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115화 뜻밖의 침공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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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파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자랑스러운 이장각(二長角)의 부르파스였다. 심마왕 겔루키스가 이끄는 군단 중 천인장이며 곧 삼단각(三短角)을 바라보는 악마였다.
‘말도 안 된다.’
그런 부르파스의 힘은 어지간한 강자도 우스울 만큼 강했다. 차원 틈새를 넘어왔다는 사실이 비록 엄청나게 강하다는 것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때문에 썩 명예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부르파스는 스스로 힘에 자부심 있었다.
하지만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뭐야. 이게 끝이야?”
어째서 위대한 악마인 자신이 고작 미천한 인간의 발아래에 깔려 있단 말인가?
동굴의 축축한 지면이 부르파스를 상념에서 현실로 잡아끌었다. 그의 검은 갑옷은 곳곳이 파괴되어 있었고 그 틈새로 드러난 그의 피부는 흙투성이에다 피투성이였다.
잊고 있었던 육신의 고통이 부르파스의 뇌를 자극했다.
“이익!”
부르파스는 발끈하여 고개를 짓쳐들었다. 현찬의 손이 먹잇감을 낚아채는 매처럼 떨어지며 부르파스의 머리를 붙잡고는 바닥에 쾅 찍었다. 투구가 부서져 맨살이 드러난 부르파스의 얼굴이 동굴 바닥에 처박혔다.
“나름 이장각이니, 곧 뿔 세 개가 된다니 뭐니 해서 기대했는데 아무것도 아니잖아?”
현찬의 모욕적인 언사를 듣고도 부르파스는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인간은 강하다!’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현찬은 강했다. 강해도 너무 강했다. 그 또한 삼단각은 물론이거니와 삼장각의 악마가 싸우는 것을 본 적 있었다. 그들은 확실히 부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했다.
그러나 그런 악마들도 현찬에 비하면 약했다. 현찬은 부르파스가 그 힘의 깊이를 짐작하지 못할 정도의 강자였다.
‘못해도 최소 뿔 네 개 수준!’
그 정도라면 각 마왕의 군단장을 맡을 정도. 위대한 혈통을 타고난 귀족만이 가능한 무력이었다. 부르파스는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평범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감당하지 못할 강자였다니 웃기지도 않는 농담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부르파스가 직면한 현실이었다.
‘이 세계의 인간들은 모두 약해 빠진 게 아니었던 건가!’
처음 마주친 자가 이만한 수준이라면 적어도 이와 비슷한 자가 최소 몇은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가 아닌가. 물론 이건 부르파스의 착각이었다. 물론 현찬에 버금가는 강자는 다른 오버랭크 헌터로서 3명은 더 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부르파스는 등장과 동시에 그 세계의 최강자를 만난 것이다.
‘왜 하필이면 이런 괴물과 만나서!’
부르파스는 운이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현찬의 운이 너무나도 좋았다.
<감은장아기의 축복>을 받은 현찬의 행운은 다른 사람들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그 운명이 이끄는 힘으로 부르파스가 선택한 게이트는 때마침 현찬이 사냥하던 게이트가 되었고 둘은 우연을 가장한 운명으로 마주친 것이다.
‘도망쳐야 한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려야 해!’
그러나 부르파스는 현찬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몸집 차이도 거의 5배 이상 차이가 남에도 현찬의 근력은 부르파스를 웃돌았다.
뿔 2개가 되면서부터 익힐 수 있는 악마들의 권능 중 하나인 흑마갑주(黑魔甲冑)는 현찬의 맨주먹에 부서졌다.
‘맙소사. 나는 힘들어한 저 악마를 순식간에 쓰러뜨리다니. 형은 대체 얼마나 강한 거야?’
강윤도 현찬이 손쉽게 부르파스를 제압하는 모습을 보며 경탄했다. 오버랭크 헌터가 된 것도 알고 현찬이 강하다는 것도 안다. 애초에 그가 롤모델로 삼은 현찬이 약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도저히 따라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나름 필사적으로 따라잡았다고 생각했지만, 현찬은 이미 그보다 아득히 앞에서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강윤은 그 사실을 인지하자 묘한 탈력감이 맴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이걸로 부족하면 더 빨리 달리면 된다. 완전히 따라잡지는 못하더라도 그의 등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언젠가, 나도…….’
그와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가기를.
