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
125화 변화의 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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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찬이 일본 난제인 <십미천호>를 사냥하고 나서 몇 주의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세상은 눈에 띌 정도로 빠르게 변했다. 각 나라가 서로 연합하며 하나의 거대한 조직을 이루었고 순식간에 기초부터 다져지며 발전해나갔다.
뛰어난 헌터가 많은 국가, 특히나 강대국들은 당연히 참여했으며 그들이 뭉치는 것만으로도 지구상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최대, 최강 규모의 집단이 탄생했다.
이른바 <세계연맹>이라 불리는 이 집단은 결성하자마자 실력 있는 헌터들을 고용하여 2가지 임무를 맡겼다.
첫 번째는 세계 각지에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거나 혹은 너무 소소해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게이트의 클리어.
두 번째는 아직도 남아서 세상을 뒤흔들려는 범죄 조직의 소탕.
세계연맹의 주된 목적은 바로 이 2가지였다. 앞으로 있을 <대통합>을 위해서라도 세계는 빠르게 안정을 찾아야 했다. 그것을 가장 잘 아는 게 바로 오버랭크 헌터들이었고 특히 미국의 오버랭크 헌터인 알렉세이 윌터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자 노력했다.
그의 노력은 빛을 보았다. 인지도도 있고 많은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래서 그의 말은 사람들을 따르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고 그들에게 믿음과 신뢰를 심어주었다.
무엇보다 높은 자리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중간 단계로 세상 모든 사람에게 알림창이 뜬 시점부터 그들은 무언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 방향을 정확히 짚지 못해서 고민하던 차에 알렉세이가 길을 제시해 줬으니 남은 거라고는 쭉쭉 나아가는 것뿐이었다.
“그렇다 해도 정말 빠르네. 단 몇 주 만에 세상이 놀랄 정도로 변했어.”
헤르메스는 실체화한 육체로 바위에 걸터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동남아의 외딴 섬의 하늘은 매우 맑고 높았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었지만, 헤르메스는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마저도 기분이 좋은지 실실 웃었다.
“인간이란 원래 그렇지. 항상 서로 반목하고 싸우고 갈라서는 것 같으면서도 하나가 되면 그 무엇보다도 강하다. 그들은 언제나 그랬지.”
헤르메스의 옆에서 아테나가 뭘 당연한 걸 하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녀는 반영체화 상태로 공중에 떠다니지 않고 두 다리로 땅을 밟고 서 있었다. 이젠 아테나도 현찬의 <소환> 덕분에 현실에 육신을 지니고서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만들어진 육신이기에 본신의 힘의 극히 일부밖에 다루지 못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매우 강했다.
그녀가 아무리 약해도 신은 신이다. 극히 일부의 힘이라 하더라도 인간들보다 훨씬 더 월등한 것은 당연했다. 물론 본신의 힘에 비하면 매우 약하지만, 아테나는 불만을 느끼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토록 기대하던 21세기의 음식이라는 것을 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지금도 아테나의 한 손에는 후라이드 치킨이 담긴 박스가 쥐여 있었다.
“그런데 좀 적당히 먹는 게 어때?”
헤르메스마저도 아테나의 먹성에 질렸는지 혀를 내둘렀다.
육신을 얻고 나서 아테나는 지금까지 쌓였던 한을 풀기라도 하듯 온갖 음식을 섭취했다. 애초에 마력으로 이루어진 육체여서 음식을 원한다면 계속 먹을 수 있었고 아테나는 기꺼이 그것을 즐겼다.
어지간한 산해진미를 다 맛본 헤르메스조차 치킨 하나에 무릎 꿇을 정도였다. 평소에 헤르메스가 먹는 것을 옆에서 입술을 축이며 지켜보던 아테나는 그 맛이 어떨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뭐, 뭐가 어쨌다는 거냐! 나는 많이 먹은 적 없다!”
“…… 많이 먹는다고 말 한 적 없거든? 혼자서 찔리니까 그렇게 말하네.”
헤르메스의 타당한 지적에 아테나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현찬은 그 모습을 보면서도 역시 여신은 여신이구나 생각했다.
한 손에 치킨 박스를 들고 입가에 후라이드 치킨의 껍질 부스러기와 기름이 묻었는데도 창피해서 얼굴 붉히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아테나가 지닌 도도한 기품은 고작 올리브유로 지워질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많이 먹는 게 뭐 어때서! 살도 안 찌는데!”
