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95화 영웅투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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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도 풀도 바위도 없는 세계였다.
보이는 거라고는 꽁꽁 얼어버린 얼음들과 그 위를 뒤덮은 눈뿐.
파도처럼 굽이치는 거대한 얼음 산맥과 곳곳에 펼쳐진 절벽, 날카롭게 솟아있는 얼음의 대지는 조금만 발을 삐끗했다가는 중상입을 정도로 위험해 보였다.
“갑자기 왜 니플헤임이지?”
[…… 아무래도, 로키의 영향이 있는 것 같아.]
현찬을 직접 영웅의 전당으로 보낸 당사자가 바로 로키였다. 그것을 생각하면 현찬이 헤쳐 나가야 하는 이 시련에서 북유럽 신화와 관련된 것이 있다고 해서 크게 이상할 것은 없었다.
현찬은 절벽의 아래를 살짝 내려다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어둠이 보였고 눈에 마력을 실어서 보려고 해도 그 깊이가 끝이 없었다. 결국 <헤르메스의 눈>을 발동시켜서야 그것이 보통 어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떨어지면 바로 죽겠군.”
긴눙가가프(Ginnungagap)
북유럽 신화 태초에 존재하는 가장 커다란 구멍이다.
저 아래의 아래에는 이미르의 피가 터져 나와 고여 버린 거대한 바다가 있겠지만 높이가 워낙 까마득해서 함부로 몸을 날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만들어진 공간임을 고려하면 태초의 거인 이미르의 피가 고이기 전의 공허 자체일 수도 있으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현찬은 일단 이 절벽에 절대 떨어지지 않기로 다짐했다. 물론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나는 수단이 있으니 별로 상관없었다. 현찬이 그렇게 탈라리아를 신고서 날아오르려는 순간 강력한 힘이 현찬의 몸을 속박했다.
“이건 또 뭐야?”
현찬이 날아오르려는 것을 그만두자 그 힘은 자연스럽게 다시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날려고 하면 힘은 재차 현찬의 몸을 날지 못하게 붙잡아 두는 것이다.
“헤르메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방금 막 확인했어. 아무래도, 다른 녀석들이 일종의 클레임을 넣은 것 같아.]
“클레임이라니. 자기들이 무슨 손님이라도 돼?”
[웃기는 이야기지. 아무래도 모든 녀석이 현찬이 너를 좋게 보지는 않으니까. 오히려 다른 세계의 영웅이 잘나간다는 것 때문에 시기하고 질투하는 녀석들도 있어. 특히나 너처럼 하늘을 날아서 시련을 우회적으로 통과하는 녀석은 없었으니까. 꼬투리 잡기에 딱 좋았던 거야.]
“그래서. 하늘을 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는 소리야?”
[말하자면 그런 셈이지.]
“끄응. 역시나 쉽게 되는 일이 없구나.”
말은 그렇게 해도 현찬은 내심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품었다.
하늘을 날아서 빠르게 시련을 클리어하는 짓은 일종의 치트키를 쓰고서 이기는 느낌이었다. 무언가를 해도 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던 차에 이런 핸디캡은 오히려 반가울 정도.
“그래. 모든 게 다 쉽게 되면 재미가 없지.”
나름의 장애가 있어야 그것을 뛰어넘었을 때 느껴지는 성취감도 큰 법이다.
현찬은 씨익 웃으며 눈보라가 몰아치는 니플헤임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북유럽 신화는 여타 신화들에 반해 매우 추상적이고 문헌이 여러 개로 갈리기에 정확히 어떤 것이 이번 시련의 목표인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이 무력을 증명하는 시험임을 고려하면 이번에도 시원하게 싸우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게 현찬의 추측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대충 들어맞았다.
“벌써 몰려오네.”
멀리서부터 크레바스를 뛰어넘으며 이쪽을 향해 밀려오는 푸른 피부를 지닌 거인들.
북유럽 신화에서 신들의 숙적이라고 알려진 서리 거인들이었다.
거인이라고 하더라도 덩치가 4m 정도 될 뿐이었지만 피부 위로 꿈틀거리는 근육은 매우 우락부락하고 단단해 보였다. 깊고 넓은 크레바스를 가볍게 뛰어넘는 스피드는 날렵한 들짐승을 보는 것 같았고 얼음으로 만들어진 무기까지 손에 쥐고 있었다.
“어릴 적 히어로 영화에서 보던 장면이랑 비슷하네.”
그것도 북유럽 신화를 바탕으로 해서 만든 영화라 이것과 비슷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현찬은 차분한 시선으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서리 거인들을 바라보았다.
