 발동할 수 있다면 말이다.
‘다른 세상에서 멋대로 권능을 사용할 수는 없는 게 크네요.’
원래라면 자신들과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할 열등한 녀석들이다. 그러나 오로치와 아수라, 세트가 지금 안고 있는 페널티가 그들의 여건을 매우 불리하게 만들었다. 일단 그들이 육신의 형상으로 하계에 내려온 것이 컸다.
이 육신은 그들이 지닌 본신의 힘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다. 권능을 사용하더라도 그것이 지닌 본래 힘의 일부 밖에 안 되는 것이다. 물론 그래도 엄청나게 강하지만, 원래 지닌 힘과 비교하면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이계의 신들의 눈치 때문에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어요.’
이미 세트는 일부 권능을 사용했다. 오로치와 아수라는 아직 발동시키지 않았지만, 세트 혼자서라도 권능을 사용한 것만으로도 그들이 겪는 압박감은 상당히 크다는 사실을 대변했다. 이 차원은 일종의 의지를 품고서 그들을 억누르고 있었다.
여기서 권능을 더 사용하는 순간 그들을 억누르는 압박감은 훨씬 더 강해질 것이다.
무엇보다.
‘저 이상한 기운을 내뿜는 나무. 매우 거슬리네요. 저게 이쪽의 움직임을 묶고 있어요.’
현찬이 밟고 서 있는 나무는 특이했다. 다른 거목들이 풍부한 생명력을 바탕으로 주변에 많은 것들을 만드는 반면, 저 거목만이 주변의 모든 생명력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신의 분신이라 하더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저 나무에서 느껴지는 신격을 생각하면, 이 세계에서 가지는 신격이란 각자 거목이 품고 있는 것이 틀림없겠군요. 그리고 다른 나무들과 다르게 주변을 황폐하게 만든다는 건 저 나무의 신격이 우리와 같은 악신 계열이라는 것.’
악신은 성격이 더럽다. 특히나 같은 계열의 악신이라 하더라도 사는 세계가 다르다면 사이는 더욱 안 좋다. 그들의 기본적인 성향이 그러하다. 같은 악신에게 동료 의식 따위는 없다. 마음에 안 들면 전부 적이다.
육신으로 현신한 이상 이쪽도 큰 피해를 보면 전투 불능 상태가 된다. 저런 열등한 녀석들의 공격일지라도 닿기만 해도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에 더해서 이 세계 자체가 주는 압박감과 저 거목이 풍기는 부정적인 기운, 권능 발현을 제한받는 상황까지 있다.
‘여기로 넘어오면서 혹시나 하며 예상했던 상황이지만 막상 겪어보니 더 심각하군요.’
다른 두 신들은 느끼지 못했지만 오로치는 느꼈다. 이 모든 상황이 마치 누군가가 노려서 계획하기라도 한 것처럼 아주 잘 짜여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 일을 벌인 주인공이 여전히 거목의 위에서 카두케오스 지팡이로 황금빛을 뿜어내는 현찬이라는 것을.
세트는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모래 벽을 이용해 막으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이 하찮은 것들은 대체 왜 우리만 공격하는 건데! 저기 대놓고 황금빛을 뿌리는 녀석은 신경 쓰지 않는 거냐!”
“아마 저 빛 자체가 저자의 능력일 가능성이 큽니다.”
“뭐?”
오로치의 말에 세트는 모래로 사방을 둘러싸는 벽을 만들면서 그에게 반문했다. 오로치는 눈을 가늘게 뜨며 현찬을 살폈다.
“헤르메스의 능력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는 경계를 넘어서 다양한 자들과 계약을 맺습니다. 목동들과 도둑의 수호신이기도 하죠. 정보를 전달하고 읽기도 하죠. 전령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게 뭐? 전투에 도움 안 되는 능력들뿐이잖아!”
