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
143화 아포피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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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두운을 타고 하늘 높이 올라갔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거대한 어둠이었다. 마치 검은 먹물을 세상에 흩뿌리면 저런 광경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었다. 저 멀리, 사막의 지평선으로부터 다가오는 거대하고 검은 무언가가 그 어둠의 근원이었다.
어둠은 마치 식물 뿌리처럼 허공을 물들이면서 점점 그 범위를 넓혀갔다. 황금빛으로 타오르던 사막이 까맣게 물들었으며 하늘에는 빛을 찾아볼 수 없는 어둠이 가득 찼다. 그 어둠 속에서 거대한 검은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방향은 당연히 현찬이 있는 카이로 쪽이었다. 바깥쪽 빈민가 사람들도 거대한 괴물 아포피스의 접근을 보자 사색이 되어 달아나는 중이다. 그러나 채 도망가지 못한 사람들은 녀석이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죽어 나갈 것이다.
‘막아야 한다.’
아포피스와 거리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방심할 수 없었다. 녀석이 움직이는 속도는 너무나도 빨랐다. 지금 멀리 있다고 해도 저 정도 속도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카이로에 당도할 것이다.
녀석이 도시에 들이닥치는 순간 피해는 그야말로 천문학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게다가 도시에 들어오지 않고 외곽에서 싸움을 벌인다고 하더라도 그 여파만으로도 도시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최대한 도시와 멀리 떨어뜨려 놓아야 해.’
그나마 도시 바깥에 사막이 닿아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저기라면,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 피해가 주변에 닿는 일은 없을 테니까.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현찬의 신형이 앞으로 쭈욱 늘어나며 쏜살같이 나아갔다.
쿠워어어어어!
아포피스와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녀석과 가까워질수록 현찬은 어둠 속에 감추어진 녀석의 진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놈은 거대한 뱀이었다. 어둠 속에 숨어서 그 실루엣만 겨우 확인할 수 있었던 이유는 녀석의 모든 것이 검었기 때문이었다. 거대하고 검은 뱀. 사막을 가로지르며 사방을 어둠으로 물들이는 녀석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었다.
[휘유! 태양신 라를 상대로도 애먹였다고 할 만한 괴물다운데?]
손오공은 아포피스의 모습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과연 이집트의 주신인 라를 애먹인 녀석답게 아포피스는 정말로 거대한 덩치를 자랑했다. 검은 비늘로 뒤덮인 몸은 두께만 해도 100m는 가볍게 넘었고 몸통은 너무 길어서 꼬리의 끝이 보이지도 않았다. 아마 길이는 수 킬로미터를 거뜬히 넘을 것이다.
저 정도 크기라면, 나라 하나를 날려 먹는 수준으로 끝나지 않는다.
세상에서 제일 거대하다고 알려진 난제 <울트락투스>보다 훨씬 더 거대한 아포피스는 등급을 매길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다.
“미쳤군. 계약자도 없이 분신체를, 심지어 저 정도의 힘을 하계에 현신하려면 얼마나 많은 부담을 떠안아야 하는지 모르는 게 아닐 텐데.”
저 정도라면 자신이 지닌 힘 일부가 영구히 사라지는 것은 둘째치고서 악신으로서 지닌 격의 하락까지 고려해야 했다. 아니, 그 정도면 양반일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존재 자체에 타격을 입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현찬으로서는 아포피스의 저 과감한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헤르메스는 오히려 고개를 저었다.
[현찬아. 애초에 저런 녀석들을 상대로 우리의 이성적인 관점을 들이미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도 없어.]
쇠귀에 경 읽기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소에게 훌륭한 경전을 읊어준다 하더라도 소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비슷한 맥락에서 아포피스에게도 적용된다.
하계로 내려온 아포피스와 그런 녀석을 지원해준 다른 누군가는 악에 물든 괴물이다.
녀석들이 신들을 증오하고 그들의 피조물인 인간을 죽이고 싶어 하며 이 세계를 파괴하려는 것에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녀석들은 그저 아무 이유 없이 악으로 태어났고 그렇기에 세상을 파괴하고 싶어 했다.
신념도, 공감을 살 만한 이유도, 세계를 파괴하며 얻게 될 이익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태생이 저런 녀석들일 뿐이었다.
