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무한계약-135화 (135/265)

# 135

135화 새로운 세계 (1)

_

꽈르릉! 하늘이 없는 게이트 내부에서 번개가 몰아쳤다. 번개는 먹물을 머금은 것처럼 새까맸다. 번개는 살아 움직이는 뱀 같았다. 지면을 타고, 벽면을 타고 내달리는 그것은 눈앞에 있는 것 전부를 날카로운 독니로 물어뜯었다.

“제길!”

“피해라!”

악마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어떤 악마는 자신의 마기를 모두 끌어모아 흑마갑주를 둘렀다. 어떤 악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빼며 회피했다. 어떤 악마는 다른 악마와 힘을 모아 번개를 향해 공격을 내질러 상쇄하려 했다.

그러나 이 모든 행동의 결과는 전부 같았다.

죽음.

“크아아아악!”

몸에 단단한 흑마갑주를 두른 악마는 광뢰충천의 번개에 닿자마자 그대로 먼지처럼 바스러져서 사라졌다. 뿔이 몇 개든 그들의 마기가 얼마나 진하고 강하든 의미가 없었다.

무림계 최강자였던 파천마의 오의는 심지어 영령이 되어 격이 훨씬 더 올라간 그의 무공은 고작 그런 거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회피하려던 악마들도 마찬가지였다. 진짜 번개는 아니지만, 번개 형상을 띤 것이기에 그 속도는 매우 빨랐다. 날개를 펼쳐 도망치려던 악마들은 모두 광뢰충천에 적중당해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소멸했다.

번개는 1차 게이트 내부를 미친 듯이 휘저었다. 커다란 게이트 내부는 무차별 폭격이라도 가한 것처럼 파괴되었다. 그 안에 있는 악마 군단 또한 성치 못했다.

뿔 2개짜리 악마는 저항조차 못 하고 가루가 되었다.

뿔 3개짜리 악마도 별다른 반격도 없이 죽었다.

그리고 이번 침공의 지휘관이자 군단장인 뿔 4개의 말레두스도 마찬가지였다.

“끄아아아!”

녀석의 끝은 더욱 처참했다. 다른 악마들보다 훨씬 강한 힘으로 저항했기 때문에 말레두스는 오히려 자신의 몸이 끝부터 천천히 사라지는 고통을 맛봐야만 했다. 다른 악마들은 고통 없이 순식간에 죽었지만, 말레두스는 마지막까지 정신을 유지한 채 자신의 육신이 부서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쿠콰콰콰콰!

악마 군단을 휩쓴 광뢰충천은 1차 게이트 전역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일전에 천흉이 사용하던 그것과는 그 크기와 위력이 궤가 달랐다. 그때 천흉은 몸 상태가 최악이었지만, 지금 이 기술을 사용하는 건 신의 계약자인 현찬이었다.

어떻게 보면 지금 사용하는 광뢰충천이야말로 그것이 가진 진짜 힘이었다.

“으헛?! 피해라!”

“뭐, 뭐야! 어서 게이트 밖으로 나가!”

파괴의 여파가 너무나도 강한 나머지 막 게이트 바깥으로 나가려던 알렉세이를 포함한 헌터들에까지 미쳤다. 그들은 뒤를 돌아봤다가 검은 강기로 이루어진 번개 다발을 보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모두가 너 나 할 것 없이 게이트 바깥으로 몸을 던졌다. 다행이고 광뢰충천은 게이트 밖으로는 튀어나오지 않았다.

“가, 갑자기 이게 뭐야? 방금 본 그 검은 번개는 또 뭐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가, 강현찬 헌터님은? 무사하신 건가? 아니면 방금 그 공격이 설마 그분이 일으킨 거야?”

간담이 서늘해진 그들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닭살을 쓰다듬었다. 알렉세이는 말없이 게이트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의 그 공격은 알렉세이조차도 긴장하게 했다. 어지간한 공격조차 육체로 견뎌낼 자신이 있던 그가 위험을 느낀 것이다.

‘정말로 대단해.’

알렉세이는 경이감을 느꼈다. 그는 조금 전 공격이 현찬의 것임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만한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그뿐이었으니까. 뿔이 4개 달린 악마도 강해 보였지만 이만한 위력의 공격을 가할 정도는 아니었다.

모두가 게이트 입구를 바라보고 있을 때 거기서 누군가 나왔다.

