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120화 태양신의 아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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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나.
인도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에서 나오는 대영웅이다.
진정한 주인공인 <아르주나>의 반대편에 선, 어떻게 보면 악역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가지고 있는 신념과 일구어낸 업적은 너무나도 대단했고 그를 대영웅이라 불러도 손색 없게 만들었다.
[신의 버림을 받은 내가 신의 축복을 받은 이의 부름을 받다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카르나는 이 상황 자체가 조금 어이없는지 입가에 쓴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는 인간 소녀 쿤티와 태양신 수리야 사이에서 태어난 반신이다. 아버지에게서 불사를 상징하는 황금갑옷과 귀걸이를 받았지만, 신의 농간으로 그것을 벗어 던지고 저주받아 죽고 말았다.
그런 카르나의 말에 헤르메스가 입술을 내밀며 투덜거렸다.
[칫. 너무 신들을 똑같이 보는 거 아니야? 너희 인도 쪽 애들이랑 우리랑 비교하지 말라고. 우리는 적어도 저주를 내리고 그걸로 후회하면서 질질 짜는 짓은 안 해.]
헤르메스의 말을 듣다 보니 현찬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인도 신들도 나름대로 실수가 잦지만, 온갖 막장을 담당하는 그리스의 신이 저런 말을 하니 어이없었기 때문이다. 아테나도 그 점을 인지하는지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였다.
현찬은 헤르메스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입을 다물기로 했다.
물론 카르나도 영령으로서 격이 높고 영령이 되며 많은 것을 알게 되었을 테니까 나름의 지식이 있을 것이다.
그도 그리스 신들에 관해 아는 게 있지만, 굳이 토 달지 않았다.
[강현찬이라고 했나.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일단 그대의 부름에 감사를 전하지.]
‘저야말로 불러서 와주니 고맙죠.’
[그래서 내가 상대해야 할 적은 바로 저 끔찍한 괴물인가? 숲 자체가 살아서 움직이다니 과연 다른 세계의 괴물은 어떻게 보면 우리 쪽과 확연히 다른 면이 있구나.]
그래도 상관없다.
카르나는 그렇게 말하며 현찬의 몸에 자신의 힘과 권능을 불어넣어 주었다.
현찬의 몸이 하늘 높이 떠올랐다.
[상대가 그 누구라도 이렇게 부름을 받고 찾아온 이상 싸워야 하는 것은 변하지 않으니.]
현찬의 몸에 눈부신 황금의 갑옷이 입혀졌다. 귓불에 태양처럼 생긴 황금 귀걸이가 생겨났고 등 뒤로 붉은 망토가 펄럭였다. 망토의 끝은 불꽃처럼 갈라지며 타올랐다.
[나, 태양신의 아들 카르나는 계약자의 부름에 응해 적을 멸하리라.]
뜨거운 열기가 현찬의 주위로 몰아쳤다. 그것은 현찬을 중심으로 반경 100m 이내의 모든 존재를 전부 다 태워버렸다. 난제 <스왈로우>의 영향 아래에 있는 나무나 풀들은 견디지 못하고 잿더미로 변해버렸고 흙으로 뒤덮인 지면도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와우! 정말 끝내주는 위력이군. 아무리 나라도 저기에 계속 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알렉세이는 눈을 크게 뜨며 감탄했다. 현찬이 무언가 한다고 해서 자리를 비켜주기는 했지만, 썩 내키지 않았다. 동료라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함께 싸워야 하는 것이 알렉세이의 지론이었다.
하지만 지금 스왈로우의 숲의 중심에서 타오르는 화염을 보니 그런 불만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꽤 격이 높은 영령의 힘이 느껴져. 신은 아니지만, 거기에 준하는 존재야.]
“대충 전쟁의 여신님도 계신 것을 보고 눈치챘지만 저기서 다른 영령까지 부르다니 너무 사기 아닌가 싶은데.”
알렉세이는 투덜거리면서도 현찬이 말해준 토끼 가면이 있는 나무로 다가갔다. 혼수상태에 빠진 토끼 가면이 거대한 나무뿌리 근처에 누워있었다. 세상의 이면에 숨어서 혼돈을 초래하는 조직 <일루베 아르카>의 12사도 중 하나였다. 알렉세이는 토끼 가면의 허리춤을 붙잡아 포대 매듯이 어깨 위에 얹었다.
“뭐, 저 정도로 날뛴다면 굳이 도와줄 필요는 없겠지.”
알렉세이의 시선 끝에서 점점 더 거대하게 타오르는 화염이 보였다. 그것은 이제 그냥 불이라기보다는 지상에 강림한 또 다른 태양처럼 느껴졌다.
우우우우우우!!
현찬 주변을 둘러싼 숲이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숲 자체를 상징하는 <스왈로우>의 고통에 찬 괴성이기도 했다. <스왈로우>는 난생처음 위기라는 것을 느꼈다. 상대는 강하고 위험했다. 지금까지 잡아먹지 못한 존재가 없다고 자부하는 자신의 숲을 송두리째 태우고 있었다.
