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
150화 완벽한 대비 (3)
_
“끄, 끝난 건가?”
“방금 그건 대체 뭐였던 거야?”
뒤로 빠르게 대피했던 헌터들은 주변이 잠잠해지자 하나둘 싸움터로 돌아왔다.
현찬이 싸움에 참여하자마자 헌터들은 사전에 합의한 대로 바깥으로 물러났었다. 그들이 도망가면서 마지막으로 본 건 환한 빛을 내며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창이었다.
‘미친! 저게 가능한 거야?’
‘<헤르메스> 계약자인데 어떻게 다른 높은 급의 신 계약자들보다 더 강하냐.’
현찬이 <아테나>와도 계약을 맺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현찬의 강함이 규격 외 능력처럼 느껴졌다. 현찬이 그들의 동료이자 믿음직스러운 아군이라서 다행이지 만약 적으로 마주한다면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강현찬 헌터님. 무사하십니까?”
기지 지휘관이 현찬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그는 그렇게 물어놓고 아차 했다. 현찬은 어떠한 상처도 입지 않았다. 주변에는 리쿠르드족이 전부 기절한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아. 저는 괜찮습니다.”
“아, 그, 그러시군요.”
지휘관은 현찬의 멀쩡한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감탄했다.
‘조금 전 공격에 마력을 많이 소모했을 텐데. 그런데도 저렇게 여유가 넘치는 표정이라니.’
지휘관은 현찬이 일부러 힘든 걸 숨기며 필사적으로 자신의 강함을 과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무려 강원도를 총괄하는 기지의 지휘관이며 많은 전투를 치러온 베테랑 헌터다. 따라서 그는 절대 타인을 함부로 판단할 인물이 아니다.
‘딱 봐도 정말로 멀쩡한 거야. 믿기지 않는군. 조금 전 그 공격으로 인해 필시 마력의 소모가 장난이 아니었을 텐데 저렇게 여유롭다고? 대체 마력 보유량이 얼마나 되는 거야?’
헌터들이 처치하지 못해 애를 먹던 리쿠르드족을 일거에 쓸어버린 공격이다. 더 놀라운 건 그만한 공격이 가해졌음에도 주변에 여파가 전혀 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버랭크 헌터는 자연 재해급 위력을 발휘한다. 그들이 나서서 싸우는 순간 주변 일대는 박살 난다. 아무리 튼튼하게 지은 기지라고 할지라도 현찬이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부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현찬이 선보인 그 거대한 공격은 리쿠르드족들을 전부 기절시켰을 뿐 주변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다. 기지도 멀쩡하게 있었고 숲의 나무나 지면도 멀쩡했다. 도저히 조금 전 거대한 창이 떨어진 자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풍경이었다.
“저기요?”
“네, 넵!”
지휘관은 현찬의 부름에 겨우 정신 차렸다.
“여기 쓰러진 녀석들을 모두 생포해주세요. 제 공격을 맞고 죽은 녀석들은 없을 테니까 깨어나기 전에 붙잡으셔야 할 거예요. 저는 더 할 일이 있어서 도와주지는 못하겠네요.”
“아, 아뇨. 이렇게까지 해 주셔도 충분합니다. 저 그보다, 더 할 일이 있다는 건 무슨 말씀이신지?”
“말로 하는 것보다는 직접 보시는 게 편하겠죠.”
현찬이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키자 지휘관은 신음을 낼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아직 가시지 않은 밤의 어둠에 섞인 리쿠르드족이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지휘관은 현찬의 근처에 쓰러진 여성 리쿠르드족 아렌디르를 바라보았다.
‘그렇군. 아직 넘어오는 녀석들이 더 있었고 무엇보다 지금 자신들의 대장이 포로가 될 상황에 부닥쳤으니 더 격하게 덤벼든다는 건가.’
하지만 이미 태반이 넘는 리쿠르드족이 현찬에게 처치당했다. 잔당은 이쪽이 힘만 합친다면 어떻게든 쓸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지휘관이 그런 생각을 품은 순간 현찬이 뻗은 창대가 그의 눈을 가렸다.
“여기는 제게 맡기고 여러분들은 기절한 적들을 먼저 수습해 주세요.”
“하, 하지만 강현찬 헌터님 혼자 싸우게 놔둘 수는…….”