그리고 저런 괴물들에게 인간과 신의 잣대는 먹히지 않았다.
[아포피스도 자신이 저지르는 행동 때문에 받게 될 제약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거야. 그것이 설사 본인의 죽음이라 하더라도 놈은 그저 무언가를 파괴하고 싶을 뿐이겠지.]
[오히려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 녀석들의 순리이자 섭리라고 할 수 있겠지. 그것을 위해 태어났고 그것을 위해 살아간다. 설사 자신이 죽더라도 멈추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불쌍한 녀석들이라는 소리네.”
그렇다고 녀석을 말로 깨우쳐 준다거나 봐줄 생각은 없었다.
결국, 아포피스를 이루는 것이 악의 근간이라면 그것은 어떻게 하더라도 바뀌지 않을 테니까. 유일한 방법은 힘으로 존재 자체를 깨부수는 것이었다.
“아무리 본신의 일부라고 하지만 내가 말을 한다고 해도 들을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봐주면서 싸울 정도로 약한 녀석도 아니고 이대로 놔둔다면 필시 도시를 파괴할 테니…….”
그러니 싸워야지.
현찬이 그렇게 마음먹고 근두운이 날아가는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거대한 뱀 아포피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녀석도 현찬이 접근하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인지 입을 쩌억 벌리며 포효했다. 단순한 포효가 엄청난 물리력을 동원하며 사막에 폭풍을 일으켰다.
뿌연 모래 구름이 현찬의 앞길을 가로막았지만, 현찬은 전혀 개의치 않고 그것을 뚫고 지나갔다.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아포피스의 황금색 눈동자에 현찬의 모습이 담겼다. 녀석의 덩치가 워낙 크다 보니 눈동자도 집채만 했다.
[크햐! 입 냄새도 장난 아니네!]
“선수 필승!”
손오공의 농담을 무시하며 현찬은 여의봉을 두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몸을 회전하며 여의봉을 크게 휘둘렀다.
“커져라. 여의.”
그것은 일종의 시동어였다. 커지라는 말을 읊조리는 순간 여의금고봉은 그 크기와 길이가 수천 배 늘어나 거의 건물 크기와 맞먹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커진 여의금고봉으로 휘두르는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아포피스의 옆머리를 후려쳤다.
꽈아앙!
여의봉과 아포피스가 충돌하는 순간 주변으로 충격파가 퍼져나가며 모래 먼지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거기에 이어 아포피스의 거대한 머리가 바닥에 충돌하자 2차 폭풍이 몰아치며 주변을 뿌옇게 물들였다.
시야가 차단되는 순간에도 현찬의 두 눈동자는 아포피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포피스가 뿌리는 어둠 속에서도 현찬의 두 눈은 황금색으로 뜨겁게 타올랐다.
<화안금정(火眼金睛)>
쿠와아아아!
어둠 속에서 아포피스가 소리 질렀다. 녀석은 현찬을 향해 불쑥 튀어나와 박치기했다. 단순한 뱀의 박치기지만 크기를 킬로미터 단위로 재야 하는 녀석이라면 차원이 다르다. 단순히 스치기만 해도 맷집 좋은 헌터들조차 온몸이 으스러져 죽을 정도다. 현찬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근두운을 타고 옆으로 빠르게 선회해서 아포피스의 공격을 피했다.
후웅!
아포피스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강풍에 현찬의 몸이 살짝 흔들렸다.
‘피했는데도 이 정도 충격이라니.’
단순히 피했음에도 근두운을 탄 현찬의 몸을 흔들 정도의 위력이다. 직격하는 순간 아무리 몸이 튼튼한 손오공과 계약 맺었어도 반드시 죽는다. 심지어 저 검은 비늘은 바깥에서 가해지는 공격을 일부 흡수할 정도로 매우 튼튼했다.
[그래서 패는 맛이 있는 거지!]
아포피스는 덩치가 큰 만큼 한번 움직였을 때 빈틈이 너무 많았다. 현찬은 그대로 줄였던 여의를 다시 커다랗게 만들어 그대로 아포피스의 등에 내리꽂았다. 콰득! 거대한 여의봉은 아포피스의 단단한 비늘을 부수며 그 몸통에 파고들었다.
아포피스가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뒤틀었고 땅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진동했다.
“으아아! 피해라!”
“도망쳐!”
