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96화 영웅투쟁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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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만 해도 살 떨리는 광경이네.”
무너진 니플헤임의 얼음들은 끝없는 어둠의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산처럼 거대했던 성은 순식간에 자그마한 점으로 변하더니 암흑의 장벽 너머로 사라졌다. 현찬은 자신이 저 아래로 떨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등골이 싸늘해졌다.
‘내 계획이 들어맞아서 다행이야.’
이 필드에서 <비행>은 금지되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필드가 붕괴까지 한다. 붕괴에 휘말리는 순간 긴눙가가프의 끝이 없는 구덩이의 아래로 떨어진다. 오버랭크 헌터에 필적하는 현찬이라고 하더라도 죽는다.
그렇기에 현찬은 머리를 써서 ‘땅’을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최치원>의 설화에서 나오던 <최고운전>의 이야기다.
당 나라 황제는 당으로 유학 온 최치원을 미워했다. 그래서 최치원에게 따끔하게 경고하기 위해서 ‘네가 서 있는 땅은 내 것이다.’라며 호통을 쳤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니 알아서 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숙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 대답을 들은 최치원은 공중에 한일(一) 자를 그려 그 위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당 황제에게 물었다.
‘이것도 폐하의 땅입니까?’
최치원이 보여주는 신통한 모습에 황제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현찬은 그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혹시 하는 생각에 최치원 영령과 계약을 맺어 허공에 붓으로 글자를 그렸고 그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현찬의 생각은 보기 좋게 들어맞았다.
현찬은 <비행>을 한 것이 아니었다. 현찬이 그린 글자는 그 자체만으로 땅이었고 그 땅은 붕괴하는 니플헤임의 필드와는 별개의 땅이었다. 그래서 붕괴의 영향에 전혀 미치지 않았고 지금도 멀쩡하게 남아있었다.
[……이건 나도 생각도 못 한 방식인데.]
“영령들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살피니까 가능한 거야.”
헤르메스도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나직이 감탄했다.
때마침 모든 시련이 끝났는지 주변의 풍경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순식간에 바뀌며 현찬이 처음 섰던 콜로세움의 광경으로 재조립되었다. 현찬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은 콜로세움의 정 중앙에 서 있었다.
“대체 붕괴는 왜 일어난 거야?”
[자신들을 쏙 빼놓고 멋대로 영웅투쟁을 진행한 것에 화가 난 불청객이 나타나서 난동을 피우기 시작했거든.]
난동?
헤르메스의 말에 의아해진 현찬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하늘의 장막 너머에서 거대한 기운들이 강하게 충돌하는 것이 현찬의 피부 위로 전해졌다. 엄청나게 거리가 먼데도 그 충격의 여파가 현찬에게 영향을 미칠 정도라면, 지금 힘겨루기를 하는 자들의 능력이 보통내기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다른 세계의 신들이 존재하는데 그런 자들과 기 싸움할 수 있는 존재라면 난동의 주도자들 또한 최소한 또 다른 세계의 신이라는 소리였다.
[나야 뒤에서 쏙 빠져서 몰래 지켜보고 있는데, 우리 지구촌 신들이 싸움이 붙지는 않았어. 그나마 좀 호전적인 토르나 바보형 아레스가 몸이 근질거린다고 나서려는 것을 다른 신들이 말리는 정도?]
싸움의 여파에 의해서 영웅들이 겪는 시련의 필드가 붕괴했다. 하계가 아닌 차원과 차원 틈새의 공간이라면 그들 또한 힘을 발휘하는데 페널티가 없다. 각자의 세계에서 유명한 신들이 본신의 힘으로 서로 대치에만 들어가도 공간이 비틀리는 결과를 낳을 수 있었다.
“그러면 다른 시련의 영웅들은 어떻게 됐어?”
[대부분이 뭐 붕괴에 휘말렸지. 휘말리기 전에 각각 신들이 권능을 발동해서 죽은 녀석은 없는 것 같더라고.]
“나의 경우에는 붕괴가 엄청 빨랐던 것 같던데.”
[현찬이 너의 경우에는 남들이 아직도 첫 시련을 통과하지 못한 상황인데도 너무 빠르게 시련을 통과하다 보니 여파가 가장 크게 간 거야. 너무 잘나가서 오히려 불편을 겪은 셈이지.]
“대체 어느 세계 신이 화가 났기에 이 난리를 피우는 거야?”
[심연이야.]
“…….”
헤르메스의 대답에 현찬은 입을 합 다물었다.