“…… 아니, 뭐 그렇긴 한데.”
헤르메스는 조금 난처한지 머리를 긁적였다.
“우리 계약자가 열심히 몬스터와 싸우는데 거기서 치킨이나 뜯으며 구경하는 건 좀 아니지 않아?”
헤르메스의 말에 현찬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그러나 가까스로 목 근육에 힘을 주어서 멈추었다. 괜히 헤르메스 편을 들었다가는 저 전쟁의 여신님께 자칫 밉보일 수도 있었으니까.
과연 헤르메스의 말이 정론이었는지 아테나의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붉게 물들었다.
“그, 그그그그게 뭐 어때서! 계약자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지켜보는 게 내 의무이지 않느냐!”
“보통은 함께 싸우겠지?”
“그러는 헤르메스 너도 얌전히 지켜보기만 하지 않았나!”
“그래도 치킨 뜯으면서 보지는 않았잖아?”
“크윽!”
현찬은 두 신이 티격태격 말다툼하는 것을 뒤로하고 눈앞에 쓰러진 사체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새였다.
날개를 펼친다면 날개의 끝에서 끝까지의 길이가 거의 500m는 될 정도로 거대한 놈이었다. 몸통은 그에 비교해서 작지만 그래도 어지간한 건물은 그냥 아래로 내려다볼 정도의 높이를 자랑한다.
동남아의 섬 하나에 둥지를 틀고 사는 거대한 새.
난제 <대붕응자조>
녀석은 결국에 현찬에게 토벌당했다.
덩치가 워낙 크다 보니 바닥에 쓰러져 있는데도 자그마한 동산이 우뚝 선 느낌이었다. 그만큼 녀석은 강했다. 날갯짓을 한 번 할 때마다 폭풍이 휘몰아쳤고 그 거대한 몸이 쭉쭉 나아갔다.
어떻게 보면 다른 <난제>들과 비교하면 지닌 힘의 위력은 강하지 않지만, 녀석은 하늘을 날아다녔다. 다른 헌터들이 <대붕응자조>를 쉽게 토벌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대부분의 헌터들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놈들을 상대할 마땅한 방도가 없었다.
클래스가 궁사이거나 마법사 혹은 도술, 주술을 사용하는 헌터라면 그래도 하늘을 나는 몬스터에게 타격할 수 있다. 다만 몬스터의 수준이 적당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린다.
날개를 펼치면 자그마한 섬 하나를 뒤덮을 녀석을 상대로 화살은 이쑤시개만도 못했고 마법과 주술을 동반한 공격도 의미가 없었다. 날갯짓으로 일어나는 바람이 모든 공격을 전부 다 깨버렸으니까.
심지어 놈은 외딴 섬에서 혼자 살았고 일정 범위 내에서 비행 물체를 감지하면 주저 없이 움직였다. 섬으로 다가갈 방법은 배를 타고 가거나 혹은 매우 낮게 비행해 접근하는 방법뿐이었다.
당연히 <대붕응자조>는 가장 사냥하기 힘든 <난제>라는 타이틀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공략 불가 판정을 받은 <대붕응자조>도 결국엔 임자를 만나고 말았다.
거대한 덩치를 지닌 몬스터에게 피해 줄 수 있으며,
하늘을 날아다니고,
어떠한 상성에도 대처가 가능한 올라운드 헌터가 세상에 딱 한 명이지만 존재했으니까.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이거였다.
“주인님. 이거 되게 맛있어 보여요.”
“엉. 그래.”
대붕응자조의 시체를 보고 어스름달이 입맛을 다셨다. 녀석은 꾸물거리더니 현찬의 오른쪽 어깨 위에서 인간 형태의 자그마한 얼굴을 만들며 그렇게 말했다. 현찬은 그런 어스름달의 머리를 손으로 꾹 누르며 다시 원래대로 집어넣었다.
“너 내가 사람 모습 할 때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지?”
“아. 죄송해요.”
예전에 한 번 어스름달이 현찬의 오른쪽 어깨에 사람 머리를 내밀었다가 헤르메스가 초갈이라고 놀린 적이 있어서 현찬이 정색한 적 있었다. 몸통은 하나인데 사람 머리가 2개나 달린 기괴한 모습이 퍽 웃겼는지 헤르메스는 종종 그때를 떠올리며 웃고는 했다.
‘자기는 눈 100개 달린 거인도 봤으면서 머리 2개 달린 거 보고 웃다니, 거 참.’