아포피스가 일으키는 난동의 여파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도시에도 닿았다. 겨우 모양을 유지하던 건물의 유리가 전부 깨지면서 바닥으로 쏟아졌고 사람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나 그 순간, 하늘에서 떨어지던 모든 유리 조각이 모래로 바뀌었다.
“어? 사, 살았어?”
“이건 대체……?”
사람들이 몸에 흘러내리는 모래를 보고 의아해하는 순간 멀리서 재차 진동이 느껴졌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서둘러서 아포피스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피난의 행렬을 이루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리네넷은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아으, 힘들어.”
[리네넷. 괜찮나?]
“안 괜찮아. 이렇게 많은 유리를 동시에 모래로 바꾸는 건 나도 처음이라고.”
[힘들면 쉬어도 된다. 여기서 더 무리하면 건강에 지장이 갈 거다.]
“아누는 잔소리가 너무 심해! 이런 거로 나는 쓰러지지 않는다구. 아무튼, 위험한 고비는 넘겼어. 남은 건 상황을 지켜보면 될 거야. 아누라면 그렇게 말할 거잖아?”
[……그래. 나를 잘 아는구나.]
아누비스의 말에 리네넷은 새하얀 이빨을 보이며 해맑게 웃었다.
“당연하지! 내가 아누와 얼마나 지냈다고 생각하는데 그래? 아누는 내 가족이야. 가족끼리는 많은 걸 알고 있는 건 당연하잖아.”
[가족…… 그래. 가족이지.]
아누비스는 어딘가 감회가 새롭다는 어조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저 청년이 패배한다면 리네넷도 무사하지 못한다. 부디 그가 이기길 빌어야지.’
아누비스가 바라보는 도시의 바깥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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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피스는? 지금 뭘 하고 있지?”
“예상했던 대로, 카이로 근처에서 강현찬 헌터와 싸움을 벌이고 있다고 합니다.”
어둠 속에 울려 퍼지는 질문에 에르카닐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에르카닐 그라델.
현찬이 상대했던 조직 <일루베 아르카>의 진정한 수장이자, 한때 새 가면으로 활동했던 남자. 그리고 멸망해버린 자신의 세계를 다시 살리기 위해서 지구를 목표로 한 이계의 존재이기도 했다.
지금 그가 누군가의 앞에서 고개 숙이며 최대한의 예우를 다하고 있었다.
에르카닐의 대답에 어둠 속의 존재는 작게 웃었다. 그 목소리는 너무 모호해서 어둠 속의 존재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아이인지 노인인지 분간이 힘들었다.
“큭큭. 그래. 이렇게까지 해주지 않으면 곤란하지. 우리가 괜히 큰 출혈을 머금고 아포피스를 내려보냈겠어? 녀석 하나로 귀찮은 걸림돌을 제거한다면 이쪽 입장에서는 앓던 이가 빠진 것과 같으니 오히려 더 낫지.”
“그런데, 아포피스가 패배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 녀석이? 한 신화에서 절대 악을 담당하는 녀석이다. 그런 녀석이 자신의 존재 자체에 타격을 고려하면서까지 권능과 힘 일부를 지니고 하계에 내려갔다. 고작 신 하나와 계약을 맺은 애송이가 막을 수 있다고 보는가?”
“죄송합니다. 제 소견이 짧았습니다.”
에르카닐은 고개를 더욱 조아렸다. 자신은 상대에게 의문을 제기할 입장이 못 됐다. 그를 뒤에서 지원해주고 그의 세계를 재건하는 데 도움을 주기로 한 자에게 감히 불경한 마음조차 품어서는 안 되었다. 무엇보다, 그는 감히 에르카닐이 허튼 마음을 먹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자였다.
어둠의 존재가 그렇다고 한다면 정말로 그런 것이다. 이견은 필요 없었다.
에르카닐은 애써 자신의 속마음을 그렇게 다잡으며 생각했다.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강현찬이 신 한 명과 계약 맺은 애송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가 생각하기에 현찬은 아직도 숨긴 무언가가 있었다. 용 가면을 필두로 한 나머지 사도들을 한 번에 쓰러뜨렸던 능력도 그렇고 그 이후에 악마들을 정리한 것만 봐도 그랬다.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현찬의 능력은 그가 지닌 힘 일부일 뿐이라고.
그런 직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