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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무한계약-131화 (131/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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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화 대변혁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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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찬은 고개를 들어 성을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성이었다. 먼 거리에 서서 봤을 때도 거대하다는 건 알았다. 막상 가까이 접근해서 보니 그 크기가 상상 이상이었다. 예전 <영웅투쟁>에서 겪었던 <니플헤임>의 풍경이 떠올랐다.

그곳에서 싸웠던 서리 거인의 거대한 얼음성. 거대한 산 일부를 깎아서 만든 것 같은 그 거대한 성과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는 위용과 거대함이 있었다. 이런 황량한 평야에 용케도 이런 거대한 성을 쌓았구나 싶었다.

‘그리고 나를 저 안쪽으로 초대하고 있지.’

현찬은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이 나왔다. 바보도 아니고 대체 누가 적진에 함부로 들어간단 말인가. 그것도 무슨 함정과 간계가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데.

현찬은 자신의 힘을 믿었지만 지나치게 맹신하지 않았다. 강하다 하더라도 방심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싸운다. 무엇보다 현찬이 주로 싸우는 방식은 그저 힘만 휘두르는 게 아니었다.

언제나 상대방의 허점을 찌르고

적들이 예상하지 못하는 방법을 택한다.

‘안쪽에서 기다린다고? 나를 맞이하겠다고?’

대체 누가 그런 뻔한 거짓말을 믿겠는가?

지금까지 지구에서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몰래 활동해온 놈이다. 심지어 충실하고 강하기까지 한 사도들에게 ‘금제’를 걸어서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였다.

이렇게나 철저한 녀석이 현찬을 초대한다?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확실하지 않은가.

‘녀석이라면 분명히 성안에서 바깥의 상황을 지켜봤겠지. 내가 사도들과 싸우는 모습도 봤을 거야.’

그렇다면 놈도 현찬의 무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했을 것이다. <무극검신> 상태인 현찬은 오버랭크보다 한 단계 위의 수준이었다. 그것은 인류가 지금까지 도달한 적 없는 미지의 경지이기도 했다.

그런 상대를 보고도 저렇게 당당하게 들어오라고 하는 걸 보면 저쪽도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소리였다. 아마 성안에는 온갖 기묘한 장치들과 마법들이 즐비해 있을 것이다.

성 바깥에 방어마법이 설치되어 있었다. 안쪽에는 어떤 것들이 얼마나 있을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내가 굳이 들어가 줄 필요가 없잖아?’

현찬은 아직 <무극검신> 상태를 유지했다. 하지만 마력을 너무 잡아먹는 탓에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었다. 그 끝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현찬은 마지막으로 녀석에게 한 방 크게 먹여주기로 했다.

‘집에 들어가기 싫으면 집주인이 나오게 하면 되니까.’

현찬은 검을 쥐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방금 저 사도들과 싸웠을 때와 비슷하게 현찬의 주위로 투기가 격류처럼 몰아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남은 힘을 더 쥐어 짜내서 더욱 강하게 휘두를 심산이었다.

하지만 날카롭게 휘두르지 않는다. 좁은 범위에 힘을 집중하기보다는 넓은 범위에 공격을 흩뿌릴 생각이었다. 현찬이 디딘 지면의 풀이 파삭거리며 가루처럼 흩어졌다. 강력한 기를 견디지 못하고 사라진 것이다.

드드드드드.

지면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잘게 진동했다. 그리고 그것은 성 또한 마찬가지였다. 성의 주위에서 다양한 색깔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노란색, 붉은색, 푸른색, 녹색 등 찬연한 빛은 위기감을 느꼈는지 현찬을 목표로 삼았다.

역시 현찬의 예상대로 저 성 자체에는 온갖 장치가 다 있었다. 그리고 위험해지니 숨겨놨던 수를 꺼내 현찬을 공격하려고 들었다.

하지만 이미 한발 늦었다.

먼저 이런 상황까지 상정하고 예측한 현찬이 더 빨랐다.

<극검(極劍)>

용 가면과 나머지 사도들을 쓰러뜨린 공격이 다시 한번 펼쳐졌다.

그러나 이번에 펼친 것은 일전의 예리함이 없었다. 예리함보다는 더욱 파괴적이고 폭발적이었다. 하나의 선으로 집중한 힘의 응집은 사라지고 방사형으로 퍼져나가는 파괴의 격류였다.

그리고 그것은 앞에 있는 모든 것을 휩쓸었다.

콰과과과과!

성이 날아갔다. 방어마법은 이미 첫 번째 공격에서 전부 무너졌다. 그나마 남은 것은 침입을 막기 위한 공격 시스템이었지만 그마저도 현찬의 공격에 전부 쓸려나갔다. 다채로운 빛은 일격에 지워졌다. 튼튼한 성의 외벽은 순식간에 부서지고 파괴됐다. 그 파편은 다른 벽에 부딪히며 새로운 파편을 만들었다. 거대한 섬광과 함께 세상의 소리가 사라졌다.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굉음이 모든 소리를 앗아갔다.

