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129화 대변혁 (2)
_
“대단해! 정말로 멋져!”
온갖 빛깔이 뒤섞인 기묘한 공간. 그곳에 한 아름다운 여인이 거울을 통해 현찬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끓어오르는 환희를 참을 수 없는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자신의 양어깨를 감싸 쥐며 몸을 억눌렀다.
“역시, 나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
북유럽 신화의 사기와 기만의 신 <로키>는 매우 만족스럽고 뿌듯한 표정으로 거울을 보았다.
그녀는 현찬의 진가를 이미 알아봤다. 그가 신과 계약을 맺고 현세에 강림시키기 전부터.
그녀는 현찬을 지켜보았었다.
설마 헤르메스에게 먼저 선수를 빼앗기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다른 신이 아닌, 헤르메스와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아직도 기회가 남아있었으니까.
‘하지만 일단 여기서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겠지.’
현재 로키가 머무는 장소는 영령들의 세계와 현세,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격리된 공간이다. 그녀는 지금 일종의 후폭풍을 피하려고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세계의 선택을 기다리지 않고 멋대로 현찬을 <영웅투쟁>으로 보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로키 정도의 신이라고 하더라도 이만한 행동에는 상당한 대가가 따랐다. 로키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의 독단으로 현찬을 <영웅투쟁>으로 보냈다.
그리고 세계가 그녀에게 후폭풍을 가하려 할 때 로키는 숨어버렸다.
스스로 차원과 차원의 틈새, 그 누구도 찾지 못하는 경계로 투신한 것이다.
‘이제 이 정도 있었으면 후폭풍은 끝났을 테고.’
그녀라도 세계가 가하는 후폭풍에서 멀쩡할 수 없기에 도망을 선택했다. 그렇게 상당한 시간이 흘렀으니 그 여파는 목적을 잃은 채 방황하다 사라졌을 것이다.
다른 신들의 측면에서 보면 참 교활한 짓이었지만 나름대로 단점도 있었다.
차원과 차원의 틈새는 지구와 세월의 흐름이 다르다.
그곳에서 몇 개월은 이곳에서의 몇십 년과 같았다. 로키는 무려 혼자서 이 기괴한 공간에서 몇십 년을 머물렀다.
그녀가 오랜 세월 동안 지내온 신이기도 했으며 남다른 정신력을 가진 결과였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이제 끝이다.
“이제 조만간 이 지긋지긋한 곳을 벗어날 수 있어.”
로키는 새하얀 손가락의 끝으로 자신의 선홍빛 입술을 매만졌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현찬이 있었다. 로키의 입술을 비집고 뜨거운 숨결이 흘러나왔다.
“조금만 더 기다려줘요. 나의 영웅.”
그리고 조금만 더 있으면.
대변혁이 시작된다.
&
“이것 참. 지원을 가야 하는데 자꾸 방해꾼이 나서는군.”
“크하하하! 알렉세이! 네놈이 그렇게 강하다고 하는데 어디 한번 붙어보자!”
“어휴.”
눈앞에 나타난 거한을 보며 알렉세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2차 게이트에 넘어가서 현찬을 도와줘야 하지만, 적들은 알렉세이라도 막길 작정했는지 계속해서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게 적당한 놈들이었다면 그러려니 하고 무시하면서 지나쳤을 것이다. 하지만 등장하는 녀석들이 하나같이 만만치 않았다. 헌터의 수준으로 따지면 최소 A+랭크이고 간혹 S랭크 헌터의 실력을 지닌 특급 범죄자들도 더러 나타났다.
‘대놓고 시간을 끌려는 게 보이는데, 마땅한 방법이 없네.’
알렉세이는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서 양 리화 또한 데스페라도와 람브로눅스의 간부들의 합공을 막아내며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차라리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없었으면 마음 놓고 싸우기라도 하겠지.’
알렉세이와 양 리화가 마음만 먹는다면 주변 일대를 휩쓸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군들이 즐비했고 서로 뒤엉켜 싸우는 난전의 상황에서는 힘을 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셋이서만 올걸.
알렉세이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하하하! 친구!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은 짐이라고 했잖아!]