강윤이 속으로 그런 다짐을 하는 동안 현찬은 부르파스의 위에 올라타며 아직도 열려있는 붉은 틈새를 바라보았다. 붉은 틈새는 게이트와는 전적으로 다른 빛을 뿜어냈다. 붉은색은 중앙으로 모일수록 점점 검게 변했다. 보기만 해도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왜. 돌아가고 싶어?”
“가, 갑자기 그건 무슨…….”
“그럼 가자.”
“뭐?”
“형?”
현찬의 말에 부르파스는 물론이거니와 강윤도 당황했다. 현찬의 표정은 진지했다. 진심으로 저 틈새를 통해서 악마들의 세계로 넘어갈 생각이었다.
“들어가기 전에 하나 물을게. 저 틈새는 어떻게 해야 닫히지?”
“크윽! 내가 그것을 말할 것 같으냐!”
현찬이 손에 카두케오스를 쥐고서 부르파스의 머리를 강하게 후려쳤다. 빠악! 동굴 벽을 타고 울려 퍼지는 경쾌한 타격음에 강윤이 움찔했다.
“크윽! 그, 그건 바깥에서 강한 에너지를 주입해서 강제로 붕괴시키는 것 말고는 없다. 우리가 열었지만 닫을 수는 없어.”
“거 참. 여는 것도 멋대로 여는 주제에 닫는 건 또 우리한테 떠넘기다니. 너희들은 어지간히도 이기적인 종족이구나.”
“까드득!”
부르파스는 현찬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이를 갈 수밖에 없었다. 현찬은 그런 녀석의 반항 아닌 반항에 피식 웃었다. 부르파스의 몸에서 내려온 현찬은 흑마갑주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강윤이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혀, 형? 정말로 들어가게요?”
“강윤이 너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잠시 구경만 하고 올 거니까.”
“하지만 위험해요! 저 안쪽에는 이런 녀석보다 더한 괴물들이 득실거릴 거라고요!”
“괜찮아. 이런 녀석이 몇이 있더라도, 혹시나 더 강한 놈이 있더라도 내 몸 하나는 간수할 수 있으니까. 게다가 들어갔다가 대충 어떤 곳인지 확인만 하고 다시 나올 거야. 너는 혹시나 이곳을 넘어오는 놈들을 대비해서 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
현찬은 흑마갑주의 뒷덜미를 잡고서 부르파스의 몸을 질질 끌었다. 체구의 차이가 있다 보니 부르파스의 몸은 바닥에 드르륵 끌렸다.
“이 틈새는 나도 넘을 수 있나?”
부르파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미 카두케오스에 당한 그는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그, 그렇다. 이 틈새는 우리 악마가 멋대로 열었고 그 때문인지 제한을 받는 것도 우리 종족뿐이다. 다른 녀석들은 그 실력의 수준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음. 그건 뭐 괜찮네.”
“하지만, 알아둬라. 저 안에 네가 발을 들이미는 순간부터 이 틈새는 확장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우리들 또한 그쪽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게 되지. 잘 선택해야 할 거다.”
“선택은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 해야 하는 거겠지.”
“뭐?”
현찬은 붉은 틈새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 부르파스가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현찬을 바라보았다. 동굴의 천장에서 떨어지는 빛으로 인해 현찬의 얼굴에는 음영이 져 있었다.
한 가지 확실하게 보이는 건, 현찬의 입가에 맺힌 미소였다.
현찬은 정말로 즐거움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웃고 있었다.
다른 세계는 어떤 곳일까? 그곳에는 누가 지내고 있을까? 그 세계에도 영령이 있을까? 얼마나 다양한 강자들이 넘칠까?
끝이 없는 호기심과 탐구심! 그것은 헤르메스의 근원이기도 한 것들이었다.
“못 알아들었어도 상관없어. 일단 가자.”
현찬은 부르파스를 이끌고 붉은 틈새로 뛰어들었다.
&
“음?”
삼장각(三長角)의 여성형 악마 벨라쿠스는 부르파스가 넘어간 차원의 틈새에서 무언가 넘어오는 것을 느꼈다.
‘녀석이 다시 돌아오는 건가? 빠르군.’
지구라는 세계를 확인하라고 보낸 부르파스가 벌써 돌아올 줄은 몰랐다. 넘어간 지 채 1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바로 돌아온다는 것은 무언가 얻어낸 것이 있다는 소리일 터. 벨라쿠스는 약간의 기대감을 품었다.