심연이라면 이제 듣기만 해도 치가 떨리는 이름이었다.
온갖 어둠과 이상한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가 바로 심연이다. 그곳은 생물들마저도 온갖 기괴하고 끔찍한 외형을 지닌 곳이었다. 그런 곳에 신이 존재한다? 현찬은 못 들을 걸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일단 통과는 했다고 보면 되는 거겠지? 이 이후로 뭐가 더 있을까?”
[일단 확인해 본 바로는 이 이상 무언가 있는 건 없는 거로 알고 있어. 뭘 더 해보려고 해도 저 바깥쪽에서 한바탕 드잡이질이 벌어졌으니 제대로 진행도 되지 않겠지.]
“그렇겠지?”
둘이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현찬의 주변으로 하나둘, 다른 세계의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자신이 현찬과 다른 존재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하나같이 다 신기하게 생겼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귀가 길고 얼굴이 아름다운 엘프.
온몸이 털로 뒤덮여 있으며 짐승의 형상을 갖추고 있는 수인.
현찬의 명치까지밖에 오지 않은 자그마한 키를 지녔지만, 현찬의 몸의 2배는 될법한 도끼를 든 난쟁이 등등.
그들은 하나같이 독특한 복장과 무기를 들고 있었다. 현찬은 자신이 마치 판타지 세계에 온 듯한 착각에 빠졌다. 아니, 어떻게 보면 착각은 아니었다. 몬스터들이 현실에 나타나는 순간 현찬이 사는 세계도 이미 판타지가 돼버렸으니까.
현찬이 주변을 신기한 시선으로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거대한 덩치를 지닌 호랑이와 사자를 살짝 섞은 것 같은 수인 하나가 현찬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주변 영웅들은 이미 시련을 겪느라 지친 상태였다. 수인의 시비에 휘말리기 싫은 영웅들은 슬쩍 길을 비켜주었고 거대한 수인은 현찬의 코앞까지 손쉽게 당도할 수 있었다. 크르릉. 녀석이 숨을 내뱉자 짐승의 울림소리가 났다.
“네놈이 그 지구라는 곳에서 뽑혀서 온 놈이냐?”
수인의 목소리는 매우 굵고 거대했다.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하늘을 높게 찌르는 첨탑이 우뚝 솟아오르는 걸 보는 것 같았다. 현찬은 귀를 강하게 울리는 소리에도 불구하고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뽑혔다기보다는, 좀 강제로 떠밀린 감이 없지 않아 있지. 아니, 그게 뽑힌 거려나?”
애초에 이 모든 일이 <로키>의 독단으로 벌어진 일이라서 현찬은 자신이 딱히 지구의 대표자라는 자각이 없었다.
그런 현찬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일까 사자 수인은 거칠게 콧김을 흥 내뱉었다.
서로 가까운 거리에 마주 보며 서 있다 보니 수인의 콧김에 현찬의 머리카락이 작게 살랑였다.
“어처구니없구나!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섰으면서 그런 심드렁한 태도라니! 의지도, 각오도, 패기도 없구나! 이런 비리비리해 보이는 녀석이 우리를 모두 제치고 시련에서 우승했다고? 나는 절대 인정할 수 없다!”
“거 참. 네가 인정 못 하면 어쩔 건데.”
갑자기 나타나서 콧김을 불지를 않나, 시비를 걸지를 않나. 현찬도 기분이 나빠졌고 자연스럽게 퉁명한 말이 나왔다. 그것이 심기를 건드린 걸까. 사자 수인 머리 위로 딱 봐도 화가 났다는 굵은 힘줄이 도드라졌다.
“크흐흐! 과연, 겁을 먹지 않은 것은 칭찬해줄 만하다. 그러나, 그만한 담력은 자신의 실력이 제대로 뒷받침되어야만 이 가능한 법! 그러지 않은 상태에서의 행동은 그저 만행에 불과하다. 인간이여. 네놈의 행동이 과연 용기인지 만용인지 확인을 해 봐도 되겠나?”
“생긴 것과 다르게 말은 청산유수네. 어차피 거절하면 거절한 대로 비웃을 거면서.”
이 자리에서 물러서면 현찬은 주변 영웅들의 웃음거리가 된다. 어디 현찬뿐일까? 지구의 존재들은 모두 겁쟁이라며 불릴지도 몰랐다. 그것을 피하려고 싸움을 받아들인다면 그건 또 그거대로 사자 수인이 원하는 바이기도 하다.
현찬은 그제야 사자 수인의 눈동자에 타오르고 있는 질투의 불길을 읽어낼 수 있었다.