‘하지만 우리만으로 도망치는 녀석들까지 전부 잡을 수 없는 것도 맞는 말이지. 무엇보다 녀석들이 무슨 짓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셋만 가는 건 위험해.’
결국, 답답하기는 하지만 확실하게 끝내기 위해 이런 방법을 택했다.
알렉세이가 그렇게 한눈파는 사이 그의 앞에 나타난 거한은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는지 머리에 핏대를 세웠다.
“나를 무시하지 마라!”
그의 머리에서 소의 뿔이 솟아나고 얼굴도 소의 그것으로 바뀌었다.
미궁의 괴물 <미노타우로스>.
그리스 신화에서도 인지도 있고 사람들의 입에서 많이 오르내리는 녀석인 만큼 괴물로서의 격도 상당히 높았다. 저렇게 봐도 미노타우로스를 낳은 파시파에는 신의 혈통이다. 즉, 미노타우로스 자체도 신의 혈통을 타고 났다고 볼 수 있었다.
테세우스에게 허무하게 당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가지고 있는 힘은 절대 무시할 게 아니다.
하지만.
턱!
“무오오오?!”
미노타우로스의 강력한 돌진은 알렉세이에게 막히고 말았다. 그는 양손으로 미노타우로스의 뿔을 붙잡고 자리에 굳건히 버티고 섰다. 미노타우로스는 발을 구르며 어떻게든 알렉세이를 밀어내려고 애를 썼다.
‘꼬, 꼼짝도 하지 않는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알렉세이는 녀석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
“미노타우로스라. 상당히 강력한 녀석이기는 한데…… 덤빌 거면 상대를 봐가면서 덤볐어야지.”
알렉세이는 그렇게 말하며 오른손에 쥔 뿔을 놓으며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가볍게 녀석의 뒤통수에 주먹을 쥐어박았다. 어떻게 보면 그저 말썽꾸러기에게 꿀밤을 먹이는 행동 같았다. 그것이 초래한 결과가 그러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지만.
콰직!
다행히 머리가 터지지는 않았다. 소의 두상을 지녔기에 두개골이 튼튼한지 다른 녀석들처럼 박살 나지는 않았지만, 몸이 지면에 깊게 처박혔다. 당연히 겉으로는 멀쩡해도 이미 죽어있었다. 하지만 한숨 돌릴 틈도 없이 다른 녀석들이 알렉세이에게 달려들었다.
“힘 조절하면서 싸우려고 하니 무척 죽을 맛이야.”
그는 현찬이 2차 게이트로 들어간 것을 보았다. 적들도 현찬이 2차로 들어간 것을 알기에 나머지라도 들여보내는 것을 막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대체 무엇이 저들을 저렇게 만드는지 모르겠지만 저 방어선을 쉽게 뚫을 수 있어 보이진 않았다.
‘저 안쪽에서 혼자 싸우고 있을 것 같은데.’
특히나 그 사도라는 녀석들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렇다는 건 어딘가에 숨어 있거나 아니면 저 2차 게이트 안쪽에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남은 수도 상당할 것이고 녀석들이 뭉치면 만만치 않은 전력이 된다.
‘그렇다고 해도 딱히 걱정되지 않지만.’
<스왈로우>의 토벌 때 보았던 현찬의 무력을 생각하면 오히려 저 2차 게이트가 전부 날아가지 않을까 하는 게 알렉세이의 생각이었다.
“이크!”
알렉세이가 고개를 뒤로 젖히자 거대한 가시가 스치듯 지나갔다. 지금은 전쟁터이니 싸움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알렉세이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적들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그의 주먹에서 튀어나온 권풍이 정면을 휩쓸었다.
&
‘이, 이건 대체…….’
용 가면은 현찬에게서 느껴지는 힘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그래도 어느 정도 싸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이길 거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강했지만,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았으니까.
하지만 질 거라는 생각도 없었고 시간을 끌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현찬이 <삼중계약>을 사용하기 전까지는.
그래도 용 가면의 상황은 나았다. 다른 사도들은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고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흔들고 있었으니까. 그 정도로 현찬이 가하는 압박감은 엄청난 것이었다.