그러나 그녀의 기대감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부르파스가 돌아온 것은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하지만 그녀가 예상하지 못한 것은 부르파스와 함께 틈새를 넘어온 존재였다.
인간이었다. 지구의 인간이 이쪽 세계로 넘어온 것이다. 그것도 부르파스를 질질 끌고서. 눈을 가늘게 좁히며 부르파스를 자세히 보니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누가 보아도 싸움에서 패배한 게 분명했다. 자연스레 벨라쿠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의 수하들 또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 저건 인간이 아닌가?”
“인간이 왜 여기에? 대체 이건 무슨 상황이지?”
“부르파스님이 패배했단 말인가?”
대부분 뿔이 1개이고 2개더라도 이단각(二短角)에 지나지 않는 악마들은 지금의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조용히 하도록.”
우뚝.
단 한마디로 백이 넘는 악마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만큼 그녀의 부하들은 벨라쿠스를 두려워했다. 그녀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설사 직속 부하라고 하더라도 가차 없이 목을 날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녀가 조용히 하라고 한다면 조용히 해야 한다.
부하들이 잠잠해지자 벨라쿠스는 다시 현찬에게 시선을 던졌다.
“네놈은 뭐냐?”
“강현찬. 저쪽 세계의 인간. 이쪽에는 호기심 때문에 놀러 왔어.”
“놀러 왔다?”
벨라쿠스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 광경을 보던 부하들은 잔뜩 긴장했다. 평소에 무표정한 그녀이기에 조금이라도 감정의 편린이 보였다는 것은 그만큼 격한 감정이 몰아친다는 소리였다.
눈썹이 올라갔다는 건 상당히 심기가 불편하고 화가 났다는 소리다.
그리고 그녀가 화난다면 어지간한 일로 끝나지 않는다.
전부 다 때려 부숴야 직성이 풀리는 게 바로 그녀였다.
“인간 주제에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우리들의 세계가 네놈에게 고작 소풍오는 수준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냐?”
“딱히 그런 의도로 말 한 건 아닌데. 그냥 궁금해서 온 거야. 악마들의 세계는 어떤지.”
현찬은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악마들이 사는 세계라고 해서 땅에는 마그마가 흐르고 대기는 유황가스로 가득하며 하늘에는 검은 먹구름만 있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 예상과는 정반대였다.
땅을 붉었지만, 그것이 죽음의 대지를 의미하지 않았다. 그 적토(赤土)의 위에는 푸른 잎을 지닌 식물들이 자라나 있었고 주변에는 굽이치는 산맥도 보였다. 악마들이 산다고 했지만, 지옥의 풍경과는 달랐다.
이곳도 결국에는 생명체가 살아가는 곳이었다.
그것이 현찬과 헤르메스의 호기심을 충족해주었다.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멋지네.”
“그렇게 말을 해도 네놈에게 돌아오는 것은 없다.”
벨라쿠스의 뒤로 나열한 악마군단이 싸울 태세를 취했다. 사실상 싸움이랄 것도 없었다. 상대는 고작 하나고 이쪽은 무려 수가 200이나 됐으니까. 천인장 부르파스와 그의 상사 벨라쿠스가 담당하는 악마들의 수는 더 많았지만 지금 자리에 모인 녀석들로도 충분했다.
“베, 벨라쿠스님.”
“부르파스. 네놈의 임무 실패에 관한 책임은 엄중히 묻도록 하지.”
하지만 우선은.
“이 인간의 처우가 먼저겠지.”
“너무 격하게 환영해 주는 거 아니야?”
“네놈을 붙잡아 가장 먼저 혀를 뽑아주도록 하마. 어디 그때에도 지금처럼 말할 수 있는지 볼까.”
와아아아! 벨라쿠스가 오른손을 들자 뒤에 도열한 악마들이 고함을 내지르며 현찬을 향해 달려들었다. 체고가 2m가 넘는 악마군단이 달려드는 모습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악마는 인간보다 월등한 존재다. 놈들은 하나하나가 매우 강력한 개체였다. 그들 중에서 약하다고 알려진 뿔 하나짜리도 인간과 비교하면 초인이었다.
그런 놈들이 무려 이백 명이나 된다.
하지만 현찬은 웃었다.
“안 그래도 나도 너희들에게 볼일이 있었거든.”
아니, 현찬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니라, 이 녀석이 말이야.”
<계약>
현찬의 몸 주위로 거대한 마력의 폭풍이 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