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
151화 악신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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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찬은 침묵을 고수한 채 세트를 올려다보았다.
이집트의 신 <세트>.
고대 이집트 핵심적인 아홉 명의 신 중 하나다.
세트는 사막과 이방인들의 신이며 모래바람을 일으키는 신으로 추앙받는다.
고대 이집트에서 숭상하던 신이지만, 문제는 그는 괴물이나 악신이 별로 등장하지 않는 이집트 신화에서 거의 유일한 악신이라는 점이었다.
그의 이름 세트가 지닌 의미는 ‘혼란을 부추기는 자’ 혹은 ‘황폐하게 하는 자’이다.
그는 호루스와 충돌하였고 형제인 오시리스마저 살해했다. 그로 인해 ‘혼란을 부추기는 신’에서 ‘악신’으로 정의되었다.
신화 속에 언급된 세트의 강한 능력은 여타 이집트 신들과 비교하면 매우 상위권에 속한다. 그에게 붙은 수식어 중 하나가 ‘가장 위대한 강력함’이기도 했으며 태양신 라를 도와 괴물 아포피스를 몰아낸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런 존재가 하계에서 계약자라는 매개와 도움도 없이 자신의 육신을 유지한 채 내려왔다.
본래 육신의 힘과 비교하면 지금의 세트는 더 약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약해졌더라도 세트는 신이다. 각성하여 강해진 인간보다 훨씬 더 강한 존재라는 소리였다.
“뭣 하느냐. 어서 내 앞에 무릎을 꿇지 않고.”
세트는 현찬이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렸음을 직감했다. 그는 현찬이 자신의 앞에 당연히 무릎을 꿇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현찬은 오히려 보란 듯이 몸을 올곧게 편 채 세트를 노려보았다.
“…… 건방진 놈이구나.”
“애석하게도 단 한 명의 신에게 무릎 꿇기에는 내가 짊어진 신들이 그렇게 가볍지 않거든.”
“흥. 그래, 네놈도 역시 신들과 계약 맺은 선택자 중 하나였지. 어쩐지 익숙한 얼굴이 보이는구나. 비록 이집트 신화가 아닌 다른 신화 속에 나오는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현찬의 등 뒤로 헤르메스와 아테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트는 날카로운 눈매를 더욱 가늘게 좁혔다.
“그것도 무려 둘이나.”
과연 이집트의 핵심적인 신 중 하나이자 강력한 무력을 지닌 세트다웠다. 그는 이미 현찬이 두 신과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영령을 볼 정도의 눈을 지녔다는 건 세트의 힘과 권능이 그만큼 높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뭐지? 계약자와 계약을 맺었나? 이상해. 누군가와 계약을 맺은 흔적을 찾을 수 없어.]
헤르메스는 세트의 상태를 알아보았다. 헤르메스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졌다. 그는 계약의 신이다. 상대 신이 누구와 계약을 맺었는지 대략적이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헤르메스의 권능>에도 불구하고 세트는 계약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는 건 단 하나.
세트는 계약자 없이 직접 하계로 자신의 힘을 가지고 내려온 것이다.
“흥. 내가 열등한 인간 따위와 계약을 맺을 것 같나? 보아라.”
세트는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 주먹을 쥐었다. 허공에서 갑자기 생성된 짙은 황색 모래가 그의 손 주위에 뭉쳤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단순히 모래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신력은 매우 흉흉한 것이었다.
“나는 인간에게 종속되지 않고 나의 권능을 발휘할 수 있다. 네놈들처럼 하찮게 열등한 녀석들과 손을 잡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 대체 어떻게?”
영령이 하계에서 힘을 쓰기 위해서는 ‘각성자’라는 매개체가 필요하다. <대통합>이 완전히 끝난 지금은 영령 세계와 하계에 경계가 매우 흐릿해졌지만, 두 세계는 여전히 구분되어 있었다.
‘아무리 신이라고 하지만, 저렇게 페널티 없이 하계에서 다니는 건 불가능해.’
신급 영령의 힘이라면 하계에 자신의 힘을 내려보낼 수 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혼자서 내려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다른 신의 도움을 받아야 지닌 힘의 극히 일부를 지닌 채 내려올 수 있었다.
하지만 세트는 그런 존재들과 어딘가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지금 세트가 취한 모습은 신화 속에 속한 세트의 모습과는 달랐다. 아누비스와 비슷하게 짐승의 머리를 지녀야 할 그는 인간 형상을 하고 있었다.
현찬이 자신에 관해 파악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세트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갈색 피부와 상반되는 색의 새하얀 이는 짐승의 이빨과 비슷하게 톱날처럼 날카로웠다.
