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102화 중간변화 (3)
_
“하하하! 이거 참. 이렇게 갑작스러운 방문인데도 나를 반겨주다니. 정말로 성격 좋은 친구로군. 코리안 히어로.”
“히어로라니. 진짜 영웅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까 너무 과분한 칭찬 같네요.”
“노노. 자네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네. 귀여운 아가씨? 실례하지.”
알렉세이 윌터는 현관문을 고개를 숙이며 들어와 그 거구를 거실로 들였다. 정부의 인사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알렉세이를 반겨주었다. 얼어붙은 채 악수를 청하는 그들에게 알렉세이는 손을 저으며 웃어 보였다.
“너무 그렇게 대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무런 연락도 없이 멋대로 찾아온 건 이쪽이니까요.”
알렉세이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자신을 어려워하는 정치인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이는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그의 배려였다. 알렉세이는 자연스레 현찬과 마주보는 자리에 앉았다. 현찬은 알렉세이 윌터를 더 가까이서 살필 수 있었다.
굳건하고 강인하다. 덩치는 현찬이 봐 온 사람 중에서 누구보다 컸고 입고 있는 새하얀 양복 위로도 숨길 수 없는 근육의 라인이 도드라졌다.
온몸의 선이 굵었고 그의 눈빛에서는 선한 느낌이 났다.
당장 코믹스 책에서 튀어나온 슈퍼맨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현찬이 알렉세이를 살피는 것처럼 그도 현찬을 살폈다.
알렉세이는 현찬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차기 오버랭크 헌터라는 말에 새로운 동료가 생겨서 기대감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어느 정도 걱정이 있었다. 나머지 두 오버랭크 헌터의 성격을 감안하면 현찬도 어딘가 결여되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일말의 불안감이었다.
하지만 막상 마주해보니 그런 생각은 쏙 들어갔다.
현찬은 영웅이었다. 알렉세이 그가 그토록 사람들의 앞에서 연기하고 되기를 바라던 영웅이 바로 현찬이 가지고 있는 자질이었다.
그것에 묘한 질투심을 느끼면서도 깔끔하게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알렉세이는 더욱 현찬이 마음에 들었다.
“일단 무례를 범해서 죄송하다고 생각하네. 최근에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너무 바쁘게 돌아다니다 보니 여유가 전혀 없어서 말이야.”
“이해합니다.”
알렉세이는 세계를 이끄는 선구자다. 중간 과정이 끝나고 세계가 새로운 변혁을 맞이했을 때 다른 누구도 아닌 알렉세이가 가장 먼저 나서서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국가들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움직였다.
그는 지금도 세계 곳곳을 순회하며 각 나라의 높은 사람들과 만남을 계속하던 중이었다.
그런 그가 한국에 방문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우발적인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야기를 듣지 못한 정부의 고위 인사들도 그의 등장에 당황한 것이다.
보통 오버랭크 헌터들이 움직인다면 방문국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엄청난 손님이 오는 것이니까. 대부분은 최대한의 예우를 다하여 국빈 취급해주고 반겨주려 애쓴다. 그게 오버랭크 헌터가 가진 가치이자 위치였다.
“하지만 꼭 들러야 한다고 생각했네. 지금이 아니라면, 어째서인지 이렇게 여유를 가지고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거든.”
“그렇다면 잘 찾아오신 게 맞습니다. 저도 나름 바쁜 몸이라서요. 딱 오늘까지 쉬고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이려고 했죠.”
“하하하! 이거 참. 타이밍이 잘 맞아 떨어져서 다행이로군.”
현찬과 알렉세이가 서로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둘의 영령들도 서로의 얼굴을 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호! 누구인가 했더니 헤르메스 너구나. 거기에 너희 외골수적인 누나까지.]
[오랜만이야, 글루스카베. 못 본 지 꽤 오래됐네.]
여러모로 발이 넓은 헤르메스는 글루스카베도 알고 지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다른 의미로 지식이 넓고 깊어서 신들에 대해 알고 있는 아테나 또한 글루스카베를 알고 있었다. 아무렴, 사고뭉치 남동생과 몇 번 놀아난 적 있는 또 다른 사고뭉치를 예의주시하던 참이니 모를 리가 있을까.
자연스레 아테나의 표정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헤르메스는 뭐가 즐거운지 킬킬거리며 웃었다.
