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121화 나쁜 놈들 정리하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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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녀석, 단순히 방심해서 <스왈로우>에게 당한 게 아니야.’
현찬은 차근차근 토끼 가면의 기억을 읽었다. 스왈로우에게 당한 영향 때문인지 그의 기억은 군데군데 비어있었다. 다행히도 중요한 기억들은 남아 있었다. 그래서 전체적인 기억 흐름은 문제없이 확인할 수 있었다.
토끼 가면은 스왈로우의 영역에 들어왔다.
본인의 불찰도 있었겠지만, 스왈로우의 감지 능력은 매우 뛰어났다. 남들 시선에 보이지 않고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토끼 가면을 향해 스왈로우는 공격을 퍼부었다.
토끼 가면은 저항했다. 그는 12명 사도 중에서 가장 민첩하고 움직임이 빨랐다. 수천 가닥이 넘는 뿌리와 줄기의 공격에서도 토끼 가면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는 미꾸라지처럼 숲을 누비며 스왈로우의 영역 바깥으로 향했다.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스왈로우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있다.
토끼 가면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검은 안개 같은 것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그 기억을 읽으며 현찬은 검은 안개가 매우 낯이 익은 것임을 눈치챘다.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것처럼 그것은 끈적하게 토끼 가면의 몸에 달라붙었고 그의 시야를 가렸다. 심지어 검은 안개에는 마비 효과마저 있었다.
피부의 감각이 둔해지며 다리가 저렸다. 토끼 가면은 눈을 부릅뜬 채 검은 안개로 가려지기 직전 숲 가운데에 서 있는 사람을 노려보았다.
검은 로브에 새하얀 새 부리 가면을 쓴 자.
토끼 가면과 같은 12사도의 한 자리를 차지한 새 가면이었다.
토끼 가면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새 가면은 분명히 이곳에 올 이유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한국을 담당하고 있어야 했다. 그렇다면 왜 그는 지금 여기에 왔을까?
왜 토끼 가면을 향해 공격을 가한 걸까?
토끼 가면은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단 하나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그는 배신당했다. 새 가면이 그를 배신했다.
“새 가면!”
그것이 토끼 가면의 마지막 외침이었다. 검은 안개는 토끼 가면과 분노에 찬 고함을 함께 삼켜버렸다. 검은 안개의 주위로 스왈로우의 나무뿌리가 지면을 타고 스멀스멀 다가왔다. 나무뿌리는 거침없이 검은 안개에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토끼 가면의 마지막이었다.
기억이 끝나자 현찬의 표정이 굳어졌다. 토끼 가면의 기억이 보여준 모습이 도저히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현찬은 손끝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에 빠졌다.
‘새 가면이라고? 녀석은 같은 사도가 아니었던 건가? 대체 무슨 이유로 놈은 토끼 가면을 배신한 거지? 토끼 가면이 조직을 배신 한 건가? 아니, 그건 아니야. 기억 속 토끼 가면은 여전히 조직을 향해 충성을 바치고 있었어. 그렇다는 것은 새 가면이 배신자라는 소리인가?’
하지만 토끼 가면의 기억 속 새 가면은 조직의 수장인 ‘그분’의 총애를 받는 사도였다.
그런 새 가면이 배신한다는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내분이라도 일어난 건가?’
아직은 정보가 부족해서 명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하지만 현찬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갑자기 알 수 없는 일을 떠맡은 기분이네. 그래도 얻은 건 많아.’
우선 토끼 가면의 금제가 절반이 날아간 것이 컸다. 금제 일부는 반응했지만, 나머지 일부는 작동하지 않았다.
금제가 방어하고 가려주는 정보 중 중요한 몇 개가 현찬에게 흘러들어왔다.
현찬은 혹여나 토끼 가면이 죽을까 빠르게 정보를 긁어냈다.
그 광경을 유심히 지켜보던 알렉세이가 현찬에게 다가왔다.
“뭐 얻은 거 있나?”
“꽤 많이요. 스왈로우 덕분인지 금제가 상당수 작동하지 않아서 몇 가지 중요한 정보를 얻어냈어요.”
현찬은 알렉세이와 황설영에게 새롭게 얻은 사실들을 알려주었다.
첫 번째는 다른 범죄자들이 사회의 시선에 걸리지 않고 몰래 활동하는 장소들이었다.
