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116화 난제 스왈로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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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모든 것이 폐허가 되었다. 지면은 뒤집히고 사방에 흙먼지가 휘날렸다. 숲이라고 할 정도로 나무가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황야로 변하고 말았다. 나무들은 뿌리째 뽑혀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고 거대한 바위도 흔적을 남기지 못하고 부서졌다.
그야말로 거대한 폭탄이라도 터진 게 아닐까 하는 광경이었다. 그 모든 것이 사라진 여파에서 겨우 벗어난 삼장각(三長角) 벨라쿠스는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그녀는 속이 진탕인 상태였다.
악마 특유의 뛰어난 재생력으로 지금 빠르게 상처를 회복하고 있지만 그런데도 후유증이 남을 정도다. 벨라쿠스는 솟아오른 바위에 등을 기댔다. 싸움의 여파로 인해 지각이 변동했고 지층에 숨은 바위들이 곳곳에 솟구치고 파괴되기를 반복했다.
‘미친 괴물 같은 놈.’
벨라쿠스는 싸움의 중심을 바라보았다. 싸움은 이미 끝났다. 지금은 싸움이 벌어졌던 장소였다. 그곳에는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성되어 있었다. 저것이 고작 개인이 만들어낸 광경이라고 한다면 믿을까?
‘강하다.’
현찬을 향해 달려들었던 그녀의 부하들은 모조리 몰살당했다. 현찬과 가까이 있었던 부르파스는 당연히 형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갈려 나갔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은 오직 벨라쿠스 뿐이었다.
그녀는 운이 좋았다.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현찬의 공격에 크게 휩쓸리지 않았따. 정확히는 현찬이 그녀에게 자비를 베푼 것이 컸다. 현찬은 일부러 목격자를 남겼다. 이 악마의 세계를 향해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경고를 날리기 위해서였다.
벨라쿠스는 이를 악물었다.
광오하고 건방진 태도였다. 하지만 가지고 있는 무력이 그것을 당당하게 받쳐주었다. 그녀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부르파스가 왜 당했는지 이해했다.
‘지구라는 곳에는 저 정도의 힘을 지닌 인간이 존재한단 말인가.’
악마들의 예상을 틀렸다. 이렇게 되면 계획을 수정해야만 했다. 얼핏 확인한 현찬의 무력은 거의 사장각(四長角)에 근접했다.
‘아니, 어쩌면 마왕 님과 맞먹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벨라쿠스는 고개를 저었다. 마왕을 섬기는 몸으로써 그런 생각을 품은 것 자체가 불경죄다. 아무리 인간이 강하다 하더라도 오장각의 펜타이블(penta evil)은 절대로 범접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들은 태생부터 인간 따위가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타고난 존재들이었다. 강함이라는 것을 형상화한 그들은 패배를 몰랐다. 같은 악마들이 보아도 그들은 격이 다른 존재였다.
그런 위대한 존재에게 고작 한낱 인간을 견주려고 하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하지만.’
그런데도 현찬의 강함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자는 강하다. 그리고 현찬과 비슷한 수준의 인간이 얼마나 더 있을지 몰랐다.
지구에 대한 경계 레벨을 올려야 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을 향한 침략을 멈춰야 할지도 몰랐다. 물론 전투와 싸움을 갈구하는 악마들이 그것을 피할 리는 없었다.
벨루카스는 아직도 현찬이 보여주었던 파괴적인 무력이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아른거렸다.
이백이 넘는 악마 군단을 순식간에 정리한 현찬은 다시 균열을 통해 사라졌다. 균열이 닫힌 것을 보면 아마 바깥에서 파괴했으리라.
‘이 굴욕은 반드시 갚아주마!’
벨라쿠스의 두 눈이 의지로 강하게 불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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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열을 통해 다시 게이트로 넘어온 현찬은 균열을 파괴하고 혹시 몰라서 강윤과 함께 게이트마저 클리어해서 없애버렸다. A랭크 헌터들이 수십이 필요한 게이트를 단둘이서 클리어했는데도 둘은 별 감흥이 없었다.
엄청난 마석을 얻어서 떼돈을 번 것보다 악마에 관한 인상이 더욱 깊게 남은 탓이었다.
“형. 그건 대체 뭐였을까요?”
“다른 세계의 존재들. 이종족들이지. 언젠가 우리가 마주쳐야 할 녀석들이기도 했고.”
“…… 대충 머지않은 미래에 이런 일이 일어날 거로 막연하게 생각했지만 설마 이렇게나 심각한 수준일 줄은 몰랐어요.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저쪽에서는 이미 이쪽을 침략할 준비를 하고 있다니.”