“전부 불타올라라.”
<차용>[비자야]
테레이오스테의 형상이 무너지더니 이내 붉은 활로 변했다. 현찬은 활의 시위를 강하게 당겼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활시위에 붉은 화살이 하나 생겨났다.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를 놓자 붉은 화살은 수직으로 떨어지며 지면에 적중. 그대로 거대한 화염의 폭풍을 일으켰다.
<브라흐마스트라(Brahmastra)>
인도의 신 <브라흐마>의 힘이 실린 <아스트라(Astra)>는 그야말로 거대한 폭탄 같았다. 그 폭발에 휩쓸리는 것들은 재조차 남기지 못하고 그야말로 증발하듯 사라졌다. 일전에 보았던 <아폴론>의 태양 마차와 비슷한 위력이었다.
그 위력이 너무 강하다 보니 거대한 폭발의 충격과 함께 열 폭풍이 숲에 휘몰아쳤다. 그것은 멀리서 구경하는 황설영과 알렉세이에게도 미칠 정도였다.
황설영은 팔을 들어 얼굴에 가해지는 열기를 막으며 싸움을 눈에 담았다.
‘대단하다. 엄청난 위력이야. 만약에 내가 숲을 따로 분리하지 않았다면 저 공격에 아마존 숲 일대가 불바다가 됐을 거야.’
현찬이 황설영을 데리고 온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기본적으로 숲으로 이루어진 스왈로우를 찾는 데에 황설영이 가장 특화된 능력을 지니고 있었고 무엇보다 그녀의 도움이 있어야만 현찬이 <카르나>의 힘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다.
스왈로우는 거대한 숲에 존재하는 암세포다. 그런 암세포를 없애기 위해서는 암세포 자체를 통째로 도려내야만 했다. 그리고 현찬이 지금 사용하는 방법이 바로 그거였다. 스왈로우를 통째로 불태워 버리는 것.
물론 이렇게 하면 문제가 생긴다.
스왈로우를 없애기 위해서는 엄청난 힘이 필요하다. 녀석이 도망갈 틈조차 주지 않고 그야말로 압도적인 무력으로 찍어 눌러야 했다.
무려 반경 1km나 되는 숲을 한꺼번에 없애야 하는 일이다. 그만한 위력을 가진 공격이 단순히 스왈로우가 지배하는 영역만 깔끔하게 태울 수 있을 리 없었다.
당연히 주변의 숲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만다.
특히나 반신이며 태양신의 아들인 <카르나>가 가하는 공격은 전부 강력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다. 조금이라도 힘 조절에 실수하는 순간 불은 숲을 타고 사방으로 번져나갈 것이었다.
그렇기에 황설영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었다.
황설영은 <두두리>의 능력을 이용해 <스왈로우>의 숲을 따로 절개수술 하듯 떼어냈다.
<스왈로우>의 숲에 불이 붙더라도 다른 곳으로 번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보란 듯이 성공했다.
이미 다른 숲과의 거리를 충분히 벌린 상태이기 때문에 현찬은 마음 놓고 공격을 퍼부을 수 있었다. 현찬은 쏘는 화살마다 <브라흐마스트라(Brahmastra)>를 담아서 쏘았다.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붉은 빗줄기가 스왈로우의 몸을 집어삼켰다.
[정말로 대단한 방어력을 지녔구나. 이렇게 공격을 쏟아부었는데도 살아 있다니.]
스왈로우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녀석은 점차 진화했다. 불길에 저항조차 하지 못했던 녀석은 시간이 지날수록 저항하기 시작했다.
불길에도 타오르지 않고 꿋꿋이 견디는 스왈로우를 보면 이 생명체를 향한 자그마한 감탄마저 일어날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스왈로우가 점차 강해진다는 것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불안하거나 초조하지 않았다. 현찬은 아직 <카르나>의 진짜 힘을 사용하지도 않았으니까.
마력을 더욱 불어넣으며 그대로 <브라흐마스트라>를 지상으로 강하게 내려 꽂는다. 불길이 강하게 일어나며 스왈로우의 저항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지면이 녹아내리고 생명력이 가득하던 나무는 뿌리까지 사라졌다.
저항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힘까지만 가능한 것이다.
모든 것을 무로 되돌릴 압도적인 무력의 앞에서는 그런 저항은 바람 앞의 촛불에 불과했다.
“나와라.”
숲은 거의 다 타버렸다. 그런데도 현찬은 스왈로우를 향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네놈의 본체가 아래에 숨어있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그런 빛도 들지 않는 어두운 땅속에서 쪄 죽기 싫다면 어서 나와야 할걸.”
녀석이 지배하는 숲이 다 타버린 이상 더는 놈의 팔다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남은 것은 숲의 중앙 지하 깊은 곳에 숨어서 영토를 확장하거나 이동하던 <스왈로우>의 본체만이 있을 뿐.