“비밀조직 <일루베 아르카>는 기본적으로 데스페라도와 람브로눅스 녀석들과 연관돼있죠. 아니, 정확히 말하면 두 조직을 뒤에서 조종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현찬과 알렉세이가 브라질에 도착했을 때 벌인 테러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놈들은 <일루베 아르카>의 사도가 가지고 있던 검붉은 수정구를 사용했다.
영령의 계약을 일시적이지만 무효화하는 도구다. 그 정도나 되는 물건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오직 <일루베 아르카> 뿐이었다.
“그런 녀석들이 주로 활동하는 거점을 알아냈습니다. 보니까 저희가 모르고 있던 장소가 많더라고요.”
“흠. 지금까지 네가 확인한 정보가 전부 들어맞은 걸 생각하면 이번에도 확실하겠군. 안 그래도 최근 들어 데스페라도나 람브로눅스 녀석들이 숨어서 활동하는 중이라 찾는데 나름 곤혹이었는데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마주친 셈인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해도 잡졸들은 거의 사라지고 정예만 남았습니다. 기습을 가한다고 하더라도 충분한 준비가 필요할 거로 생각됩니다.”
황설영의 주장은 타당했다. 세계적으로 떠들썩하던 범죄조직은 이제 예전의 위용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범죄자들을 소탕하기 위해 고랭크 헌터들이 직접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이 잡아서 감방에 처넣은 녀석들은 대부분이 잡졸에 불과했다. 살아서 도망을 친 범죄자들은 대부분이 격이 높은 악령이나 괴물들과 계약을 맺은 각성자들이었다.
악마, 괴물, 혹은 역사 속에 존재하는 끔찍한 살인마 등과 계약을 맺은 그들은 하나하나가 무시할 수 없는 악명을 자랑했다.
섣불리 건드리면 오히려 이쪽이 당할 가능성이 컸다.
“그래도 그건 나중에 따로 토벌 인원을 편성할 때 정해도 늦지 않겠지. 다음 정보는 뭐지?”
“두 번째는 바로 유럽에 있는 <난제>에 대한 겁니다. 저희가 지금 <스왈로우>를 토벌하는 동안에 놈들은 양동작전으로 남유럽 지중해 인근에 있는 난제 <울트락투스>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울트락투스>라면 그건가. 그 거대한 파충류.”
“정확히는 다른 세계의 원시시대 공룡에 가까운 녀석이죠.”
난제 <울트락투스>
어는 날 갑자기 튀어나온 거대한 공룡이었다.
녀석은 다른 난제와 비교하면 어딘가 특출난 부분은 없는 몬스터였다.
어스름달처럼 물리 공격에 면역인 것도 아니고 어둠을 부르지도 않는다.
천흉처럼 인간의 몸으로 다른 세계의 기술을 구사하지도 않는다.
스왈로우처럼 숲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놈은 그저 공룡이다. 아주 거대한 공룡.
그게 문제였다.
녀석은 너무 컸다. 그것도 영화에서 나오던 거대괴수보다 훨씬 더 거대했다.
“해당 영상은 나도 본 적 있지. 옛날에 인기 끌었던 괴수 영화 시리즈인 고질라였나? 그것과 엄청나게 비슷하더군. 물론 덩치는 그보다 훨씬 더 크고 움직이기만 해도 주변 건물이 와르르 무너지는 건 더 심했지만 말이야.”
<울트락투스>는 높이만 500m에 달하는 거대한 공룡이다. 그 거대한 몸집은 단순히 움직이기만 해도 주변에 엄청난 지진을 초래했다.
덩치가 너무 커서 어지간한 미사일의 폭격은 먹히지도 않았고 심지어 고랭크 헌터들의 공격마저도 두껍고 단단한 피부에 막혀 사라지고 말았다. 타격을 준다고 해도 거대한 덩치에 비하면 모기 물린 상처만도 못했다.
그렇게 <울트락투스>는 도시 몇 개를 초토화하고 지중해의 깊은 바다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지금은 어딘가에 조용히 있는 거로 알고 있는데.”
<울트락투스>는 덩치가 거대한 녀석이라서 마석 에너지만으로 자신의 모든 힘을 대처하지 못했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바다에서 튀어나와 게이트 밖으로 튀어나온 다른 몬스터들을 잡아먹거나 사람들을 먹어치우고는 했다. 그리고 적당히 배를 채우면 다시 바다로 돌아가 잠에 빠져들었다.
