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무한계약-98화 (98/265)

# 98

98화 승자의 선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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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영웅은 빛에 휩싸이며 자기 세상으로 돌아갔다. 전당의 문이 닫혔다. 넓은 공간을 잔뜩 채우던 영령들은 각자 자신의 세상으로 돌아갔다. 전당에 남은 것은 팔이 6개나 달린 청동 신장과 현찬 둘뿐이었다.

“전부 떠났군. 따라와라.”

영령들도 사라진 것을 인지했는지 청동 신장이 현찬에게 그렇게 말했다. 청동 신장은 등을 돌려 어디론가 걸어갔다. 현찬도 자연스레 그의 뒤를 쫓았다. 신장의 발걸음은 크고 빨랐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그의 거대한 청동의 몸체는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현찬 또한 그의 발걸음에 맞춰서 빠른 속도로 그의 뒤를 따랐다. 매우 빠른 속도로 움직이면서 숨 한번 헐떡이지 않자 신장이 눈을 빛냈다. 그 시선은 어떻게 보면 자신을 잘 쫓아오는 현찬에 대한 호의처럼 느껴졌다.

[아직 안 들킨 거 같지?]

‘이곳의 관리자라 하더라도 너의 존재는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아.’

[그렇다면 다행이지. 나도 이곳이 어떤 장소인지 궁금했던 차니까. 우리 세계의 어지간한 신들조차도 접근이 허락되지 않은 세계가 만들어 놓은 또 다른 세계. 과연 이곳에 무슨 비밀이 숨어 있을지 기대되지 않아?]

‘궁금하지 않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러니 청동 신장의 뒤를 따라가는 게 아니겠는가. 청동 신장이 대체 무슨 용무로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현찬으로서는 크게 손해 보는 것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 세계의 숨겨진 진실에 한 발짝 더 다가갈지도 모른다.

계속 걷다 보니 처음에 불려왔던 거대한 신전 내부에 들어서게 되었다.

높은 천장과 끝이 없이 이어진 기다란 복도가 보였다. 그리고 복도의 좌우로 나열된 거대한 석상들의 모습은 다시 봐도 장관이었다.

“이 석상들은 대체 뭐죠?”

딱히 대답이 돌아오길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지만, 청동 신장은 현찬의 물음에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지금까지 영웅투쟁을 겪어온 다양한 세계의 영웅들이다.”

“지금까지의 영웅투쟁? 오늘이 처음 있었던 게 아니라는 소리인가요?”

“자세한 건 나도 말해줄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이여, 잊지 말 거라. 세상은 넓다. 네가 사는 곳만이 이 세계의 전부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세상. 보지 못하는 세상. 그곳에서도 생명체들은 살아간다. 그곳에서도 신들은 존재한다. 그곳에서도 영웅들은 투쟁(鬪爭)한다.”

현찬도 안다.

로키에 의해 꿈속에서 본 세계는 현찬의 시야를 확 넓혀주었다. 거대한 우주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차원, 그리고 그 차원들이 점차 가까워지며 하나로 뭉쳐지는 모습은 전율이 일어나는 것이었으니까.

차원과 차원이 서로 충돌하며 연결되고 그 세계에 존재하는 자들은 서로 왕래가 가능하다. 그러나 왕래가 꼭 좋은 것은 아니다. 사이좋게 지내는 곳도 있는 반면에 서로 피 튀기며 전쟁을 벌이는 곳도 있었으니까.

“그대가 투쟁에서 우승하기는 했지만 내가 보기엔 그대의 세계는 아직 너무나도 약하다. 그러니, 이번 우승을 기회로 세계는 지구에 유예기간을 더 줄 것이다.”

모든 차원이 서로 통합된 것도 아니다. 대표적으로 지구가 아직 다른 차원들과 제대로 연결되지 않은 상황. 어떻게 보면 포도송이의 끝부분에 가까스로 매달린 자그마한 포도알이 지구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 난리 나겠지.’

그리고 차원들이 뭉치고 뭉치며 다른 차원들이 더 나타나지 말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런 미래를 생각하면 이렇게 유예기간이 더 주어진다는 사실은 매우 반가운 것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대비하게 하지?’

현찬이 겪었던 일들을 아무리 떠들어도 대부분 사람은 믿지 않을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그래도 신의 계약자인 현찬의 말에 신빙성을 가지고서 믿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체제의 변화를 두려워하고 현재에 머무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진실이라 하더라도 외면하고 싶을 것이다.

