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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무한계약-126화 (126/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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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변화의 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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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한드로 브릭슨은 범죄자다.

그는 각성자였지만 괴물과 계약 맺었다. 별로 널리 알려진 이름은 아니었지만 나름 한 지방에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괴물이었다. 일반 영령과 비교하면 미안할 정도지만 브릭슨은 매우 강했다.

대부분 <괴물>과 계약 맺은 각성자들은 강하다. 그들은 괴물이 아무리 보잘것없는 녀석이라 하더라도 강력한 힘을 얻는다. 일반 영령과 인지도 수준 차이가 난다고 하더라도 힘은 더 월등했다. 그런 이유로 괴물과 계약을 원하는 각성자들도 있었다.

다만 괴물과 계약을 맺을 경우에 단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인간성을 잃는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괴물은 인간들의 적이었고 그들을 죽이고 공포심을 양식 삼아 살아왔다. 그것은 계약 맺은 각성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괴물>의 특성을 이어받은 그들은 강력한 힘을 얻었지만, 인간성을 잃었다.

그러나 인간성을 잃은 그들이라고 하더라도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완전히 감정을 거세당하지 않은 그들도 압도적인 힘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고 강자에게 공포를 느낀다.

브릭슨의 상황이 지금 딱 그러했다.

“제길.”

브릭슨은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비죽였다. 도망치느라 다친 팔이 욱신거렸다. 그는 사람들이 찾지 않는 폐허 벽에 등을 기댔다. 옷과 피부에 먼지가 묻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는 얼마 전 일이 떠올랐다. 언제나처럼 조직에서 머무르며 누군가를 죽이려고 입맛을 다시던 그는 갑작스러운 습격을 받았다. 적들은 강했다. 자칭 <세계연합>에서 파견된 헌터들인 만큼 그들의 무력은 상당했고 브릭스가 몸담은 람보르눅스 지부는 순식간에 일망타진됐다.

다른 동료들은 죽거나 생포되었고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도망칠 수 있었다.

지금은 다른 지부에 의탁하고 있었지만 언제 적들이 들이닥칠지 몰랐다.

‘적들은 우리를 잘 알아.’

이쪽 지부도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사실상 지부라고 하기는 규모가 지나치게 작았다.

대충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갔다. 이들도 쫓기다가 겨우 목숨을 부지한 자들인 것이다.

사실상 지부라고 부르기에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행태. 이들도 결국 도망쳐서 겨우 살아남은 생존자들이었다.

‘어쩌다가 우리가 이렇게 된 거지.’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람브로눅스는 세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거대한 조직이었다. 그것은 라이벌 격인 데스페라도도 똑같았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들의 세력은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래. 그때부터였다.

대한민국에 오버랭크 헌터가 탄생한 날부터.

그 이후로 그들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세계는 하나로 뭉쳤고 지금까지 너희들을 봐줬지만, 이제는 아니라는 것처럼 전쟁을 선포했다. 그들은 강했다. 이쪽도 나름대로 저항했지만 제대로 뭉치지 못한 자들과 하나로 뭉친 자들의 차이는 막대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대부분의 지부가 사라지고 조직원들 대다수가 죽거나 체포당한 뒤였다.

뒤늦게 부랴부랴 서로 연합하려고 해도 한번 무너진 균형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 끝인가.’

브릭스가 그런 절망에 빠져있을 때였다.

“이봐. 이야기 들었어?”

“…… 무슨 이야기?”

“아직 남아있는 조직이 있는 모양이야.”

옆에 선 동료의 이름은 몰랐지만, 그 또한 자신과 동류인 것은 안다. 브릭스는 감았던 눈을 가늘게 뜨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매우 흥미로운 정보였다.

“아직도 남은 곳이 있다고? 이 주변의 조직은 거의 다 망했을 텐데?”

“이쪽이 아니야. 조금 멀리 떨어져 있지만 듣기로는 살아남은 자들이 한곳으로 모이고 있다고 하더라고.”

“모인다고?”

람브로눅스나 데스페라도 조직원들은 딱히 정과 우애로 뭉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세계에 혼란을 주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조직을 이루며 함께 움직이는 것은 마음이 맞았기 때문이다. 같잖은 동료의식은 없었다.

그런 자들이 뭉친다는 이야기는 주변에 실의에 빠진 자들의 관심을 끌 만했다. 어서 말하라고 재촉하는 눈빛이 이야기를 꺼낸 남자를 찔렀다. 그는 목을 한차례 가다듬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다들 소문으로 들어본 적 없어? 람브로눅스와 데스페라도 말고도 다른 커다란 조직이 있다고.”

몇몇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들은 적 있어. 조직명이 뭐라고 했지? <일루베 아르카>라고 했나? 그런 이상한 이름을 가진 조직이 하나 있다고.”