문제는 녀석이 한번 먹을 때 엄청나게 먹는다는 것이었다.
덩치가 10m가 넘는 몬스터도 녀석의 앞에서는 한 입 거리밖에 안 된다. 그런 녀석이 배가 차려면 얼마나 많이 먹어야 한단 말인가?
<울트락투스>가 한번 뜨면 대도시 3개는 그냥 날아갔다. 인명 피해도 엄청났다. 헌터들도 의미가 없었다. 그 헌터들도 사이좋게 <울트락투스>의 배 안으로 들어갔으니까.
그래서 시민들은 지중해 근처에 지내지 않았다. 특히 지중해와 가장 넓은 면적을 맞닿은 이탈리아와 그리스의 피해는 막심했다.
<울트락투스>는 20년 전 일어났던 <대통합> 초기에 나타난 1세대 몬스터이자 최초의 난제였다.
녀석이 지금까지 활개친 건 처음 등장했을 때와 바다에 잠들어 있다가 배가 고파 나타났던 3번뿐이다.
놈은 그 4번의 행동만으로도 재앙이 되기에는 충분했다.
“지금은 수면기가 아니었던 건가.”
“놈들이 깨운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죠.”
딱히 고난도 세뇌가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울트락투스>에게 ‘배가 고프다’라는 생각만 심어줘도 녀석은 알아서 움직이며 눈에 보이는 모든 생명체를 닥치는 대로 잡아먹을 테니까.
사람에게 배고픈 <울트락투스>는 크릴 떼를 삼키는 고래나 마찬가지였다.
현찬의 말에 알렉세이는 별거 아니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예전이었다면 조금 심각했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다르지. 잊었나? <울트락투스>가 가장 최근에 활동했을 때가 바로 7년 전이었어.”
그리고 7년 전에는 유럽의 오버랭크 헌터인 안드레이 다니엘이 없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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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다니엘은 거대한 얼음 산 위에 홀로 서 있었다.
하늘은 맑았고 구름이 없이 뜨거운 태양이 빛을 내리쬐고 있었다.
그가 있는 장소는 에게해의 중심에 있는 크레타섬이었다.
한여름에는 그야말로 살인적인 더위를 자랑하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하늘에서 내려오는 태양의 백광은 뜨거웠지만, 안드레이가 숨을 내쉴 때마다 주변에 뿌연 입김이 서렸다. 주변에 맴도는 냉기는 보이지 않는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안드레이는 얼음산 위를 걸었다. 아니, 안드레이가 밟고 선 것은 산이 아니었다.
얼핏 보면 산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은 <울트락투스>의 얼어붙은 시체였다.
온몸이 차가운 얼음으로 뒤덮인 난제 <울트락투스>는 오랫동안 이어진 악명에 종지부를 찍었다.
안드레이는 <울트락투스>의 시체 위에 서서 자신 앞에 얼어붙은 자를 바라보았다.
12사도 중 하나이자 뛰어난 시력으로 많은 것들을 지켜보는 독수리 가면이었다.
그의 주위로는 검붉은 수정구가 깨진 채 나뒹굴고 있었다.
[안드레이. 내 사랑. 지금 와서 말하기는 좀 그런데 저거 살려뒀어야 하는 거 아니었어?]
“……힘 조절을 잘 못 했어.”
독수리가면은 안드레이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붙은 채 사망하고 말았다. 순간 스카디와 연결이 끊긴 탓도 있었다. 무엇보다 나름 사도라고 해서 강하다고 생각하고 날린 공격이었지만 독수리 가면은 그것을 채 몇 분 버티지 못했다.
주변에서 상황이 끝남을 확인한 헬기들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안드레이는 휘날리는 바람에 은발을 뒤로 넘겼다.
“뭐…… 난제를 잡았으니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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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얼음 무뚝뚝이 실력을 생각하면 그러고도 남겠지. 성격은 괴팍해도 능력은 진짜니까. 아마 지중해 근처에 멋진 얼음 조각상 하나가 새로 생겼을 것 같은데.”
“확실히 그분 실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하겠죠.”
현찬도 만나봤기에 안드레이가 어느 정도의 강함을 지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강하다. 현찬이 불과 관련된 전승을 지닌 영령과 계약을 맺지 않는 상태로 싸우면 높은 확률로 패배할 정도다.
“제가 마지막으로 알아낸 정보는 바로 이겁니다.”
현찬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놈들의 본거지를 알아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