“도움은 안 되죠. 하지만 그 권능의 범위가 말도 안 될 정도로 광범위하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신비한 신발로 하늘을 날아다니고 기묘한 모자로 정보를 읽어내며, 만물을 꿰뚫는 눈으로 운명도 엿봅니다. 무엇보다 저 지팡이는 파괴와 재생을 상징하는 뱀의 힘을 지닌 신기입니다. 저 인물들에게 단체로 환각을 보여주는 건 일도 아니죠.”
“쳇. 최면과 세뇌라는 건가.”
그렇다면 저 이계 종들이 현찬을 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가만히 있던 아수라는 손에 쥔 검에 힘을 주었다. 까드득! 검과 손아귀가 맞물리며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토했다.
“어떻게 하든 상관없다.”
아수라는 모래의 벽 밖으로 걸어 나갔다.
“상대가 꼼수를 부리고 함정을 파도 우리는 신이다. 고작 저런 하찮은 간계에 당할 정도로 약하지 않다는 말이다.”
아수라는 언제나 목숨을 거는 치열한 싸움을 반복해왔다. 그리고 아수라의 왕은 그런 아수라의 정점에 선 투신이었다. 그가 바라는 것과 그가 할 줄 아는 것은 오직 피를 뿌리고 살을 가르는 맹렬한 투쟁이었다.
“우리는 신이다. 저런 녀석들에게 얕보여서는 안 된다.”
모래 벽 바깥으로 나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공격들이 가해졌다. 이빨이 달린 화살들이 아수라를 노리고서 사방에서 들이닥쳤다. 아수라는 그 모습이 하찮은지 코웃음을 쳤다. 고작 저런 이쑤시개 같은 거로 무슨 공격을 하겠다는 건가.
“잘 봐둬라. 열등한 녀석들아.”
아수라가 여섯 개의 팔을 움직였다. 그의 손에 쥐어진 자색육도가 더욱 싸늘한 빛을 내뿜으며 크기를 키워나갔다. 손에 쥔 검의 길이가 약 5m에 도달했을 때 그리고 허공을 가득 채운 화살들이 아수라의 지척까지 접근했을 때 그가 움직였다.
콰아아아아!
아수라의 몸이 잔상을 남기며 빠르게 회전했다. 주변에 보랏빛 폭풍이 휘몰아쳤다. 그것은 순식간에 화살들을 갈아버리고 그 크기를 키워나가며 공터 바깥의 숲에서 잠복 중인 이계인들에게 마수를 뻗쳤다.
콰가가가각!
나무와 바위가 힘없이 갈려 나가고 채 자리를 피하지 못한 이계인들은 마치 믹서기에 갈리는 토마토처럼 변해 폭풍과 하나가 되었다. 그 광경을 본 오로치는 고개를 저었다. 결국, 제한을 넘어선 힘을 발휘하고 말았다.
‘이렇게 된 이상 남은 건 정말로 속전속결뿐이군요.’
이래서 저렇게 무력만 앞세워서 행동하는 녀석들과 함께 움직이는 건 싫다. 하지만 좋으나 싫으나 이미 한 배를 탄 몸이다. 오로치는 한숨을 내쉬면서 아수라를 지원해주기 위해 신력을 모았다.
아수라는 고개를 들어 현찬을 노려보았다. 아수라의 3개의 얼굴 속 여섯 개의 눈동자가 현찬의 모습을 담았다. 현찬도 아수라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눈을 마주 보았다. 그러면서도 현찬은 카두케오스 지팡이를 집어넣지 않았다.
“놈. 어서 그 간교한 지팡이를 집어넣고 무기를 들어라.”
그는 현찬이 창과 방패를 쓴다는 사실을 알았다. 전사이자 진정한 영웅이라면 저렇게 세뇌를 거는 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터. 이것은 아수라가 현찬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이자 자비였다.
그러나 현찬은 보란 듯 지팡이에서 강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아수라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현찬의 반항이자 도발이었다.
아수라의 3개의 표정이 전부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고통스러운 죽음을 재촉하는구나! 내게 더 자비를 바라지 마라!”
아수라가 지면을 박차고 현찬을 향해 대포 쏘듯 쏘아져 나갔다. 떨어진 거리만 해도 수백 미터가 넘었지만, 아수라에게 그 거리는 그저 한걸음에 달려나갈 수 있는 거리였다. 아수라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자색 검기가 더욱 선명하게 불타올랐다.