쿠르르릉!
현찬의 예상대로 본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지면이 크게 흔들거리더니 녹아내리는 대지를 뚫고서 거대한 무언가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것은 뭐라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징그럽게 생긴 괴생명체였다.
직경 50m는 될법한 거대한 구체의 몸통은 표면이 나무껍질처럼 갈색을 띠고 있었고 우둘투둘했다. 그런 몸 곳곳에 숲 전체에 뻗어져 있던 거대하고 긴 촉수들이 꿈틀거리고 있었고 몸 곳곳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달린 수십 개의 입이 뻐끔거렸다.
[으윽, 징그러워.]
헤르메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구워어어어어어!
스왈로우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녀석은 거대한 촉수를 현찬에게 뻗었다. 현찬은 가만히 공격을 맞아주었다. 팅! 팅! 거대한 촉수는 현찬의 황금 갑옷에 부딪혀 속절없이 튕겨 나갔다.
착용자에게 불사를 선물하는 태양신의 갑옷과 귀걸이는 현찬에게 가해지는 모든 충격을 무효화했다.
뇌신 인드라도 황금 갑옷의 뛰어남을 잘 알았기에 자신의 신창과 교환했을 정도였다.
[이 세계에 족적을 남겼을 정도의 괴물이라면 나의 전력을 받아내기에는 충분하겠지.]
<카르나>는 스왈로우를 우습게 보지 않았다. 오히려 전력을 다해서 쓰러뜨려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거만하지 않았고 모든 싸움에서 최선을 다하는 훌륭한 전사였다.
그것은 현찬도 마찬가지였다. 괜히 힘을 아끼며 싸웠다가 만에 하나라도 허점을 찔릴 바에는 모든 힘을 다 쏟아서 끝내는 것이 훨씬 나았다. 게다가 <스왈로우>가 가진 생명력을 생각하면 적당한 공격으로 끝낼 수 있다는 확신도 들지 않았다.
‘그러니 전력을 다한다.’
현찬이 오른손을 하늘을 향해 뻗었다. 황금의 갑옷과 귀걸이가 빛을 뿜으며 사라졌다. 그 대신 현찬의 손에는 태양의 빛을 그대로 가져온 것처럼 밝은 광휘를 내뿜는 창이 쥐여 있었다.
[비사비 샤크티(Vasavi Shakti)]
뇌신 인드라가 건네준 최강의 무기이자
카르나가 사용할 때는 상대방을 대상 불문하고 반드시 죽이는 지고의 무기다.
그것은 상대가 끔찍한 괴물이라고 해도, 설사 신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기뻐하라 괴물이여! 이 카르나가 너를 향해 최고의 선물을 선사하는 것을!]
현찬은 오른팔을 뒤로 크게 젖히고는 그대로 앞을 향해 휘둘렀다.
무언가 특별한 이펙트는 없었다.
그저 허공에 가늘고 빨간 줄이 하나 그어졌을 뿐이다.
중간과정이 생략된 것처럼 보이는 엄청난 쾌속의 일격이 <스왈로우>의 동그란 몸통을 꿰뚫고 지나갔다.
크와아아아아아아!
[비사비 샤크티]가 뚫고 지나간 스왈로우의 몸이 점차 검게 물들더니 강렬한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순식간에 스왈로우의 몸속까지 불로 지지고 녹이고 태우며 번져나갔다.
고통에 찬 괴물의 비명이 아마존 숲에 난무했다.
그러나 그 괴로움이 한 줌 잿물로 변해 사라지는 건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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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하군, 그래.”
“에이 뭘요.”
황설영과 함께 휴식을 취하던 알렉세이의 칭찬에 현찬은 멋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보다 녀석의 상태는 어떻죠?”
“보시다시피 살아있지.”
다만 이런 상태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살 수 있을지는 모른다. 이미 스왈로우에게 너무나 많은 기력을 빨린 상태라 정신을 차릴 수도 없었고 생명의 불꽃은 빠른 속도로 꺼져가고 있었다.
“어?”
하지만 <헤르메스의 눈>을 발동시킨 현찬은 다른 것을 보았다.
토끼 가면의 몸속에 금제가 반쯤 붕괴해 있었다.
‘스왈로우 때문인가?’
아마 스왈로우에게 양분과 마력 등을 흡수당하면서 신체에 변화가 일어났고 그 때문에 금제조차 어딘가 무너져서 반쯤 지워진 것 같았다. 현찬은 오히려 이것을 기회라고 여겼다. 이 상태의 금제가 제대로 발동할 리 없었으니까.
‘지금이 기회다.’
현찬은 <헤르메스의 눈>을 발동하며 <궁예>를 불렀다.
그리고 반쯤 정신 나간 토끼 가면의 머릿속을 읽으면서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이 녀석, 스왈로우에게 당한 게 아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