단 한 명만 불러도 끝판왕이라고 불릴 영령이 무려 셋이다. 최강의 장수 셋을 그대로 한곳에 모아 그 힘을 뭉쳤으니 어느 정도일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현찬도 그랬다.
막상 처음 발동했지만, 이 넘치는 힘의 한계가 어디인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예상대로 대강 들어맞았다.’
신급 영령을 불렀다가는 안 그래도 위태로운 세계에 <대통합>을 앞당기고 만다. 순리에 어긋나는 짓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현찬이 떠올린 것은 영웅급 영령을 동시 계약한다는 것이었다.
예전에 <양만춘>과 <헤라클레스>를 동시에 계약을 맺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계약이 끝남과 동시에 리바운드가 밀려와서 기절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셋을 동시에 불렀음에도 신체에 아무런 부하가 느껴지지 않았다.
[하하하! 설마 이야기만 들어본 대단한 칼잡이를 이렇게 대면하게 될 줄이야! 한쪽은 서방의 유명한 왕이고 다른 하나는 반도 최강의 검객인가.]
[동양의 먼 땅에 엄청난 위인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만나니 묘하군.]
[흠. 오늘 이렇게 모인 것도 어쩌면 인연이겠지.]
셋은 무인으로서 극에 도달한 자들이라 그런지 성향도 얼추 비슷했다. 셋 다 호승심이 장난 아니게 강했지만 그렇다고 서로 칼을 맞댈 생각은 하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그들은 영령이었고 그들을 무른 건 현찬이었으니까.
[그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우리는 계약자의 부름에 따라.]
[그에게 힘을 빌려주면 되니까.]
셋의 마음이 하나로 모인 순간 현찬의 몸이 움직였다.
여우 가면의 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다른 사도들이 그것을 깨닫는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뭐지?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어째서 직전까지 멀쩡하게 싸울 준비하던 여우 가면의 목이 잘려나갔단 말인가?
놀라운 건 현찬은 조금 전과 똑같은 자세였다.
‘빠르다!’
현찬이 움직였다고 생각하는 순간 여우 가면이 죽었다. 그리고 그 당사자는 여전히 가만히 있었다. 그 여유로운 태도에서 용 가면은 현찬의 의도가 무엇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 따위는 그저 가볍게 이길 수 있다 이건가.’
용 가면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분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어떤 모욕을 듣더라도 달게 넘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착각이었을 뿐이다. 그가 강했기에 강자의 자리에서 약자를 내려다보았기에 그런 착각에 빠진 것이었다.
“웃기지 마시죠!”
참다못한 피에로 가면이 먼저 달려들었다. 피에로 가면의 몸이 수십 개로 갈라지며 현찬을 포위하더니 이내 사방에서 단검을 날렸다. 단검이 빗발치듯 현찬을 향해 쇄도했고 용 가면은 그 광경을 보며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모두 엎드려라!”
그렇게 외친 용 가면이 엎드렸고 옆에 있던 베네치아 가면과 해골 가면, 페르소나 가면도 엎드렸다. 그 직후 거대한 참격이 동심원처럼 퍼져나갔다. 그것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지며 사도들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걸리는 대상은 그 무엇이든지 베어버리는 단 한 번의 참격에 피에로 가면은 피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상반신과 하반신이 나뉘어 죽고 말았다.
순식간에 사도 둘이 당하고 말았다.
저들의 실력이 어딜 가서 부족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S랭크 헌터와 붙어도 이길 수 있는 실력자들이었으니까.
그러나 너무나도 압도적인 힘 앞에서 그들은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왜? 더 해봐.”
현찬의 도발에 용 가면은 자신의 몸에 걸친 로브를 벗어던졌다. 그리고 온몸의 마력을 일으켰다. 용 가면이 디딘 땅이 거대한 마력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갈라지며 돌조각들이 허공에 두둥실 떠올랐다.
‘그래. 어차피 시간만 끌면 된다.’
그분께서 마지막 작업을 하고 계신다.
그것을 위해서라도 그는 현찬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아 버틸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