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
113화 뜻밖의 침공 (2)
_
‘귀찮게 됐다.’
귀찮은 수준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인류에게 있어서 위기상황이라고 해도 좋았다. 무림 세계를 멸망시킨 악마 세계. 그곳에서 지구를 눈독 들인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까.
천흉에게 얻은 정보는 아주 작고 짧았다. 그 자그마한 진실 일부만으로도 현찬에게는 충분했다. 현찬의 눈은 이미 그 이상의 정보를 보았다. 미래에 관한 예측은 거의 확신에 가까웠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미래에 악마의 세계는 지구를 침공할 것이다. 다른 세계를 멸망시키는 정복 활동을 벌이는 놈들이 지구라는 나약한 세계를 지나칠 리 없었다.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많은 사람이 생을 마감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준비를 해야겠지.’
어떻게 보면 다행스럽게도 지구는 점점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사태의 위협성을 알고서 모두의 의견이 하나로 모였다. 인류는 예전부터 그랬다. 어떨 때는 서로 대립하고 갈라서면서도 중요한 순간에는 하나가 되었다.
현찬이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은 놈들의 침략을 최대한 뒤로 미루는 것.
이쪽이 충분한 준비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대통합>을 앞당기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현찬은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형.”
“응? 아. 아무것도 아니야.”
현찬의 상념을 깬 것은 강윤이었다.
다은과의 만남 이후로 현찬은 강윤과도 만났다. 현찬이 바쁘다 보니 예전부터 만날 일이 별로 없었던 탓이었다.
POH클랜 소속 헌터 최강윤.
영웅급 영령 <삼손>의 계약자이자 최근에 서다은과 함께 한창 주가를 올리는 헌터였다.
못 본 사이에 강윤은 상당히 남자답게 변했다. 예전의 인상이 순박하고 덩치가 큰 곰이었다면 지금은 조금 더 거칠어지고 야성미가 느껴졌다.
영령 <삼손>의 영향인지 강윤은 머리를 길게 길러서 상투를 틀듯이 묶었다. 조선 시대 사람처럼 상투를 튼 거한을 보니 참 묘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게 또 웃긴 것은 강윤이라는 인물의 개성을 확실하게 나타내다 보니 사람들의 사이에서도 나름대로 인지도 있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둘이 만나는 것도 오랜만이구나.”
“그러게요. 형. 훈련받을 때는 항상 붙어 다녔는데. 언제부터인가 만남이 뜸해졌죠.”
어쩔 수 없었다.
그 시절 현찬은 강윤보다 남들이 판단하는 가치가 떨어졌고,그 어떤 클랜의 제안도 받지 못했으니까. 반대로 강윤은 영웅급 영령인 <삼손>의 계약자로서 기대받던 유망주였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반대되었다. 현찬은 자타공인 대한민국 최고의 헌터가 되었다. 강윤도 어떻게 보면 일반 헌터들에 비해 확실히 유명했지만, 현찬에 비교할 바는 아니었다.
참 묘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둘 중 누구도 그런 일을 신경 쓰지 않았다.
“최근에 어떻게 지내니?”
“저야 늘 똑같죠. 열심히 훈련하고, 몬스터들 사냥하고.”
그렇게 지내다 보니 강윤도 나름 경력을 쌓고 경험을 얻으며 빠르게 성장했다. 서다은과 비교하면 아직 모자랐지만 강윤 또한 A랭크 헌터였고 A+랭크가 목전이었다. 그의 전투 실력을 보면 이미 A+랭크 헌터라고 해도 손색없었다.
“무엇보다 요즘에는 범죄자들을 주로 상대하고 있어요.”
강윤은 예전에 데스페라도의 테러에 휘말려서 병원 신세를 진 적 있다. 그가 약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선량한 시민이 폭발에 휘말리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강윤 스스로가 몸을 던져서 생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강윤은 그 일이 생긴 이후로 더욱 강해지려고 노력했다.
자기가 약한 탓에 시민들이 위험에 처했다고 생각했다.
그가 훨씬 더 강했다면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테러리스트들을 쓰러뜨릴 수 있었을 테니까.
그때의 각오가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계속 지속하고 있었다. 강윤은 세계가 연합을 이루고 범죄자들을 소탕할 때 가장 먼저 지원해서 토벌에 나섰다. 그는 몬스터보다 범죄자들의 소탕에 열 올렸다. 특히나 그 대상은 데스페라도였다.
얼마나 녀석들을 쥐잡듯 잡고 다녔는지 데스페라도 조직원들은 강윤의 상투를 튼 머리만 봐도 몸을 떨며 질색한다고 한다.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적당히 해. 괜히 그러다가 몸 상한다.”