“모르는 게 당연해. 알더라도 애써 무시하고 싶을 테지. 그러니 우리는 확실하게 대비해야만 해.”
때마침 강윤이 게이트에 들어가면서 지니고 있던 액션캠으로 영상도 찍혔다. 이것을 협회에 증거물로 제출하면 아직도 변화에 회의적인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정말 놀랐어. 저쪽 세계도 우리와 별다를 바가 없다니.]
[생명체가 살아가는 공간임을 다시금 깨닫게 만들더구나. 그런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녀석들이 사는 곳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하다니 삼촌의 명계가 보면 참 통탄하겠어.]
‘이렇게 된 이상 하루라도 빠지지 않고 부지런하게 움직여야겠는걸.’
벌써 저렇게 침공을 목적으로 움직이는 세계가 있다. 게다가 저곳 하나라고 한정할 수 없었다. 현찬이 모르는 다른 장소에서도 지구를 노리고 침공 준비를 하는 곳이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해.’
악마들이 보낸 척후병은 현찬의 마음을 더욱 벼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만약에 현찬이 오늘 그 게이트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녀석은 몰래 사회에 숨어들어서 사람들을 죽이고 온갖 정보를 얻어내 원래 세계로 돌아갔으리라.
핸드폰을 꺼내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현찬의 입에서 유창한 영어가 튀어나왔다.
“여보세요. 아. 저에요. 기억하고 계시죠? 아. 다름이 아니라 약속했던 시간을 조금 더 앞당겨야 할 것 같아서요. 원래는 조금 여유를 두고서 움직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래서는 안 될 것 같거든요.”
현찬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이 찾아온 하늘은 검게 물들었고 별빛만이 가득했다. 그러나 별빛은 지면을 밝게 비추지 못했다. 그저 자신들이 이곳에 있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별들의 너머 혹은 그 별 중 어딘가에서 다른 생명체들도 살고 있으리라.
적이 될지도 모르는 생명체들이.
“네. 갑자기 이렇게 일정을 멋대로 앞당기는데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세한 일은 만나서 이야기할게요. 그러면 그때 뵙죠.”
“<스왈로우>의 토벌 때요.”
현찬은 그것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한시라도 빠르게 집으로 돌아가 짐을 싸야 할 것 같았다.
&
현찬은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그런 현찬의 곁에 황설영이 서 있었고 정부 소속 수행원들 또한 현찬의 뒤를 따랐다. 입국 심사가 나름 빡빡한 샌프란시스코 공항이지만 현찬은 별 무리 없이 가볍게 통과했다.
아무렴. 타지라 하더라도 현찬은 세계가 인정한 오버랭크 헌터다. 그가 오는 것을 반기면 반겼지 홀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현찬이 등장함과 동시에 곳곳에서 대기하던 파파라치들이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렸다.
그 강렬한 빛무리에 황설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강현찬 헌터님. 이곳에는 왜 들리신 겁니까?”
“이곳에서 함께 갈 동료와 만나기로 했거든. 여기서 만난 후에 그 사람의 개인용 비행기를 타고 브라질로 떠날 거야.”
“개인용 비행기라니. 대체 누구이길래.”
그러고 보니 황설영에게 누구와 함께 싸우는지 말해 주지 않았었다. 하지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때마침 약속했던 사람이 시민들의 환호와 관심을 받으며 등장하고 있었다.
올백으로 넘긴 화려한 금발과 군살 하나 없이 도드라지는 근육,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덩치와 얼굴에 그림처럼 고정된 선한 미소.
미국의 오버랭크 헌터이자 영웅(Hero)인 알렉세이 윌터였다.
“오. 현찬. 만나서 반갑네.”
“저야말로.”
둘은 만나자마자 가볍게 악수했다. 주변의 미국인들이 박수 치거나 휘파람 불며 환호했고 기자들과 파파라치들은 이 상황을 놓치지 않으려고 카메라 셔터를 열심히 눌렀다.
“이 자리는 조금 시끄러운 것 같으니 잠시 장소를 옮기지.”
“그러죠.”
현찬의 무리에 알렉세이를 필두로 한 미국의 수행원들도 추가됐다. 경호원들과 공항의 보안요원들이 벽을 만들어 시민들의 접근을 차단했다. 겨우 조용히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현찬의 시선 모서리에 황설영이 걸렸다.
“응?”
황설영은 알렉세이를 보며 입을 헤 벌린 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설마 함께하겠다는 동료가 또 다른 오버랭크 헌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특히나 알렉세이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오버랭크 헌터가 아닌가. 그의 화려한 쇼맨십과 시민들을 위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은 모든 헌터들이 본받을 만한 것들이었다.