자신의 힘을 과신하고 있는 녀석은, 딱 봐도 약해보이는 현찬이 시련에서 가장 첫 번째로 통과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원래 다 자기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녀석들이 뭉치면 이런 서열 싸움은 꼭 일어나는 법이야.]
“그러게 말이야. 귀찮게 됐어.”
“네놈은 대체 누구와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냐?”
“혼잣말이야.”
저 녀석들은 각기 자신의 세계에서 계약을 맺은 <영령>과 대화조차 나눌 수 없는 상태다. 현찬이야 헤르메스의 꼼수 덕분에 가능했다. 여기서 굳이 그 사실을 밝힐 필요가 없기에 현찬은 가볍게 둘러댔다.
“그래. 내 용기를 시험해 보고 싶다고?”
“정확히는 만용인지 확인을 해보고 싶다는 소리지.”
“그거참, 재미있군그래. 안 그래도 나도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 막연히 생각은 했거든.”
사람은 5명만 모여도 이상한 인간이 꼭 1명씩은 섞인 법이다. 그런데 이런 장소에서, 떠받들려지듯 자라온 자들이 수십이 모여 있다. 문제를 일으키는 녀석은 반드시 있을 거라는 게 현찬의 생각이었고 그것은 들어맞았다.
“호오. 생각하고 있었다? 의외로군.”
“내가 은근히 머리가 좋아서 말이야.”
현찬은 허리춤에 걸린 검을 뽑아 들었다.
“무기 들었다고 해서 딱히 비겁하다고 할 건 아니지?”
“물론 아니지.”
사자 수인은 씨익 웃으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자세히 보니 녀석의 두툼한 가죽으로 이루어진 방어구 틈새로 무기의 손잡이로 추정되는 것들이 얼핏 보였다. 마냥 손톱이나 이빨로 싸울 이미지와 다르게 녀석도 자신의 무기를 더 사용하는 녀석이었다.
“내가 바라던 바였지만 일단 명복을 빌어주지. 우리 사이라케 행성에서 가장 위대한 전사 ‘갈루카’칭호를 받은 나 베더귄트는 자비가 없으니까 말이야. 뭐, 이런 싸움에서 목숨마저 사라지는 것은, 전사로서 영광이지 않겠나.”
“흠. 나는 그런 전사로서의 마음가짐이 썩 뛰어나지 않아서 잘 모르겠는걸.”
하지만.
“이 사람이라면 전사로서의 마음가짐을 알 수 있겠지.”
“뭐?”
베더귄트가 현찬의 말에 무언가 이상한 모순점을 발견하는 순간 현찬의 주변으로 강렬한 마력이 몰아치며 거대한 돌풍을 이루었다. 주변에서 흥미로운 시선으로 구경하던 다른 세계의 존재들은 모두 그 마력의 밀도에 놀라며 현찬과 베더귄트에게서 거리를 조금 더 벌렸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신은 없지만, 이 기세를 보아 둘이 싸우는 순간 그 피해가 만만치 않을 거라는 게 모두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러는 사이 현찬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다른 영웅급 영령을 불러내는 데에 성공했다.
3차 십자군 전쟁 당시, 이슬람 최강의 명장인 살라흐 앗 딘을 무려 10년이나 괴롭힌 유럽 최고의 전술가.
무기를 다루는 데 있어 그를 능가하는 자는 없었으며 전쟁에서 언제나 가장 먼저 진군하고 가장 늦게 퇴각한 자.
전술적인 부분에서 중국에 항우가 있다면 유럽에는 이자가 있다.
일국의 왕이기도 하며, 최고의 장수이기도 했던 자.
<사자심왕(The Lionheart) 리처드 1세>
최강의 전술과 최강의 무력을 지닌 영령이 현찬에게 자신의 힘을 빌려주었다.
[허허. 다른 녀석들이 어찌나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한다 하더니 설마 나에게도 이런 기회가 올 줄은 몰랐군. 계약자여. 고맙네.]
“저야 말로요.”
[그보다 정말로 놀랍군. 내가 사자왕이라고 불리기는 했지만, 설마 저렇게 떡 하니 사자처럼 생긴 자와 싸우게 될 줄이야.]
“가능하시겠습니까?”
현찬의 물음에 리처드는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가능하다마다.]
그의 두 눈에서는 새로운 투쟁을 향한 뜨거운 열망이 마그마처럼 끓어오르고 있었다.
[누가 진정한 사자왕인지 내 직접 보여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