“듣기는 했지만 정말로 실존하는지 알 수 없어서 그냥 뜬소문이라고 치부했는데.”

“아니. 뜬소문이 아니야. 그게 거짓말이라면 왜 다른 녀석들이 한곳으로 모이려고 들겠어?”

주변에서 웅성거림이 커졌다.

혹시나 살아남을지 모른다는 희망이 그들을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꺼내주었다.

“그렇다면 그게 사실이란 말이야?”

“그래. 그러니 우리도 그쪽으로 한번 가보는 게 어때? 어차피 이렇게 있으나 저렇게 있으나 뭐라도 해보는 게 차라리 낫지 않아?”

남자의 제안은 퍽 흥미로운 것이었다. 주변에 모인 범죄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 가만히 죽치고 있다간 추적자들이 들이닥칠 확률이 높았다. 추적자들은 고랭크 헌터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들보다 강했다. 싸우면 무조건 진다.

차라리 그렇게 무기력하게 당할 바에야 조금이라도 기회를 잡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다.

“그래서, 방향은 알아?”

“어. 거리가 있지만, 우리 정도라면 그렇게 오래 갈 필요도 없어.”

“그렇다면 지금 당장 가지.”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어두울 때 움직여야 했다. 해가 뜨면 보는 눈이 많아질 테니까.

챙길 짐은 얼마 없었고 대부분 몸뿐이라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괴물>과 계약을 맺은 람브로눅스의 생존자들은 싸늘한 밤공기를 가르며 움직였다.

그리고 그런 자들을 내려다보는 사람이 있었다.

“예. 확인했습니다. 놈들이 움직입니다.”

[방향은?]

“<일루베 아르카>가 있는 장소입니다. 아무래도 남은 잔당들을 모두 끌어모으는 것 같습니다.”

[계속 지켜보도록. 괜히 건드렸다가 다른 녀석들이 눈치채서는 안 돼. 저런 송사리보다는 더 큰 녀석들을 노려야 한다.]

“예. 알겠습니다.”

<세계연합> 소속 A랭크 헌터인 조쉬 알테라는 자신의 능력인 <추적자의 눈>을 활성화하며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범죄자들의 뒤를 쫓았다.

그와 계약을 맺은 영령은 유럽에서도 인지도가 있고 유명한 <로빈 후드>

레인저 클래스인 그는 감각이 예리했고 무언가를 찾거나 추적하는데 매우 최적화된 헌터였다.

그는 상사의 명령을 받아 은밀하게 어둠에 스며들었다.

&

“예상했던 대로 놈들이 움직인다고 합니다.”

“그거참, 다행이네요.”

현찬은 <세계연합> 소속 간부의 말을 들으며 모니터에 시선을 던졌다. 곳곳에 뿌려진 드론이 넓은 범위를 전부 촬영하고 있었고 지상에서 열심히 뛰어가는 범죄자들을 촬영하고 있었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적외선 촬영으로 그들의 모습은 잘 보였다. 몇몇은 실루엣이 흐릿했는데 아마 독특한 <괴물>과 계약을 맺은 영향일 것이다.

가까이서 촬영할 수는 없지만, 대략적인 동태를 살피는데 드론만 한 것이 없었다. 놈들의 대화를 엿듣는 건 추적자들이 훌륭히 수행하고 있었다. 혹시나 감이 좋은 녀석이 있을 것을 대비해서 추적자의 수준도 최소 A랭크로 맞추었으니 들킬 염려는 없으리라.

“지금까지 조심스럽게 움직였는데 저희 의도대로 가지 않으면 재미가 없죠.”

“예. 덕분에 모든 상황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잔가지는 거의 다 쳐냈다. 이제는 처리하기 귀찮을 정도로 뿔뿔이 흩어진 잔존 세력이 뿌리로 몰려들고 있었다. 놈들이 한곳에 모이는 순간, 이쪽에서 본격적으로 움직일 것이다. 현찬은 승리를 확신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적들의 결집은 계속됐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적들은 현찬이 아는 게이트로 모이고 있었다.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으며 관심조차 없는 게이트였다. 간혹 몇몇 헌터들이 호기심으로 들어갔다가 실종되는 게이트였다.

‘이제 곧 시작이다.’

놈들이 전부 모이는 순간 현찬이 움직일 것이다. 현찬뿐만이 아니다. 이곳과 동떨어진 장소에서 다른 오버랭크 헌터들도 준비하고 있었다.

중국의 오버랭크 헌터 양 리화.

미국의 오버랭크 헌터 알렉세이 윌터.

이 둘도 이번 싸움에 참여했다.