어째서 세계의 진실을 엿본 다른 오버랭크 헌터들이 시민들에게 그런 진실을 꺼내지 않았는지 현찬은 이해했다.

그들도 아는 것이다. 이 지구의 사람들에게 있어 지금 지구가 직면한 진실은 너무나도 무거운 것이라는 걸.

하지만 결국에는 언젠가 벌어지게 될 일. 그것이 미뤄졌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준비할 수 있도록 무언가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 거라. 그대의 세계, 지구는 너무나도 약하지. 그러니 우리는 지구에 나름의 선물을 더 줄 예정이다.”

“선물이라고요?”

“새로운 변화가 곧 지구로 찾아올 것이다. 이는 그 어떠한 영웅들의 세계에도 주지 않은 것이다. 오직 그대가, 그 약하고 자그마한 세계에서 떠밀리듯 선택된 그대가 이 자리까지 올라온 것에 대한 세계의 선물이다.”

“우승한 보람이 있군요.”

“그대는 거기에 더해서 이 전장에서 특별하게 이름을 남길 수 있게 될 거다. 여기 이 자들처럼 말이지.”

현찬은 청동 신장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곳에는 다른 석상들과 다르게 찬란한 빛으로 번쩍이는 황금상들이 나열해 있었다. 복도의 끝, 현찬이 가보지 못한 장소에는 새로운 무언가가 가득했다.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의 힘으로 증명한 진정한 영웅들이지.”

“대단하군요.”

현찬은 솔직한 심정을 내뱉었다. 그만큼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압도적이었다. 높이만 30m 정도 돼 보이는 석상들의 모습도 만만치 않았지만 거의 100m에 가까운 거대한 황금상은 훨씬 더 웅장하고 장엄한 느낌이 있었다.

그 수는 비록 끝없이 나열된 석상들과 다르게 채 8개밖에 없었지만, 황금상이 보여주는 위풍당당한 모습만 보아도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대, 강현찬 또한 이 자리에 정당하게 이름을 올리며 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대가 인정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해이해지는 일이 없이 앞으로 더 나아가기를 바라지. 내가 본 그대라면, 확실히 다른 녀석들보다 더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의외로 청동 신장은 험악하고 무서운 외모와 다르게 칭찬이 후했다. 어쩌면 이번 영웅투쟁에서 가볍게 우승을 차지한 현찬을 좋게 바라보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혹시 이 주변을 더 둘러보아도 될까요?”

“안될 일은 없겠지. 하지만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해줄 수는 없다. 그 점은 유의하도록.”

청동 신장의 허락이 떨어지자 현찬은 황금상이 있는 거대한 홀을 돌아다니며 각각의 황금상을 살폈다. 거대한 황금의 조각 아래에는 그자의 이름으로 추정되는 것이 적혀 있었는데 8개의 황금상은 모두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읽을 수 있겠어?’

[아니. 다른 세계의 언어라서 나도 몰라. 이런 언어를 사용하는 다른 예시가 주어진다면 유추라도 가하겠지만, 이런 사소한 거로는 알 수 없어.]

‘역시 그런가.’

큰 기대를 하지 않아서 실망하는 일도 없었다. 현찬은 조금 더 둘러보기로 했다. 이곳은 현찬도 난생처음 와보는 곳이기에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충분히 풍족해지는 기분이었으니까.

[그렇다 해도 정말 대단하네. 락(lock)이 걸려 있어서 신인 우리조차 확인할 수 없는 장소에 이러한 것들이 있었다니. 역시 이 세계는, 이 우주는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정말로 많아.]

‘솔직히 더 많은 것을 알고 싶기는 하지만, 그건 욕심이겠지.’

[아니. 그래도 이 정도면 나름 충분히 소득은 있었다고 생각해. 지금까지 우리 말고도 이 영웅의 전당이 총 9번이나 되는 영웅투쟁을 벌였다는 거잖아. 최소 9번이야. 어쩌면 그 이상 벌어졌을지도 모르지. 우승자가 없어서 전부 죽어버렸다는 가능성도 버릴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이곳에서 우승한 자들의 세계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현찬은 궁금한 것이 많았다.

청동 신장이 말하는 <세계>라는 것은 대체 무엇이지? 신을 초월한, 이 세상의 근간인 다른 무언가라도 되는 것인가? 그리고 이 영웅투쟁이 이 전에도 일어났다면 그 세계의 사람들도 <대통합>을 이루었다는 소리인가?