“크큭. 세상이 네가 알고 있는 정보만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나? 네놈이 알고 있는 세계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나마 다른 인간과 다르게 더 많은 것을 아는 것 같지만, 여전히 인간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구나.”
“그렇다 해도 네놈 혼자서 내려왔을 리는 없겠지.”
아무리 <대통합>이 끝난 세계라고 할지라도 신이 함부로 하계에 내려올 정도로 기존의 인과율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에 걸맞은 대가를 치르지 않은 이상 말이다.
“그래. 대충 상황을 파악해보니 아포피스를 하계로 내려보낸 것도 너희 짓이겠지?”
“오. 애송이 녀석 주제에 눈치는 상당히 빠르구나. 그 날쌘돌이 전령의 계약자라서 그런가? 아니면 ‘세계의 선택자’라서 그런가. 그중에서도 네놈은 특히나 유별나구나.”
재밌군. 현찬을 향한 세트의 시선이 조금은 더 유해졌다.
그렇다 해도 인간을 경멸하는 눈빛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그저 벌레를 보는듯한 눈빛에서 조금 나은 정도로 바뀌었을 뿐.
‘그보다 세계의 선택자? 그건 또 뭐지?’
세트는 중간중간 현찬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현찬으로서는 그것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상대는 헤르메스와 동급 신이기 때문에 <헤르메스의 눈>을 통한 탐색과 분석도 먹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쪽은 내가 모르는 정보를 더 많이 알고 있어. 일단 대화를 더 이끌어 나가본다.’
계속 이야기를 주워듣다 보면 나름 정답을 추론할 수 있는 정보가 충족될지도 몰랐다.
“그래서, 내게 접근한 목적은 뭐지?”
현찬은 세트가 자신과 싸우러 온 게 아님을 눈치챘다. 만약 싸우러 왔다면 이런 무의미한 대화를 나누는 걸 하지 않고 바로 공격을 날렸을 것이다.
현찬의 질문에 세트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애송아. 우리가 속한 악신회에 들어와라.”
“…… 이름만 들어도 불길하기 짝이 없군.”
악신회(惡神會)라는 이름만 들어도 도저히 좋은 요소가 보이지 않았다. 저 이름만 들어보면 세트를 제외하고도 무수한 신화 속 악신들이 소속되어 있을 것 같다. 그렇다는 건 세트와 마찬가지로 계약자가 없이 하계에 내려온 존재가 더 있다는 소리다.
“계약자도 없이 신들이 하계에 내려와 조직을 이루다니. 놀랄 일이야.”
[하계에 내려왔다고 해도 본신이 지닌 힘에 비하면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겠지만 말이지.]
[그렇다는 건, 저들의 배후에 다른 누군가가 존재할 수 있다는 거로군.]
아테나의 말에 현찬은 문득 에르카닐이 떠올랐다. 어쩌면 악신회의 배후에 에르카닐을 지원해준 자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미쳤다. 정확한 증거는 없는 추론이었지만 마냥 뜬소문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악신회에 들어올 건가? 말 건가?”
“내가 만약에 들어가기 싫다면?”
“내게 건방지게 굴었던 것까지 쳐서 대가를 치러야겠지.”
세트 주위로 모래바람이 점점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세트는 현찬을 보며 흉포하게 웃었다. 현찬의 머릿속에 세트를 상징하는 짐승이 떠올랐다.
먹잇감을 봐주지 않고 물어뜯는 하이에나 말이다.
현찬도 그런 세트를 보며 웃었다.
“하하.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나? 그래서, 어떻게 할 거지?”
“어차피 이렇게 될 거 알았으면서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현찬은 왼손에 아이기스를 쥐고 오른손에는 창으로 변한 테레이오스테를 쥐었다.
“잔말 말고 빨리 덤벼. 나도 바쁜 몸이야.”
“푸하하하! 건방지구나!”
세트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순식간에 분위기가 반전됐다. 그의 몸에서 인간으로서 감당할 수 없을 만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조금 전까지 실실 웃던 표정은 차가운 빙해처럼 냉기를 풀풀 풍겼다.
“…… 그렇게 바란다면, 죽여주마.”
현찬은 방패를 세워 세트의 공격을 방어하고자 했다. 그러나 세트는 바로 덤벼들지 않았다. 살기를 풀풀 풍기면서 지금 당장이라도 저 강렬한 모래바람으로 현찬의 몸을 찢을 기세를 뿜었지만, 그는 가만히 있었다.
‘뭐지?’