“괜찮습니다. 애초에 적들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서요. 괜히 다른 헌터들까지 싸움에 나섰다가 기절한 녀석 중 회복력이 좋아 정신을 차리는 녀석이 있게 되면 상황은 다시 난전이 될 겁니다. 그것을 막으려면 저 혼자서 나서도 충분해요.”
현찬은 헌터들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새로 발명한 무기의 위력도 제대로 보았다. 이 무기라면 앞으로 다른 차원 적들의 침입에도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확인은 끝났으니, 여기서 이제 내가 빠르게 끝내야지.’
현찬이 창대를 잡고 앞으로 나서자 어둠 속에 숨어있던 리쿠르드족이 움직였다.
‘음?’
바로 달려들 것처럼 눈동자에 살기를 품은 녀석들은 현찬이 접근하자 등을 돌려 달아났다. 현찬은 의아해하면서도 녀석들의 뒤를 빠르게 쫓았다.
[도망치는 건가?]
[아니.]
<헤르메스>의 말에 <아테나>가 고개를 저었다.
[유인하는 거다.]
<아테나>의 말대로 적들은 현찬을 유인하고 있었다. 현찬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놈들의 의도대로 움직여준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이유는 현찬이 놈들의 유인에 걸리지 않을 때 녀석들은 결국 모든 걸 포기하고 뿔뿔이 흩어져 강원도 전역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타고난 암살자들인 리쿠르드족이 민간인 거주 구역에 들어서는 순간 큰 인명피해가 날 것이다.
녀석들은 빠르고 은밀했기 때문에 바퀴벌레처럼 흩어지면 일일이 다 찾아서 잡는 데 긴 시간이 걸린다. 현찬은 그 사태를 막고자 녀석들을 따라갔다.
그리고 무엇보다 두 번째 이유는.
“내가 이런 함정에 당할 리가 없잖아?”
놈들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힘으로 부수면 그만이었다. 무엇보다 놈들은 이미 대장을 잃었다. 기본적으로 전투력이 뛰어난 전사들인 만큼 어리바리한 일은 없겠지만, 주된 전력이 당한 이상 현찬에게 제대로 된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현찬이 숲을 가로지르며 내달리는 중 커다란 공터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빛의 기둥과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공터의 중심에는 사람 하나가 통과할 만한 크기의 푸른 게이트가 생성되어 있었다.
‘저기를 통해서 녀석들이 넘어온 건가.’
하지만 게이트는 아무것도 토해내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녀석들이 이미 게이트를 통해서 자신들의 세계로 도망간 것 같지도 않았다. 현찬이 자리에 멈춰선 순간 바닥에서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손에 쥔 단검이 현찬의 발목을 노렸지만, 현찬은 그것을 가볍게 점프해서 피해냈다.
현찬이 공중에 뜬 그 짧은 시간은 상황을 지켜보던 암살자들에게 최적의 기회였다.
나무의 그림자와 숲의 어둠에 숨어있던 리쿠르드족이 일제히 현찬에게 달려들어 무기를 뿌렸다. 360도 전 방향에서 날아오는 무기들을 보며 현찬은 피식 웃었다.
“고작 한다는 게 이게 전부야?”
채채채채채챙!
현찬의 창이 빛살처럼 움직이며 수백 개가 넘는 모든 무기를 쳐냈다. 현찬이 짧게 허공에 떠 있다가 바닥에 떨어지려는 순간 지면 속에 숨어있던 리쿠르드족이 현찬을 재차 노렸다.
“흥.”
현찬은 착지와 동시에 발에 힘을 주어 지면을 강하게 찍었다. ‘쿠웅!’ 거대한 진동이 지면을 타고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숲이 일순 크게 흔들렸고 나무들이 몸을 잘게 떨었다.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땅 밑에 숨어서 현찬을 노리던 리쿠르드족은 모두 기절했다. 녀석들이 기절하자 <암흑의 길> 스킬이 사라졌고 물질을 통과하지 못한 녀석들이 모두 지면에서 튀어나와 바닥을 뒹굴었다.
“치잇!”
“모두 한 번에 덤벼!”
숨어있던 리쿠르드족이 현찬을 향해 일거에 달려들었다. 현찬은 오히려 녀석들의 그런 행동을 반겼다. 녀석들이 도망치지 않고 함께 덤벼드니 귀찮게 하나씩 상대할 필요를 덜었다.