[웃지 마라. 지금 계약자 간에 진지한 이야기 하는 게 안 보이나?]
[헤르메스 너희 누나는 역시 매사에 지루하구나.]
[그러니까 평생 처녀로 늙는 거지.]
[시끄럽다!]
참다못한 아테나가 창대를 휘둘러 헤르메스의 글루스카베의 머리를 강하게 후려쳤다. 세 신급 영령의 장난을 뒤로하고 현찬과 알렉세이는 서로 쓴웃음을 지었다. 둘은 다시 서로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대단하군. 설마 다른 신까지 함께할 줄이야. 헤르메스 계약자답다고 해야 하나.”
“이 부분은 숨기고 있으니까요.”
“큭큭. 그런가. 일단 이야기를 되돌리지. 자네라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로 생각했네.”
“물론이죠.”
처음 알렉세이가 모든 나라가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외쳤을 때, 대부분의 강대국은 그것을 환영하지 않았다. 서로 뭉치며 하나의 조직으로 만들어지면서 생기는 이득보다 그들이 봐야 할 손해가 더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미 연합을 이룬 유럽 쪽과 여전히 강대국인 중국의 반발이 더 컸다.
하지만 그 둘은 다른 오버랭크 헌터 둘이 직접 나서면서 깔끔하게 정리됐다. 중국이 아무리 강대국이고 세계정세에 목소리를 크게 높일 수 있다고 치지만, 그래도 오버랭크 헌터인 양 리화가 직접 움직인다면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그건 안드레이를 포함한 유럽도 마찬가지였다.
오버랭크 헌터들이 뭉쳤으니 세계는 빠르게 바뀔 것이다.
그리고 알렉세이는 마지막 남은 차기 오버랭크 헌터를 향해 자신의 의견을 직접 가지고서 찾아온 것이다.
“저희의 적은 타국이 아닙니다. 국가 수준으로 잣대를 들이밀면 안 되죠. 진짜 적은 지구 바깥의 세계에 있으니까요.”
그들이 적인지 아군인지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분명히 서로의 의견이 맞지 않거나, 처음부터 지구를 노리고서 침략을 벌이려는 자들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니 이쪽에서는 분열하기 보다는 뭉치는데 주력해야 했다.
“저희는 준비해야 합니다. 더 강하게 뭉치고, 더 강해져야 하죠. 헌터들의 숫자를 늘리고 각성자들을 키워야 합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해요. 세계 곳곳에서 사회를 좀먹는 게이트들을 빠르게 클리어 해야 합니다.”
“그래. 자네의 말이 맞아. 우리는 서로 뭉쳐야 할 상황이야. 서로의 이권이나 그런 한순간의 것에 집착하는 건 어리석은 자들이나 할 짓이지.”
주변에서 이야기를 듣던 다른 사람들도 동조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누구보다도 적극적인 것도 바로 이 자리에 모인 방문객들이었다.
“으음. 이렇게 이야기가 잘 진행되어서 좋기는 하지만 나름 걱정되는 부분도 있군요. 일단 정치권에서는 무작정 대세에 따르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그것을 제외하고도 이런 상황이 영 달갑지 않은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다. 특히나 아직도 극성을 부리는 사이비종교의 사람들은 여전히 사회를 시끄럽게 만드는 종양이었다.
하지만 구더기가 무서워서 장을 못 담그면 더욱 답이 없어진다.
알렉세이가 고개를 저었다.
“모두의 의견을 다 한 그릇에 모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어느 길을 선택하더라도 반드시 반대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서 들어주기에는 지금 상황이 너무 촉박해.”
언제 최후의 대통합이 벌어질지 모른다. 긴박한 상황에서 옳지 않은 걸 알면서도 속행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나마 대통령님께서는 이번 상황에 대해서 알렉세이 님의 의견을 우호적으로 보고 있다는 겁니다. 다른 정당에서는 입에 거품을 물고서 반대를 외치겠지만 이미 시대의 흐름은 그쪽으로 흐르고 있다는 걸 저들도 모르지는 않겠죠.”
“긍정적인 답변 감사합니다.”
인류는 싸워야 한다.
앞을 가로막는 다른 세계의 존재들과 전쟁을 벌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들은 하나가 되어 역경을 헤쳐 나가야만 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야겠지.”
세계를 좀먹는 자들을 처단하는 것.