아수라의 검. 닿는 순간 모든 것을 베어버리는 무시무시한 일격이 무려 6개나 된다.
그것이 전부 현찬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찬은 아수라가 가까이 접근했음에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수라는 그 모습에 눈썹을 씰룩였다.
‘웃어?’
가까이서 본 현찬의 표정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분명히 웃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계획이 성공했다는 것처럼.
아수라도 무언가 느꼈다. 지금까지 수많은 전장을 넘어온 그의 본능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맹렬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이건 대체 무슨…….’
그것을 채 느끼기도 전에, 아래에서 무언가가 엄청난 속도로 날아왔다. 그것을 그냥 맞아줄까 생각했지만, 다가오는 기세만 보아도 위력이 만만치 않았다. 아수라는 결국 현찬을 향한 공격을 멈추고 검을 교차시켜 공격을 막아냈다.
‘뿌리?’
그건 거대한 뿌리였다. 아수라는 뒤로 튕기는 몸을 허공에서 뒤틀어 바닥에 안전하게 착지했다. 아수라를 노린 건 거대한 나무의 뿌리였다. 그리고 그 뿌리가 어떤 나무의 것인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움직일 수도 있었단 말인가!’
저 불길한 거목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다른 나무들과 다르게 기둥이 검었고 나뭇잎의 색깔도 싱그러운 푸르름보다는 어둡고 칙칙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주변의 숲의 생명력을 빨아들여 자신의 힘으로 삼는 영향력도 거기에 한몫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뿌리를 움직이기까지 하다니.
현찬은 나무의 가지에서 아수라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내가 고작 저런 오합지졸들을 세뇌하려고 이 지팡이를 꺼낸 줄 알아?”
리쿠르드족과 비슷하면서 다른 종족인 ‘라쉬칼족’은 현찬에게 별 감흥이 없는 녀석들이었다. 그들을 활용한 것은 단 하나. 그저 시간을 끌기 위해서였다. 그들을 다루는 건 쉬웠다. 저들에게 광역 최면을 걸 필요도 없이, 자신은 인식 못 하게만 했을 뿐이었으니까.
만약 현찬과 적대한 상황이었다면 최면이 쉽게 먹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라쉬칼족은 현찬의 존재를 모르는 상태에서 오로지 악신회의 존재만을 인식했다. 라쉬칼족의 적의가 어디로 향할지는 불 보듯 뻔했다.
현찬은 그저 라쉬칼족의 분노에 약간의 윤활제를 첨가하여 그들의 등을 떠밀어줬을 뿐이다.
한편 현찬이 노린 진정한 목적은 라쉬칼족의 공격이 아니었다.
현찬이 이 상황을 끌어낸 이유는 바로 이 불길한 거목의 능력을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저들이냐? 나의 영토에 침범하여 나에게 반기를 드는 존재들이.]
“네 그렇습니다. 위대한 분이시여. 이 미천한 존재가 고개를 숙여 그것이 진실임을 알리나이다.”
[흥. 인간 주제에 보는 눈은 있구나. 크큭. 그래. 감히 저 버러지 같은 녀석들이 나에게 반기를 들었단 말이지? 내가 오랫동안 가만히 있었다 한들, 너무 우습게 보였군.]
현찬은 겉으로는 거목의 말에 맞장구치면서 속으로는 녀석을 비웃었다.
‘멍청하긴. 이래서 싸우는 걸 좋아하는 악신들은 안 돼. 너무 쉽게 낚이잖아.’
현찬은 헤르메스와 아테나의 힘을 싹 숨긴 채 거목에게 말했다.
저놈들이 나쁜 놈들이라고. 이 숲에서 일어나는 소동도 쟤들 탓이고 무엇보다 이 거목을 우습게 여기고 당당하게 오고 있다고 말이다.
그렇다.
현찬은 이계에서 신격을 지닌 거목과 악신회를 이간질해 싸움을 붙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