“에이. 제가 얼마나 튼튼한데요. 이런 거로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강윤은 자신이 멀쩡하다는 것을 과시하려고 그러는지 팔근육을 드러내 보였다. 그동안 운동도 열심히 했는지 그야말로 보디빌더도 울고 갈 근육이 꿈틀거렸다. 현찬은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너무 싸움에만 열중하지 마. 강해질 수 있는 길은 다양하니까. 특히나 지금의 너는 오히려 영령과의 결속을 더 높이는 게 강해지는 데 도움 될 거야.”
헌터는 영령과의 동조율이 높아질수록 해당 영령의 힘을 더 많이 끌어다 쓸 수 있다. 아마 강윤이 조금만 더 노력한다면 삼손의 <소환> 단계까지 가지 않을까 싶었다.
현찬의 경험이 어린 조언에 강윤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찬을 향한 무한한 신뢰를 지닌 강윤은 현찬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었다. 이런 피와 살이 되는 조언을 무시할 리 없었다.
“네. 조언 고마워요, 형.”
“그래. 알아들었으니까 됐다. 그보다 너도 정말 많이 성장했구나. 예전에 봤을 때와 비교하면 확실히 강해졌는걸. 어지간한 헌터들은 너에게 명함도 못 내밀겠어.”
“강덕수 할아버지는 아직도 부족하다면서 저를 다그치는걸요.”
“1세대 헌터니까 어떻게 보면 기준점이 높아서 그러시겠지. 그러는 거 치고는 잘 지내는 거 보니 아무래도 그분도 상당히 흡족해하는 거 같은데?”
“뭐, 그건 저도 느끼고는 있어요.”
강윤은 순박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저 웃음은 시간이 흘러도 그대로였다. 내가 알던 동생의 모습은 아직 남아 있구나. 현찬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도 저는 아직도 제가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더 노력할 거예요.”
“목표를 어디로 잡고 있는데?”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형처럼 되고는 싶죠. 하지만 그것은 역시 분수에 맞지 않으니…… 그래도 S랭크 헌터는 되고 싶어요.”
“너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로 생각해.”
강윤은 충분히 가능성을 지녔다. 현찬은 빈말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서 강윤을 평가했다.
“고마워요 형.”
“그래. 그러면 어디 내 동생의 향상된 실력을 한번 봐 볼까?”
현찬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강윤이 의아하다는 시선을 던졌다.
“어디 가게요?”
“요즘 몸을 너무 안 움직였더니 조금 좀이 쑤셔서 말이야.”
현찬은 왼팔로 오른쪽 어깨를 잡으며 오른팔을 돌렸다. 천흉과의 싸움이 끝나고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닌데 현찬은 이런 미적지근한 삶이 지루해서 견딜 수 없었다.
‘약간 운동 중독 비슷한 건가?’
그렇다 해도 상관없었다. 현찬은 강윤에게 어떻게 할 거냐는 시선을 보냈다. 강윤에게 이런 질문은 필요 없었다. 남자들은 가끔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것이 있는 법이다.
“까짓것 가죠, 뭐.”
바로 지금처럼.
“그래. 그래야 내 동생이지.”
“애초에 지금의 형에게 적당한 던전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드네요.”
“그러면 조금 더 큰 곳으로 가면 되지.”
애초에 주된 목적은 강윤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보고 싶어서이다. 굳이 게이트 클리어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현찬은 흔쾌히 괜찮다며 넘겼다. 그렇게 둘은 장소를 옮겨 난도 높은 게이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와. 역시 오버랭크 헌터라 그런지 발주 하나는 되게 빠르네요.”
현찬이 게이트 하나를 가겠다고 하자 허가가 빛의 속도로 됐다. 사실상 오버랭크 헌터는 이런 부분에서 거의 프리패스권을 지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협회의 입 딱 벌어지는 일 처리 속도에 강윤이 감탄했다.
“뭐, 의도치 않은 감투지만 기왕 쓴 거라면 제대로 활용해야겠지. 자, 가자.”
“네 형.”
둘이 들어간 곳은 A+랭크의 헌터들이 가는 고난도 게이트였다. 기본적으로 정해진 입장 인원의 숫자는 30명. 게이트 내부도 여의도 섬 크기 이상의 대형이었다.
게이트 명 [미궁동굴]
다양한 4등급 몬스터가 득실거리고 심지어 3등급 몬스터도 자주 출현하는 동굴이었다. 게이트 내부 전체가 거대한 동굴로 이루어져 있어서 매우 어둡지만, 동굴 곳곳에 박힌 기묘한 수정이 내는 빛 덕분에 사물을 분간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가볼까? 이런 녀석들 못 잡는다고 하진 않을 거지?”
“물론이죠. 제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보여줄게요.”