현찬이 의아해하는 순간 하늘에서 새로운 기척들이 빠른 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현찬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런 현찬의 모습을 보며 세트가 입꼬리를 올리며 비릿하게 웃었다.
“내가 언제 혼자서 싸운다고 했나?”
세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현찬의 주위로 두 명의 인영이 추가되었다.
“키리릭. 저자가 그 강현찬이라는 자인가요? 인간치고는 상당히 강한 힘이 느껴지는군요.”
창백한 피부에 호리호리한 몸매를 지닌 남자였다. 눈이 가늘고 길게 찢어져 있었으며 머리카락은 깔끔하게 올백으로 넘겼다. 어딘지 정갈한 모습의 비서를 연상케 했지만 가느다란 눈동자 사이로 보이는 파충류의 동공같은 눈동자와 입술을 핥는 뱀의 혀는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일본 신화에서 나오는 괴물 <야마타노오로치>.
“상대가 누구라도 중요하지 않다. 적은 그저 찢어 죽인다.”
다른 한쪽은 매우 험상궂은 거한이었다. 세트보다도 덩치가 더 컸다. 자세히 보면 양어깨 위로 팔이 한 개씩 더 튀어나와 있었다. 흉흉한 그의 눈동자에는 푸른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고 그의 양 볼에는 다른 얼굴이 더 튀어나와 있었다.
인도 신화의 괴물 <아수라의 왕>.
둘의 정체를 파악한 현찬은 눈살을 찌푸렸다. 세트 하나도 상대하기 귀찮은데 여기서 둘이나 되는 악신이 더 추가되었다. 저쪽의 숫자가 셋이라면 현찬으로서도 상대하기 위험했다.
‘여기서 싸웠다가는 이곳에 있는 리쿠르드족은 모두 죽겠군.’
그렇다고 저들을 지키겠다고 막아줄 생각은 없었다. 이때까지는 기껏 죽이지 않았지만, 악신과의 싸움에 휘말려 죽게 된다면 그건 저들의 운이 없는 것이다. 중요한 건 지금 현찬도 자칫 잘못하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인간아. 눈을 굴리지 마라. 네놈의 그 빠르게 굴러가는 눈동자는 먹으면 얼마나 달콤할지 궁금해지잖니?”
“네놈의 간계는 먹히지 않는다. 우리 셋이 나선 이상, 네놈은 확실하게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다.”
야마타노오로치와 아수라의 왕도 세트에 버금가는 신화 속의 괴물이자 악신이다.
현찬이 아무리 헤르메스, 아테나와 계약을 맺었다고 해도 단순히 싸움을 맞붙는 인원의 수로 따지면 현찬이 불리했다. 심지어 저들은 어떤 방법을 이용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계에서도 어느 정도의 본신 힘과 권능을 부릴 수 있는 자들이었다.
‘하.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이런 위기 상황은 오랜만이었다. 현찬은 전투에 귀찮음을 느꼈지만, 가슴이 거세게 뛰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되면 어울려 줄 수밖에 없잖아.’
도망친다고 하더라도 저들이 쉽게 보내줄 것 같지 않았다.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적어도 다른 오버랭크 헌터가 도우러 와야 했지만, 그들이 지금 이 자리에 올 리도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나만의 방법으로 싸울 수밖에 없겠어.’
현찬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세를 낮추며 돌격할 자세를 취했다. 현찬이 겁먹지 않고 싸우려 들자 세 악신은 모두 눈썹을 꿈틀거렸다. 용기는 가상하지만, 감히 하찮은 인간 따위가 자신들에게 저항하려고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 어디 한번 와 보거라!”
세트의 외침과 함께 현찬이 자리를 박차고 정면으로 달려나갔다. 세트가 있는 방향이었다. 현찬의 움직임은 쏜살같았다. 방패를 든 채 돌진하며 창을 내지르는 기법은 고대 그리스의 병사들이 보여주던 쉴드 차지와 흡사했다.
세트는 모래바람을 강하게 일으켜 현찬을 집어삼키려고 했다. 이 거센 폭풍을 뚫을 수 있으면 뚫어보라는 여유가 있었다.
“응?”
그러나 현찬은 직선으로 쭈욱 달리다가 갑자기 방향을 수직으로 꺾었다. 악신들은 그런 현찬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허를 찔려 대비하지 못했다.
그렇게 현찬은 리쿠르드족이 넘어온 게이트로 쏙 들어가 버렸다.
“…….”
“…….”
“…….”
세 악신은 서로 합의라도 한 듯 현찬이 사라진 게이트를 멍하니 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