혹시나 악마가 나오지 않을까 긴장한 사람들 모두 각자의 무기를 겨누었지만 나온 건 사람이었고 단 한 명이었다.

“가, 강현찬 헌터님이다!”

“살아 돌아오셨어!”

현찬을 알아본 모두가 기뻐하며 그렇게 외쳤다. 현찬은 자신의 귀환을 환영해주는 헌터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시간을 번다고만 들었는데 보아하니 전부 다 쓸어버린 것 같던데.”

“하하.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이거, 우리의 도움이 필요했나 몰라. 혹여나 거기 쳐들어가서 다 쓸어버리지는 않았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게다가 적들도 워낙 많아서 만약에 게이트를 붕괴시키지 않았다면 지쳐서 쓰러졌을지 몰라요.”

현찬은 겸손을 떨었고 알렉세이는 퍽 재미있는 대답을 들었다며 웃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바깥 풍경을 보고 다시 표정을 다잡을 수밖에 없었다.

검게 물들어 우주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하늘.

멀리 떨어져 있어도 확연히 보이는 거대한 빛의 기둥.

그리고 빛의 기둥을 닻 삼아서 서서히 지구를 향해 다가오는 다른 차원.

그 장엄하고도 웅장한 광경에 헌터들 또한 넋을 잃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대통합>이 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바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 지금처럼 천천히, 일종의 과정을 거쳐야만 완전한 <대통합>이 일어난다.

현찬은 <헤르메스의 눈>을 발동했다. 세계가 합쳐지며 <대통합>이 시작되자, 지금까지 락이 걸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정보들 또한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다른 세계와 연결이 끝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앞으로 3일.’

이 3일 동안 세계연합은 이계의 침공을 충분히 대비해야만 했다.

하지만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으리라. 이미 <대통합>이 일어날 걸 예상하고서 어느 정도 준비는 다 했으니까.

무엇보다 <대통합>이 벌어지면서 영령들의 세계와 연결이 더욱 긴밀해진 건 좋은 일이었다.

기존 영령과 계약을 맺은 헌터들이, 더욱 강해질 수 있을 테니까.

‘이제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일상이 되겠지.’

현찬의 예상대로라면 새로운 각성자들이 더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서 몇몇은 위대한 영웅과 계약을 맺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대부분 영령은 달인급에 지나지 않고 어떤 영령은 그보다 급이 더 떨어지겠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악마 군단이 지구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 큰 걱정 중 하나였다.

‘에르카닐이 또 어딘가에 숨어서 무슨 꿍꿍이를 벌이고 있겠지. 그리고 그런 녀석을 뒤에서 지원해주는 다른 차원의 세력도 있다.’

에르카닐이 악마와 같은 세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악마들은 그저 세계를 정복하고 학살을 즐기는 놈들이었다. 그런 녀석들이 에르카닐을 살려서 이용해 먹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는 건 현찬이 모르는 다른 세계의 침략자들이 있다는 소리.

그것만으로도 골치가 아픈데 악마 세계 녀석들도 거슬리는 건 매한가지였다.

현찬은 조금 전 싸움을 떠올렸다.

&

광뢰충천은 강했고 그것은 순식간에 균열을 넘어온 악마들을 전부 쓸어버렸다. 그리고 균열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줬다. 그 강한 힘을 느꼈는지 균열을 넘어오던 악마들의 움직임이 뚝 그쳤다.

끝이라고 생각하고 게이트를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흐흐하하. 제법이구나. 인간 주제에 이렇게나 강한 녀석이 있다니.]

공간 자체를 울리는 굵은 목소리. 현찬은 고개를 돌려 균열을 노려보았다. 소리는 그곳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지하 깊은 곳의 심연에서 무언가가 기어 올라오는 것 같은 불쾌감을 주는 목소리였다.

“너는…….”

현찬은 상대방의 정체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마계 5대 마왕 중 하나인 염옥마왕(炎獄魔王) 파르고잔. 너의 싸움은 잘 보았다. 과연, 나의 군단장 중 하나를 이렇게나 손쉽게 쓰러뜨리다니 대단하더구나.]

“…….”

현찬은 일이 귀찮게 흘러감을 직감했다. 대충 군단장을 쓰러뜨린 건 좋았지만 설마 마계에서 가장 강한 다섯 명 중 하나인 파르고잔이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눈독 들일 줄이야.