몰아치던 거대한 폭풍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거대한 성이었던 폐허였다.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라 약간의 뼈대와 성의 흔적은 남아 있었지만, 처음 보았던 위용을 생각하면 태양과 반딧불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현찬은 그 공격을 마지막으로 <무극검신> 상태를 해제했다.

마력이 엄청 많이 소모되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마력의 회복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 때문에 아무리 큰 소모가 있어도 조금만 쉬면 충분히 회복되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분노한 집주인일 것이다.

“이, 빌어먹을 놈…….”

“무거운 엉덩이 겨우 들고 일어났네. 우린 서로 초면이지?”

무너져 내린 성의 파편을 부수며 모습을 드러낸 에르카닐 그라델을 보며 현찬이 도발을 가했다. 녀석은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새하얀 로브와 얼굴에 쓴 아무런 무늬도 없는 새하얀 가면이 전부였다.

그러나 녀석의 분노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설마 이 성 자체를 날려버릴 거로 생각하지 못했는지 당혹해하면서도 자신의 거주지를 이렇게 날린 현찬을 노려보았다.

현찬은 겉으로는 웃으며 놈을 도발했지만, 속으로는 나름대로 긴장을 품었다.

‘강하다.’

녀석은 확실히 강했다. 사도 중에서 제일 강했던 용 가면보다 더. <영웅투쟁>에 참여했던 다른 세계의 영웅들보다 더. 역대 <영웅투쟁>의 우승자 중 하나였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내가 더 강해.’

현찬의 몸이 잔상을 남기며 사라졌다. 에르카닐은 고개를 퍼뜩 들더니 왼팔을 올려 좌측 상반신을 가드했다. 그 직후 현찬의 검이 녀석의 팔뚝에 박혔다. 쿠웅! 거대한 충격이 퍼지며 성의 잔재들이 휩쓸리며 하늘을 날았다.

그러나 에르카닐은 견뎌냈다. 심지어 현찬의 검은 녀석의 팔뚝을 자르지 못했다. 그것은 로브 안쪽에 숨겨진 신비로운 갑옷 덕분이었다. 성스러운 은빛을 띠는 그것은 매우 얇았지만, 그 강도가 무시무시했다.

[이럴 수가. 우리 형이 만든 무기로 쉽게 베어내지 못하는 방어구라니.]

[이계의 재료로 만들어진 무구로군. 저것에서 느껴지는 신력을 보면 저것 또한 신물에 가까운 것임이 틀림없다.]

현찬은 묵묵히 검을 휘둘렀다. 허공에 검광이 번뜩였고 검은 선들이 그어졌다. 그러나 에르카닐은 두 팔을 들어서 현찬의 공격을 전부 방어해냈다. 몸을 사리지 않는 무모함이었지만 녀석의 갑옷이 그걸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다.

둘의 충돌은 거대한 여파를 만들었다. 아직 모양을 유지하던 성의 일부가 이것을 기점으로 전부 폭삭 무너져 내렸다. 뿌연 먼지구름이 일어났지만, 그것은 이내 충격파에 찢겨 나갔다.

2차 게이트 전체가 크게 진동했다. 현찬과 에르카닐의 공방은 치열했고 그만큼 강력했다. 에르카닐의 주먹을 방패처럼 검 옆면으로 막아낸 현찬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바닥에 2개의 고랑을 만들며 밀려나던 현찬을 에르카닐이 추격했다.

현찬은 뒤로 밀려나는 와중에도 테레이오스테를 장창으로 만들어 에르카닐을 향해 휘둘렀다. 에르카닐은 달려오는 와중에도 팔 한쪽을 들었다.

“…… 아닛?!”

그러나 창대가 에르카닐의 팔뚝을 후려치기 직전 그 형상이 변했다. 흐물흐물해지고 쭉 늘어난 테레이오스테는 채찍의 형태로 변하여 에르카닐의 팔뚝을 붙잡았다. 에르카닐이 채 반응하기도 전에 강한 힘이 채찍을 통해 전해져 그를 잡아끌었다.

현찬은 날아오는 에르카닐을 향해 타이밍을 맞춰 달려들며 <차용>한 아이기스의 방패로 후려쳤다. 쿠웅! 에르카닐의 몸이 지면에 처박혔다. 에르카닐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머리가 어지럽고 정신이 크게 흔들렸다.

아이기스의 방패에 달린 <메두사의 머리> 특징 덕분이었다. 에르카닐이 강했기 때문에 석상으로 바꾸는 것을 불가능했지만 그의 정신을 크게 흔드는 것까지는 가능했다. 에르카닐은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갑옷이 물리 공격은 막아주지만, 정신적인 부분은 그러지 않나 봐?”