아쉽게도 안드레이는 유럽 쪽에 남은 잔당들을 처리하느라 이곳에 찾아오지 못했다. 유럽의 범죄자들은 나름 마피아와 연줄이 깊었다. 그들은 사회에 조용히 숨어들었고 복수를 위해 칼을 갈았다.

그들은 사방으로 퍼져 산발적인 테러를 가하고 있었고 안드레이는 급한 불을 끄기 위해서 그쪽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한 명이 빠진 것은 아쉬운 일이었지만 부족하지는 않았다. 오버랭크 헌터 셋이 모인 것만 해도 전무후무한 전력이었다. 이 셋이 마음만 먹는다면 어지간한 나라 하나를 말아먹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병력은 더 있었다. 각국에서 이름을 날리는 S랭크 헌터들도 더러 있었고, A랭크 헌터들까지 더하면 그 수는 매우 많았다. 당연히 한국의 S랭크 헌터중 하나인 <김선달>의 계약자 김은혁도 참여를 했고 최근에 S랭크에 오른 황설영도 마찬가지였다.

A랭크 헌터까지 오른 차세대 유망주인 서다은과 최강윤도 참전했다.

황룡클랜 간부인 이한율과 김승태도 모였고 어지간한 클랜의 유망주들은 거의 다 모였다.

“이야. 요즘 얼굴 보기 참 힘들어?”

“어. 오랜만이야.”

현찬은 이한율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만남은 이 전에도 몇 번 가졌지만, 현찬이 본격적으로 난제의 사냥을 발표한 이후로 대화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이한율은 어깨를 으쓱였다. 현찬이 바쁜 걸 아니까 딱히 그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이번 전투에서 너에게 거는 기대가 커. 적들도 만만치 않잖아? 이쪽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강한 사람들이 앞에서 쓸어줘야 하니까. 무엇보다 네가 싸우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보고 싶기도 하고.”

이한율은 몸이 근질거리는 걸 참을 수 없는지 씨익 웃었다. 그녀의 성격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투를 원하는 걸 보면 조금 더 심해진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아마 계약을 맺은 영령과의 동조율이 높아져서 그런 걸 수도 있었다.

“뭐. 열심히 해 볼게.”

“오오~ 자신감~.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우리 클랜장 님이 너 보고 싶다더라고.”

“클랜장 님?”

대한민국 5대 클랜 중 하나인 황룡클랜의 클랜장은 당연히 S랭크다. 현찬도 그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직접 만난 적은 없어서 호기심이 동했다.

“그래서 직접 오셨어.”

“직접 오셨다고?”

현찬은 한 거대 클랜의 클랜장이 위험한 싸움이 될지도 모르는 곳에 나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하지만 자유와 개인 의지를 중시하는 클랜인 만큼 왠지 황룡클랜의 클랜장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 녀석. 어디 있나 했더니 여기서 농땡이를 피우고 있었구나?”

이한율의 머리에 꿀밤을 먹이며 등장한 사람은 묘령의 여인이었다. 얼핏 보면 이한율과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서 서로 언니, 동생 할 정도로 젊어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무언가 연륜이 느껴졌다. 그녀는 현찬을 보더니 부드럽게 웃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황룡클랜 마스터 김은주라고 해요.”

황룡클랜 클랜장 김은주.

영웅급 영령이자 의로움과 자유의 대명사인 <홍길동>의 계약자.

그녀가 손을 내밀자 현찬은 악수를 받아주었다.

“강현찬입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직접 보다니 영광이네요.”

“어머. 오버랭크 헌터가 고작 S랭크 헌터한테 그렇게 말하니까 너무 그렇다~. 너무 격식 차리지 말고 편하게 부르세요.”

“아씨! 클랜장 님! 머리는 때리지 말라고 했잖아요!”

“넌 맞아도 싸.”

“악! 또 때린다! 현찬아 봤지? 우리 클랜장 님 아주 폭력녀다? 저러면서 저 나이까지 시집도 못가고 평생 노처녀로 늙어 죽…… 아야야야!”

“오호호호. 우리 동생, 요즘 너무 건방져졌어? 랭크 하나 올랐다고 뭐 좀 달라진 거 같지? 예전처럼 심도 있게 대화라도 나누자꾸나.”

김은주는 현찬에게 교태로운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것은 현찬에게 흑심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자연스럽게 나오는 일종의 버릇 같아 보였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아무래도 자리가 자리이다 보니 이 이상 대화를 나누기는 좀 그렇네요.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또 만나요.”

“아, 네.”

김은주는 이한율의 귀를 잡아끌며 어디론가 떠났다. 이한율의 비명이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현찬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주변 사람들도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덕분인지 잔뜩 긴장감 넘치던 공기가 조금은 부드럽게 변했다.

“자. 이제 슬슬 움직여 볼까요?”

싸움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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