인류 중에서 최고로 평가받는 이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건 역시나 싸우는 것이었다.
알렉세이는 주먹을 꽉 쥐었다. 단순히 주먹을 쥔 것만으로도 주변의 공기가 떨렸다. 사람들은 속으로 경악했다. 현찬도 속으로 감탄했다. 그의 육체에서 나오는 근력은 대단했다.
“어떤가. 함께 인류를 위해서 싸우겠는가?”
“저야말로, 얼마든지.”
이렇게 방향은 정해졌다.
이제 나아가는 일만 남았다.
“흐음. 그보다 참 이상한 걸 집에서 키우는군.”
알렉세이의 눈동자가 방문의 틈새에서 거실을 몰래 지켜보던 어스름달을 향했다. 어스름달은 설마 들킬 줄 몰랐는지 화들짝 놀라며 방문을 닫았다.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해 두려움이 없음에도 알렉세이에게는 몸을 찌르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제 펫이라서요.”
“저런 녀석을 펫으로 삼다니 역시나 오버랭크 헌터다워.”
알렉세이는 어스름달이 인간의 형상을 취해도 그 내면이 어떤 존재인지 대충 짐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흉악한 존재의 것인지도. 그렇기에 현찬을 더욱 높게 평가했다. 현찬은 고개 저었다.
“아직 오버랭크는 아니죠. 뭐, 조만간 찍겠지만요.”
“펫으로 저런 걸 키우고, 귀여운 가정부 아가씨도 어지간한 존재가 아닌 것 같은데.”
알렉세이의 안목은 정확하게 에크티를 꿰뚫어 보았다. 그녀 또한 인간이 아니었다. 거의 인간에 가까운 존재지만, 신에 의해서 창조되었기에 어떻게 보면 인간보다 더 월등한 인조 인간이었으니까.
“그리스 신의 안배를 받아서요.”
“흐음. 부럽군. 뭐, 나도 내 파트너가 마음에 드니까 딱히 후회는 하지 않는다만 가끔 이런 부분에서 다른 영령들의 능력이 부러울 때가 있단 말이지.”
알렉세이는 순수한 전투에 특화한 영령과 계약을 맺었다. 그렇기에 전투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그는 정말로 신급 영령에 걸맞은 압도적인 무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다만 그렇기에 다른 분야에서는 취약하다는 뻔한 단점이 있었다.
이야기가 좋게 마무리되었고 현찬은 알렉세이를 배웅해주었다.
둘이 현관문을 나란히 나서자 바깥에서는 벌써 소식을 듣고 몰려온 기자들이 카메라 플래시를 마구잡이로 터뜨렸다.
경호원들이 그들의 출입을 막으려고 벽을 세웠지만, 특종에 목마른 기자들의 광기를 감당해내지는 못했다. 기자들은 여기서 사달이 나더라도 반드시 특종 하나는 건지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눈에 담고서 현찬과 알렉세이를 바라보았다.
“한국의 기자들도 우리나라 파파라치 못지않군.”
“뭐, 그렇기는 하죠.”
“한번 양보를 해 줄까?”
“그러면 가볍게 제가 먼저 이야기를 시작하죠.”
현찬이 먼저 앞으로 나서자 아우성치던 기자들이 일순 조용해졌다. 선생님 말씀 잘 듣는 시끄러운 학급 같았다.
“여러분들이 많은 이야기를 궁금해하시는 건 알겠습니다. 다만, 오늘 한 이야기는 아마 조만간 뉴스에서 확인이 가능할 거로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강현찬 헌터님은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저요? 저는 늘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겁니다.”
“가령?”
“가령……. 세상의 누구도 잡지 못하고, 잡으려 들지 않았던 몬스터들을 사냥하는 일 말이죠.”
현찬의 말에 기자들이 눈에서 빛을 뿜었다. 그들이 재차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고 현찬은 짧은 포토타임을 가졌다. 기자들도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현찬이 무슨 말을 꺼내려는 지. 그들의 귀가 활짝 열렸다. 현찬의 입이 열렸다.
“저는 <난제>를 사냥할 겁니다.”
그리고 이번 사냥의 첫 번째 목표는 바로 중국의 천흉(天凶)이 될 것이다.
사상 최고의 사상자를 냈던 사상 최악의 <난제>.
녀석이 현찬의 목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