‘궁금한 게 너무나도 많아.’

[나도 그래. 올림포스에서 지내던 시절에는 그래도 어지간한 것들은 전부 알고 지냈었는데 이렇게 무언가 꽉 막히고 답답한 기분은 처음이야.]

하지만, 하고 헤르메스가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도전정신이 더욱 불타오르고 의욕이 생기기 마련이지. 너무나도 즐겁지 않아? 이 세계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하고 거대해. 우리의 인식 밖에 존재하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 또 다른 세계는 대체 어떤 곳일까. 참을 수 없이 흥분되는걸.]

헤르메스의 말에 현찬은 입가에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현찬 또한 그의 파트너의 말대로, 너무나도 가슴 벅차오르는 흥분을 참을 수 없었으니까.

‘그래. 그리고 우리에게는 아직 시간이 많아. 벌써 성급하게 움직일 필요는 없겠지.’

아마 본격적으로 정보를 알게 되는 것은 본격적인 <대통합>이 벌어지고 나서부터일 것이다. 그것이 <세계>가 지닌 의지고 뜻이라면, 분명하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뭐든지 직접 일어나기 전까지는 추측이며 환상에 불과하다. 그것이 발생하고 나서 확인해도 늦지 않는다.

“음?”

현찬은 움직이다가 이내 발걸음을 멈추었다. 시선이 움직이며 7번째 황금상을 향해 고정되었다. 정확히는, 황금상의 바로 아래에 영웅을 찬양하는 글귀에 더불어 이름 부분에 눈이 절로 갔다.

‘헤르메스. 이건…….’

[나도 확인했어. 이것은 그때 보았던 그 세계의 언어야.]

7번째 황금상의 이름에는 현찬이 반야 가면에게 얻었던 이세계의 언어와 매우 비슷한 글자들이 적혀 있었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이거 분명히 그거 맞지?’

[맞아. 제대로 봤어. 그렇다면 지구에서 지금 무언가 꿍꿍이를 벌이는 게 바로 이 녀석이라는 소리겠지?]

현찬은 고개를 들어 황금상을 올려다보았다. 높이만 100m가 넘는 것이라 그런지 목이 아플 정도로 까마득했지만, 눈에 담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대부분 황금상이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는 것과 대비되게, 7번째 황금상의 영웅은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본인이 원해서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얼굴을 보여주지 않아서 황금상으로 제작할 때 그렇게 한 지는 현찬도 모른다.

다만, 단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점은 이 녀석은 영웅투쟁에서도 어딘가 매우 수상쩍을 정도로 자신의 정체를 숨겼다는 것이었다.

현찬은 녀석의 모습을 꼼꼼히 살폈다. 로브를 깊게 뒤집어써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약간 튀어나온 턱선과 로브 사이로 언뜻 보이는 다부진 몸을 보면 잘 단련된 남자로 추정되었다.

호리호리한 몸매를 보면 베더귄트처럼 힘으로 밀어붙이는 타입이 아닌, 매우 날렵하고 빠른 타입이 분명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혼자서 끙끙 앓아봤자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이곳의 관리자인 청동 신장에게 물어보는 것이 훨씬 더 편한 길이였다.

“뭐지?”

“이 황금상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이 녀석 말인가? 그래, 그러고 보니 기억에 있군.”

민족의 지도자 엘카르.

청동신장이 알려준 이름이었다.

“다른 영웅들과 다르게 독특한 녀석이었지. 무에 관한 숭배도, 머리 쓰는 비범함도 선호하지 않았어. 오로지 집착과 독기, 광기로만 모든 것들을 이겨내고자 했지. 비실비실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그 누구보다도 강했다.”

“광기?”

“녀석이 민족의 지도자라 불리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지. 자신의 일족을,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지 서슴지 않고 저지를 각오가 있었다.”

“지금 저자는 어떻게 됐는지 아십니까?”

“애석하게도 내가 아는 바는 없다.”

청동 신장이 두툼한 손으로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다만, 녀석의 세계가 멸망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다른 차원과의 전쟁에 휘말려서 이겨내지 못하고 사라졌다고 하더군.”

“멸망했다고요?”

청동 신장이 알려준 정보는 예상 밖의 것이었다. 현찬의 눈동자가 절로 크게 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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