당연히 알렉세이는 헌터들이 롤모델을 꼽을 때마다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유명했다.
그런 살아있는 전설이 눈앞에 떡하니 나타났으니 황설영의 입장에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현찬을 따라온 수행원들도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눈을 흘깃거리며 알렉세이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헤이 현찬. 너의 여자친구가 너무 놀란 거 같은데.”
“여, 여자친구라뇨!”
알렉세이의 장난 어린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황설영이었다.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대꾸하자 알렉세이는 과장된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군.”
“너무 놀리지는 마세요.”
“이런, 그 점은 사과하지. 반응이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찔러보고 말았어.”
“그 점은 저도 알 것 같네요.”
둘의 장난스러운 대화에 황설영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농담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자세한 이야기는 내 자가용 항공기를 타고 나누도록 할까?”
알렉세이 윌터의 자가용 항공기는 과연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헌터답게 억만장자들이나 타고 다닐법한 거대한 비행기였다. 수행원들의 숫자도 적은 편은 아니었음에도 전부 수용하고도 자리가 남았다. 좌석도 푹신했고 그 안에는 온갖 주류들이 종류별로 갖춰져 있었다.
관제탑의 지시를 받은 비행기는 브라질을 향해 이륙했다.
비행기 내부에 따로 준비된 개인실에 현찬과 황설영, 알렉세이 셋이 모여 앉았다.
“지금부터 보는 일은 모두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것만 알아주세요.”
현찬은 알렉세이에게 미리 챙겨왔던 액션캠의 영상을 보여주었다. 벽을 찢고 붉은 균열에서 악마가 튀어나오는 모습과 녀석이 떠벌리는 소리, 거기에 더해서 마지막으로 현찬이 놈을 제압하는 광경까지.
그것을 지켜본 황설영과 알렉세이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졌다.
“흐음. 벌써 다른 세계의 영향이 이쪽으로 오는 건가. 붉은 피부의 외계 종족이라니. 사탄이 울고 가겠어.”
“완벽하지는 않아요. 녀석들도 직접 접근이 안 되니까 게이트를 통해서 우회해 들어오고 있죠. 물론 그것도 위험하긴 하지만요.”
“게이트 자체가 지니고 있는 위험성이 더욱 증가하고 말았군.”
“강현찬 헌터님. 이보다 더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까. 지구를 노리는 자들이 이 악마뿐이 아니라는 거. 저희가 모르는 다른 곳에서 지구를 눈독 들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맞아요. 일단 대표적으로 우리를 노리는 건 이 악마들의 세계지만 꼭 이 녀석들만 있다고 보장할 수는 없겠죠.”
영웅투쟁에서 다른 세계의 존재들이 지구를 어떻게 보는지 대충 짐작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지구야말로 밟고 올라가기 좋은 훌륭한 계단 취급이었다.
[이거 참. 은근히 자존심 상하는데? 울 아빠에게 말 하면 한방에 쓸릴 것들이.]
[그러게 말이야. 내가 지상에 강신만 하면 아주 다 두들겨 패줄 수 있는데.]
[평소에는 뭐라고 한마디 했겠지만, 이번만큼은 나도 동감이다. 우리들의 세계를 이렇게나 우습게 보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군.]
헤르메스와 글루스카베, 아테나도 한마디씩 던졌다. 두두리는 말이 없었지만, 그녀의 표정에 약간 노기가 서려 있었다. 이것은 일종의 세계 간의 자존심 대결이기도 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게이트를 최대한 많이 없애고 아직 파악하지 않은 미확인 게이트를 한시라도 빠르게 확인하는 겁니다. 기존 게이트를 수시로 확인하는 작업도 필요하겠죠.”
“인력이 상당히 많이 들겠군.”
“그나마 다행인 점은 최근 들어 각성자들의 수가 대폭 상승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대대적인 범죄자들의 토벌 덕분에 헌터를 지망하는 자들도 많고 죄를 뉘우치고 이쪽으로 전향하는 중도파도 상당히 많아요. 조금만 더 시간이 있으면 인력을 그쪽에서 대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지금만큼은 모든 클랜들이 꽁지가 빠지게 뛰어다닐 수밖에 없겠어.”
“정부의 입장에서는 클랜에게 목줄을 채울 기회가 생겼으니 옳다구나 하겠죠.”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났다. 앞으로 또 어떤 방안을 강구해야 하는지 대략적인 길을 잡아두었다. 알렉세이는 머리도 비상하니 어떻게 행동을 해야 가장 효율적인지 잘 알고 있으리라.
“도착했군.”
구름 틈새로 광활하게 펼쳐진 녹림이 보였다.
<스왈로우>와의 싸움이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