심지어 녀석은 현찬에게 매우 흥미를 보였다. 아니, 현찬을 넘어서 이 지구라는 세계 자체에 큰 관심을 가졌다.

[원래 지구라는 곳은 정복 활동에 큰 의의를 둔 곳이 아니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인간이여, 너라는 영웅과 언젠가는 한번 크게 붙어보고 싶게 되었으니까. 그러니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서로 만나는 날을 기약하도록 하라.]

“싫다면?”

[크큭! 나의 힘을 앞에 두고서도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다니, 역시 그만한 자격은 갖추고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운명은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지.]

균열에서 흘러나오는 파르고잔의 기세가 더욱 강해졌다. 현찬은 순간 대기 농도가 몇 배는 진해진 것 같은 착각을 받았다.

강하다.

단순히 균열 너머에서 흘러 넘어오는 힘 일부일 뿐인데도 확실히 상대가 강하다는 게 느껴졌다.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는 만나게 되겠지. 과연 그 끝에 있는 것은 너의 승리일까, 나의 승리일까 너무나도 기대되는구나.]

“정 그렇게 싸우고 싶으면 이쪽으로 넘어오지그래?”

[나도 그러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이런 불안한 균열을 통해서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 이따위 통로는 나라는 존재를 감당하지 못하거든. 무릇 마왕이나 된다면 더 화려하게 가줘야 하지 않겠나?]

“왜? 쫄려?”

[그런 단순한 도발이 먹힐 거로 생각하지 말도록. 네놈이 우리 종족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겠으나, 나는 왕의 자리에 올라선 자. 그런 사소한 도발 따위에 낚일 정도로 어수룩하지 않다.]

군단장은 해당 마왕을 욕하면 칼같이 반응했지만, 마왕은 달랐다.

과연 모두를 이끄는 자들의 정점에 선 존재이기 때문일까. 그는 어딘가가 여유로웠고 생각도 짧은 것 같지 않았다.

[더는 오랫동안 대화를 나눌 수 없겠지. 다른 녀석들이 너의 존재를 눈치채고 눈독 들일 테니까. 아니, 이미 심마왕(深魔王) 녀석은 눈치를 챘으려나.]

파르고잔이 심마왕(深魔王)이라고 부르는 녀석은 바로 겔루키스, 현찬이 일전에 한바탕 쓸어버린 자그마한 군단의 지배자였다. 현찬이 한번 그쪽으로 넘어가서 거하게 깽판을 쳤으니 그쪽도 현찬에게 어느 정도 이를 갈고 있으리라.

[다른 녀석에게 네놈을 빼앗길 생각은 없다. 그러니 목 씻고 기다리고 있거라.]

“꺼져. 너 같은 녀석이랑 상종할 시간 없어. 난 되게 바쁘거든.”

[크하하하! 재밌어! 정말로 재밌어! 그 입담만큼이나 전투에서 나를 더 즐겁게 만들어주기를 바라마.]

균열이 더 버티지 못하고 사라졌다. 현찬은 한참 동안 그 균열을 노려보았다. 이내 게이트의 핵이 파괴되어 게이트가 사라지려고 하자 현찬도 그제야 자리를 떴다.

‘마왕이 우리 세계에 관심을 갖는 것은 매우 귀찮은 일이야.’

파르고잔 하나면 문제가 없다. 하지만 녀석이 관심을 가진 만큼 다른 마왕들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마계는 하나의 마왕이 지닌 군단의 힘이 어지간한 세계를 집어 삼킬 정도인데 그것이 무려 다섯이면 이쪽도 귀찮아진다.

‘그나마 서로 힘을 합치는 게 아닌 경쟁관계라 다행이지.’

그렇지만 언제 놈들이 마음을 바꿔먹을지 몰랐다. 현찬은 남은 3일 동안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겠다고 다짐했다.

“일단 저희도 돌아가죠. 결과가 어떻게 됐더라도 저희는 승리했으니까요.”

“그럽시다.”

현찬의 말에 헌터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지금 눈 앞에 펼쳐진 형언할 수 없는 광경이 그들의 마음을 무겁게 옥죈 것이다.

이제 세상은 예전처럼 흘러가지 않을 것이다.

큰 변화를 맞이했고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현찬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전화가 왔다.

발신자를 확인해보니 어머니였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걱정돼서 전화를 받자 들려오는 건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닌 여동생의 목소리였다.

[오빠! 나 각성했어!]

“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