현찬이 손에 쥔 창끝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날카로운 창날은 현찬의 주위에 등불이 켜지듯이 하나둘 나타났다. 창날 수는 빠르게 늘어나 100개가 넘어갔다. 리쿠르드족은 지금 자신이 보는 게 현실인지 환상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현찬의 팔은 가만히 있는데 창날만 그 수가 늘어난 것이다. 도저히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현찬이 손에 힘을 주어 창대를 밀어내자 현찬의 주위로 포진한 창날이 사방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야말로 극도로 높은 수준에 달한 창술 공격에 리쿠르드족은 반항 못 하고 모두 창에 찔려 바닥을 나뒹굴었다. 현찬은 그 와중에도 녀석들의 급소는 모두 피해서 찔렀기에 사망자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크으윽!”
“윽!”
주변에 리쿠르드족의 신음만 가득했다. 타고난 전사인 이들은 어지간한 공격을 당해도 그 고통을 무시하며 적에게 달려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상하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현찬에게 찔린 상처 부위가 너무 아팠기 때문이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리쿠르드족은 하나도 없었다.
“크윽! 주, 죽여라!”
현찬의 발 근처에 쓰러진 한 남성 리쿠르드족이 치욕스럽다는 표정과 함께 그렇게 외쳤다. 그들은 그들의 언어를 사용했지만, 현찬은 헤르메스의 권능 덕분에 무슨 말인지 전부 알 수 있었다.
현찬이 고개 숙여 그와 눈을 마주쳤다.
“죽여? 내가 왜?”
“무, 무슨? 우리 언어를 어떻게…….”
“내가 너희를 살린 이유는 몇 가지 정보를 캐기 위해서야. 대체 무슨 목적으로 우리 쪽에 쳐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용할 수 있는 건 다 이용해 줄 생각이지.”
“그럴…… 수가.”
리쿠르드족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현찬은 고개를 들어 자그마한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리쿠르드족이 사는 세계와 연결된 게이트. 저건 몬스터들이 사는 게이트와 다르게 부술 수 없다.
저걸 부수려면 안쪽에 있는 세계를 없애야 하는데 그 세계가 몬스터가 사는 게이트가 아닌 지구에 맞먹는 하나의 행성이라는 것이 문제다. 결국, 저 게이트는 저대로 유지 시킬 수밖에 없었다.
‘예전처럼 <제우스>의 힘을 빌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제우스>의 힘으로 <심연>과 통하는 문을 부순 건 아직 <대통합>이 완전히는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통합>이 벌어졌고 결국 세계와 세계들은 서로 연결이 되었다.
그것을 강제로 끊기 위해서는 <제우스>의 힘으로는 부족하다.
그러니 이 게이트는 일단 가만히 놔둘 수밖에 없었다. 물론 주위에 경계의 인원을 배치해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야 하는 건 빼먹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슬슬 나오지그래?”
“오호. 다 알고 있었다 이건가?”
목소리는 하늘에서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낸 존재는 허공을 부유하며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러다 그는 일정 높이 아래로 내려오지 않고 그대로 공중에 떠 있었다. 현찬은 상대방을 보고 인간이 아니라고 느꼈다. 저런 기괴한 존재감을 내뿜는 게 인간일 리가 없었다.
“감이 좋은 아이군.”
“그쪽의 기척을 숨기는 기술이 형편없었을 뿐이야.”
“…… 말조심해라.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하찮은 인간인 네놈은 순식간에 죽일 수 있으니까.”
“어디 한번 해보지그래?”
현찬은 상대를 도발하면서 그의 모습을 꼼꼼히 살폈다.
그의 외양은 인간과 흡사했다. 다만 키가 2m 이상 되었고 피부는 태닝 한 것처럼 갈색이었다. 그는 현대적 의복을 입고 있었다. 어딘가 사나워 보이는 눈동자였다. 검은 머리칼을 짧게 자른 헤어스타일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주위로 아른거리는 미약한 모래바람이 현찬의 이목을 끌었다.
“…… 당신. 영령이로군?”
그것도 무려 신급 영령이다.
현찬의 말에 상대는 흥미롭다는 듯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래. 무엇을 숨기랴. 나는 <영령>이다. 네놈 같은 인간 따위가 감히 범접하지 못하는 존재지.”
지금은 어느 정도 인간의 탈을 쓰고 있다고 하지만, 남자의 본질은 분명 영령이었다.
남자는 자신의 정체를 숨길 생각이 없는지 여전히 공중에 뜬 채 현찬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이집트 신 <세트>. 내 이름을 들었다면 어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