‘원래 북유럽 신화에서 이런 거인들과 싸우는 존재들은 대부분이 신이었지.’
거인들과 싸우던 인간 영웅은 없었다. 그렇기에 아직 신급 영령을 부를 수 없는 현찬의 입장에서 이 니플헤임을 헤쳐 나가기에 가장 최적화된 영웅은 없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부를 영령이 없다고 해서 마냥 불리한 건 아니었다.
영웅과 계약을 맺지 않더라도, 무기 정도는 불러낼 수 있었으니까.
<전승차용-도구>
원래 이 능력은 별로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영령과의 계약도 없이 원하는 무구의 전승 일부를 불러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만약에 이런 짓을 했다가는 해당 무구를 사용하는 영령과 사이가 나빠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더라도 해당 무구의 원주인에게 허가를 받아야 하는 귀찮은 능력이었다. 그래서 어지간한 영령들과는 사이좋게 지내고 싶은 현찬은 별로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기에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번에 사용할 무구의 주인은, 굳이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화륵!
현찬의 검이 불길에 휩싸였다. 테레이오스테 안에 내장된 검의 능력이 아니었다.
화염과 화산의 신인 헤파이스토스의 시뻘건 불길과는 궤를 달리하는 그것은 다른 신화의 전승에서 불려온 검의 능력이었다. 샛노란 화염이 테레이오스테와 하나가 되어서 자신의 힘, 존재감을 강하게 뿜어냈다.
불의 거인 수르트가 사용했다는, 세상을 불태우는 검.
레바테인(Lævateinn.)
그 검을 손에 쥔 현찬의 주변 얼음과 눈이 순식간에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현찬을 향해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오던 서리 거인들이 멈칫했다. 그 뜨거운 열기는 두려움이 없는 서리 거인들에게도 불안감을 심어주었다.
화르르륵!
그러는 사이에도 레바테인이 뿜어내는 화염의 열기가 더욱 강해지고 불길이 커지기 시작했다. 높은 하늘에서 보면 시리도록 푸른 도화지 위에 붉은 점이 선명하게 찍혀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자. 덤벼.”
불의 검을 이리저리 휘두르자 불똥이 사방으로 꽃잎처럼 휘날렸다. 현찬은 자신을 포위한 서리 거인들을 향해 가볍게 손을 저으며 도발을 해 보였다. 그리고 현찬의 도발은 확실하게 먹혀들었다. 서리 거인들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붉은 눈동자로 현찬을 죽일 듯이 노려 본 것이다.
쿠워어어어!
현찬을 향해 서리 거인들이 달려들었다. 현찬은 그에 맞춰서 화염으로 휩싸인 레바테인을 횡으로 휘둘렀다. 검의 궤적에 따라 시뻘건 선이 그어졌다. 달려들던 서리 거인들이 검에 잘려나갔다. 반으로 갈라진 서리 거인은 레바테인의 열기에 녹아내렸다.
레바테인의 위력은 정말로 무시무시했다. 실제 전승에서 나타난 세상을 불태워 멸망시키는 위력은 나오지 않겠지만 서리 거인들 정도는 손쉽게 해치울 수 있는 정도였다. 현찬은 검을 횡으로 휘두르며 거기에 더해서 한 차례 더 회전하며 휘둘렀다.
촤아악! 붉은 줄기가 허공에 아로새겨졌고 거기에 걸린 것은 뭐든지 다 잘려나갔다. 거인들은 당연한 일이었고 손에 쥔 얼음으로 이루어진 무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레바테인의 앞에서는 모든 것이 평등했다.
날카롭게 몰아치던 눈보라도 현찬의 주변으로는 다가가지도 못했다. 접근하기도 전에 눈은 녹아서 물이 되었고, 그것은 또 얼마 가지 못해서 증발하여 수증기가 되었다. 현찬의 주위로 시뿌연 수증기가 안개처럼 번져나갔다.
그 안에서 들려오는 것은 거인들의 고함과 비명이었다. 그리고 보이는 것이라고는 수증기 안쪽에서 번쩍이며 터져 나오는 레바테인의 화염이 전부.
쿠워어어어엉!!
얼음 대지를 강하게 뒤흔드는 고함과 함께 다른 서리 거인보다 더 거대한 녀석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놈들은 야만족처럼 아무것도 두르지 않은 서리 거인과는 달랐다. 덩치도 더 크고 몸 곳곳에는 갑옷으로 추정되는 물건들을 입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저리 꺼져!”
현찬의 레바테인의 앞에서는 이런 녀석들 또한 다른 서리 거인들과 똑같은 운명을 맞이하고 말았다.