강윤은 본격적으로 <삼손>의 힘을 끌어올렸다. 그의 근육을 타고 흐르는 강렬한 힘은 겉으로도 충분히 드러날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그리고 이 힘을 직접 대면한 몬스터는 그날 운이 다한 날이라고 해도 좋았다.
바로 지금처럼.
퍼억!
강윤의 건틀릿 낀 주먹이 내질러지자 거대한 땅강아지 몬스터의 머리가 폭발했다. 비산하는 파편과 노란 체액은 풍압에 휩쓸려 동굴 벽에 촥 하고 퍼졌다. 내지른 주먹을 회수한 강윤은 어떠냐며 현찬을 돌아보았다.
“대단한데?”
현찬은 강윤의 주변에 널린 거대 땅강아지 사체를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4등급 몬스터를 일격에 없앴다. 비록 녀석들이 4등급 몬스터 중에서 수준이 떨어진다고 하지만 그래도 4등급이었다. 지금 강윤의 힘이라면 예전에 싸웠던 싸이클롭스도 손쉽게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헤헤.”
현찬의 칭찬에 강윤이 손가락으로 코밑을 쓰윽 훑었다. 인생의 롤모델인 현찬이 칭찬해주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었다. 강윤은 신나서 소란을 듣고 몰려오는 몬스터들에 달려들었다.
“녀석. 완전히 신났네.”
어깨에 힘을 빼고 그렇게 중얼거리는 현찬의 머리 위로 몰래 숨어 있던 거미 몬스터가 뚝 떨어져 내렸다. 녀석은 날카로운 독니를 벌리며 현찬의 목덜미에 박아 넣으려고 했다. 그 순간 현찬의 검이 흐릿하게 변했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서걱!
천장에서 뛰어내린 거미는 좌우로 갈라지며 현찬의 양옆으로 떨어졌다. 현찬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소란을 듣고 몰려온 거미 몬스터가 한가득했다. 현찬은 잠시 사냥에 열을 올리는 강윤을 바라보았다.
‘저쪽도 나름 바쁜 거 같으니.’
현찬은 테레이오스테를 뽑아 들었다.
“나도 움직여 볼까?”
&
싸움이 끝나고 현찬과 강윤은 잠시 휴식을 취했다. 현찬은 멀쩡했지만 강윤은 격한 전투로 체력이 상당히 저하된 상태였다. 강윤은 숨을 몰아쉬면서 현찬을 선망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역시 형은 대단해요. 어떻게 그 싸움에서도 안 지쳐요? 저보다 몬스터를 더 많이 잡은 것 같은데.”
“이게 바로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지.”
“킥킥.”
현찬의 농담에 강윤이 웃음을 터뜨렸다. 둘이 그렇게 몇 분 동안 적당히 휴식을 취하던 중이었다. 쿠르릉! 갑자기 게이트 전체가 작게 진동했다. 흔들리는 동굴의 천장에서 먼지가 떨어졌다. 강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진? 게이트 내부에 이런 일이 벌어질 리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순간 진동이 더욱 거세게 변했다.
무언가 일어나고 있었다.
현찬은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뽑았다.
“강윤아. 싸울 준비 해.”
“네? 형. 그게 무슨…….”
“불청객이다.”
현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퍼억! 하며 거대한 동굴의 벽이 좌우로 갈라졌다. 유리가 깨진 것처럼 갈라진 동굴의 틈새 사이로는 기묘한 붉은 흐름이 보였다. 저것은 동굴의 벽이 아니었다. 다른 차원, 다른 세계와 연결된 틈새였다.
붉은 틈새를 뚫고 나온 것은 우람한 붉은 팔뚝이었다. 그것은 틈새를 좌우로 붙잡더니 크게 벌렸다. 넓어진 틈새, 아니 이젠 틈새라고 할 수 없는 <통로>를 통해서 빠져나온 녀석은 동굴바닥에 가볍게 착지했다.
“흐음. 이곳인가?”
단순히 등장했을 뿐인데도 주변의 공기가 몇 도는 내려간 것처럼 싸늘해졌다. 대기의 밀도가 변한 것처럼 현찬과 강윤의 몸을 강하게 짓눌렀다. 강윤은 잔뜩 긴장하며 식은땀 흘렸고 현찬도 경계의 태도를 보였다.
튀어나온 녀석은 독특한 언어를 구사하며 주변을 둘러보더니 현찬과 강윤을 발견하고는 씨익 웃었다.
“운이 좋군. 오자마자 이런 녀석들을 발견하다니.”
그렇게 말하는 3m의 거구는 상어의 이빨처럼 날카로운 이를 드러냈다. 붉은 피부와 검은 장발, 그리고 그런 머리카락을 뚫고 우뚝 선 2개의 거대한 뿔은 녀석의 정체를 쉽게 짐작하게 했다.
악마 세계가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