적에게 약점이 드러났으면 그 부분만 집요하게 노려야 하지 않겠는가!

현찬은 즉시 테레이오스테를 [카두케오스(caduceus)]로 덧씌웠다. 왼손에는 방패를, 오른손에는 지팡이를 쥔 현찬은 전혀 전투에 특화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에르카닐이 이를 악물며 외쳤다.

“고작 지팡이라니! 나를 우습게 보는 거냐!”

“아니, 나는 진심이야.”

현찬이 [카두케오스(caduceus)]를 휘둘렀고 에르카닐은 놀라서 뒤로 펄쩍 뛰었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는 것을 보고 현찬에게 재차 달려들려고 했다. 그 순간 그의 한쪽 무릎이 꺾이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 이건……?”

그는 지금 왜 자신이 이렇게 엄청난 탈력감을 느끼는지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뭐야. 너 정말 영웅 맞아? 대체 무슨 영웅이 이렇게 정신력이 약해?”

영웅이란 무력보다도 강인한 정신력을 지닌 자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현찬이 본 에르카닐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전투 중 가하는 최면에도 쉽게 영향받을 정도였으니까. 현찬이 강한 것도 있었지만 에르카닐의 정신력이 약한 것도 있었다.

‘뭔가 좀 싱거운데?’

[오랜 세월 동안 고향을 잃은 채 지내다 보니 정신력이 약해진 게 아닐까?]

[그럴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

어찌 되었든 이쪽이 승기를 잡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어스름달.”

“네!”

현찬의 몸을 덮고 있던 어스름달이 튀어나왔다. 녀석의 몸이 쭈욱 늘어나며 에르카닐의 몸을 속박했다.

“고작 이런 거로 나를……!”

에르카닐이 근력으로 어스름달의 속박을 끊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현찬의 말이 더 빨랐다.

“에크티.”

“네.”

어디선가 나타난 에크티가 에르카닐의 뒤통수를 거대한 황금 망치로 후려쳤다. 저런 거로 죽을 리 없지만 방심한 그에게 어느 정도의 타격을 가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그 틈에 어스름달이 에르카닐의 몸을 확실하게 속박했다.

“이, 이이! 비겁한 놈! 영웅이라는 놈이 혼자서 싸우지 않는다니!”

“쓸 수 있는 수단은 다 써야지. 뭔 개소리야?”

서로 목숨 걸고 싸우는데 정정당당이고 공정하고 그런 게 어디 있단 말인가.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는 것이 가장 최우선이었다. 적당한 명예는 중요하겠지만 그것만을 위해 싸우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어디 그 잘난 얼굴 좀 보자.”

금제를 건 당사자이니 자신에게 금제를 걸었을 리는 없었다. 현찬이 녀석의 가면을 잡아서 벗기자 에르카닐의 민얼굴이 드러났다.

그것을 본 순간 현찬의 표정이 굳어졌다.

“너…… 에르카닐이 아니잖아?”

에르카닐은 이계의 존재이자, 이종족이다. 그러나 지금 가면을 벗긴 녀석은 분명히 인간이었다. 그 얼굴을 누구인지 못 알아보게 하려고 얼굴을 화상 입은 사람처럼 뭉개놨지만, 현찬의 감을 속일 수 없었다.

그는 인간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바로 에르카닐이다! 내가 <일루베 아르카>를 이끄는 수장이자 우리들의 세계를 부활시킬 선지자다!”

“……그리고 녀석에게 그런 생각을 심어준 것은 바로 나지.”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현찬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지금까지 모습을 코빼기도 비추지 않던 새 가면이 서 있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현찬에게 충분히 경계심을 심어주었다.

녀석은 지난번에 봤을 때 보다 더 강해져 있었다.

아니, 오히려 저것이 그가 지닌 진짜 힘일지도 몰랐다.

“너였구나? 네가 진짜 에르카닐이었어.”

“그래.”

새 가면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의 당당한 태도에 뒤에서 지켜보던 헤르메스와 아테나도 약간 당황했다.

“무슨 깡으로 이렇게 정체를 밝히며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눈에 띈 이상 도망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겠지?”

“미안하지만 나는 너와 싸울 생각으로 나타난 게 아니야. 내가 나타난 건 나의 계획이 차근차근 진행되었고 이제 마지막 단계만 남았기에 내가 직접 나선 거지.”

“뭐라고?”

“이제 알게 될 거다.”

쿠구구구궁!

그 순간 세계가 흔들렸다.

이것은 2차 게이트에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1차 게이트, 더불어 지구 전체에 일어나는 커다란 진동이었다. 실제로 각 나라의 정부 기관은 이 갑작스러운 사태에 매우 당황하며 이유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중이었다.

“무슨 짓을 한 거냐.”

현찬이 노려보자 새 가면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그저, 대변혁을 불러왔을 뿐이다.”

그리고 뒷말을 덧붙였다.

“예정보다 빨리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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