현찬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대붕응자조>의 마석을 추출하는 걸 잊지 않았다. 검으로 녀석의 가슴을 가르고 손을 뻗었다. 어스름달의 검고 끈적거리는 몸체가 채찍처럼 쭈욱 늘어나 벌려놓은 상처에 파고들었다.
그렇게 길게 늘어난 어스름달은 <대붕응자조>의 몸 내부를 살피다가 마석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뽑아내는 데 성공했다. 거대한 덩치에 걸맞게 마석은 상당히 컸다. 잠재한 에너지를 고려하면 질적인 부분도 난제에 걸맞았다.
“그래도 그때 잡았던 <십미천호>에 비하면 상당히 차이가 나네요.”
“그건 그 녀석이 사기였던 거야.”
<십미천호>를 잡고 얻은 마석의 일부는 어스름달의 먹이로 주었다. 녀석은 덕분에 현찬과 싸우기 전보다 훨씬 더 강해진 상태였다. 일부러 덩치를 키우지 않고 밀도를 높여서 현찬의 방어구로서 훌륭한 역할을 했다.
“그런데 저기 신님들 이제 서로 주먹까지 휘두르는데 말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내버려 둬.”
말이 주먹싸움이지 일방적으로 아테나가 때리고 헤르메스가 도망치는 것에 가깝다. 육체를 얻고 나서부터 둘의 관계는 항상 이랬다. 아테나가 음식을 먹고 헤르메스가 놀리고 결국에는 맞는 식. 마치 잘 짜인 시트콤을 보는 것 같았다.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진짜 잘 지내네.”
“…… 저게 잘 지내는 거예요?”
“원래 남매는 다 저래.”
현찬도 어릴 적에는 여동생이랑 많이 투덕거렸다. 지금은 성인이 되었고 둘 다 철이 들어서 그때처럼 지내지는 않지만 저 두 신을 보면 그때의 광경이 종종 떠오르고는 했다.
“둘 다 그만하고 이제 가자.”
현찬은 여기에 혼자 왔기 때문에 갈 때도 혼자 가야 했다. 헤르메스는 바로 영체화 했고 아테나도 마찬가지였다.
[빨리 가자. 나 배고파.]
[흐음. 이번에는 불고기라는 것을 먹어보고 싶구나.]
[조금 전까지 치킨 먹어놓고 뭘 또 먹어?]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먹어두겠냐?]
둘은 영체화 해서도 한 치 밀림도 없이 신경전을 펼쳤다. 싸우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계속 지속하니 현찬도 이젠 지쳐서 말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아직 처리해야 할 일들이 상당히 많았다. 일단 난제의 사냥은 끝났지만, 세계 곳곳에는 아직 남은 범죄자의 잔당들이 있었으니까. 그들은 여전히 사회의 암 덩어리였고 그들을 없애야 하는 의무는 여전히 남았다.
‘이것도 이제 막바지다.’
몇 주 동안 세상은 변했다. 그중 역시 가장 큰 것은 역시나 세계연합이 주도하는 범죄자들의 소탕일 것이다. 한때 세상을 공포에 떨게 했던 데스페라도와 람브로눅스는 대부분이 와해해 그 수가 크게 줄었다.
남은 잔당들은 더욱 독해졌다. 대부분 토벌당한 건 조직에서도 별로 강하지 않은 잡졸뿐이었다. 간부 정도 되는 인물은 몸을 숨기며 더욱 똘똘 뭉쳤다. 그들도 서로 합동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와해한 조직 구성원들의 구심점이 된 것이 바로 <일루베 아르카>였다.
놈들은 세계 모든 범죄자를 한곳으로 긁어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현찬이 바라던 바이기도 했다.
‘놈들이 다 뭉쳤을 때 한 번에 없앤다.’
본거지를 알아냈지만, 아직도 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놈들은 결국 하나로 뭉칠 것이다. 그걸 위해서 일부러 주변의 잔가지만 쳐냈다. 궁지에 몰린 쥐는 서로 뭉쳐서 강해질 것이고 그것은 <세계연합>이 가장 바라던 거였으니까.
그러나 현찬의 표정은 마냥 좋지는 않았다.
‘<대통합>이 가까워졌어.’
어떻게든 늦추려고 했지만, 결국엔 가까워지고 말았다.
이것은 정해진 순리이자 운명이기도 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하나 있었다.
쉽게 당해줄 생각은 없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