현찬은 크레바스를 뛰어넘으며 바닥에 착지함과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그 직후 현찬의 머리가 있던 자리에 얼음으로 이루어진 화살이 스쳐 지나갔다. 원거리 공격이다. 현찬은 즉시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레바테인을 휘둘렀다. 검에서 뿜어져 나온 화염이 부채꼴을 그리며 뻗어져 나갔고 멀리서부터 현찬을 저격하려던 서리 거인들이 속절없이 죽어 나갔다.
“정말 끝도 없네! 헤르메스! 아직 멀었어?”
[아직 끝나려면 더 남았어. 아마 니플헤임 중앙에 있는 서리 거인의 왕과 그 휘하 괴물들을 쓰러뜨려야 만 모든 것이 끝날 거야!]
“칫. 이러면 대충 시간을 끌면서 녀석들의 숫자를 차곡차곡 줄이는 것만이 답인가.”
현찬이 그런 생각을 품음과 동시에 니플헤임 전체가 한차례 크게 흔들렸다. 순간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한 현찬은 가까스로 자세를 잡았다.
“이건 또 무슨 일이야?”
[필드 붕괴야!]
“뭐? 그건 또 뭔데?”
우르르르르릉!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물을 시간은 없었다. 그 대신 천지를 아우르는 굉음과 함께 니플헤임의 바깥부분부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얼음 파편이 검고 끝이 없는 긴눙가가프의 무저갱 아래로 떨어졌다.
“미친.”
[여기뿐만이 아니야. 모든 영웅의 시련에서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어! 아무래도 다른 누군가가 개입한 것 같아.]
이렇게 만들었다면 시간을 끌 수도 없었다. 필드 붕괴의 속도는 매우 빨랐다. 바깥쪽부터 엄청난 속도로 무너져 내리는 붕괴는 순식간에 현찬이 있는 곳까지 마수를 뻗쳤다. 심지어 지금은 하늘을 날 수 없도록 억제된 상태였다. 좋으나 싫으나 무조건 니플헤임의 중앙을 향해 달려나가야만 했다.
조금이라도 늦는 순간 떨어진다. 현찬은 자신의 다리에 채찍질을 가하며 앞으로 내달렸다. 서리 거인들 또한 붕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왕좌왕하며 도망가려고 했지만 아무리 날렵한 서리 거인이라 할지라도 붕괴의 속도보다 빠르지 못했다.
쿠르르릉!
무너지는 얼음의 덩어리들과 함께 서리 거인들이 우르르 떨어져 내렸다.
현찬은 고개를 살짝 돌려 뒤를 보다가 이내 달리는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탈라리아를 신고서 하늘을 날 수는 없지만 달리는 속도를 더 빠르게 할 수는 있었다. 그렇기에 현찬은 무너져 내리는 균열에 휘말리지 않고 빠른 속도로 니플헤임의 중심을 향해 달려나갈 수 있었다.
“비켜!”
현찬은 달리는 와중에도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서리 거인들을 베어냈다. 앞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현찬은 전부 다 레바테인으로 녹여버리고 베어냈다. 그러면서도 달리는 속도는 전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가속이 붙어서 더욱 빨라졌다.
“보인다!”
저 멀리서 보이는 거대한 얼음의 산. 아니, 산이 아니라 성이었다. 너무나도 거대하다 보니까 산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 얼음의 성벽 위에는 다른 거인들과 확연히 다른 거인 하나가 우뚝 서 있었고 그 주변으로는 다른 거인들이 도열 해 있었다.
“저걸 뚫으라고?”
못 뚫을 것까지는 없었다. 하지만 저 두꺼운 얼음의 성문을 부수는 동안에 거인들이 공격하지 말라는 보장도 없었다. 현찬은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이대로 속도를 높여서 서리 거인의 성으로 쳐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취할 것인가.
“헤르메스! 필드 붕괴의 범위는?”
[전부야!]
즉, 필드가 붕괴하기 전에 거인을 죽여야만 한다는 소리였다.
‘대체 어떻게 돼먹은 난도인지는 모르겠네. 하지만 방법이 없지는 않지.’
현찬은 달리는 속도를 확 늦추며 자리에 멈춰 섰다.
[현찬아?! 뭐 하는 거야? 이러다가 떨어진다고!]
헤르메스가 놀라서 소리를 질렀고 멀리서 성벽 위의 서리 거인들조차 갑자기 멈춘 현찬을 보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현찬에게는 다 계획이 있었다.
“아니. 떨어지는 건 내가 아니라 저 녀석들이야.”
현찬은 레바테인을 거두었다. 그리고 <계약>을 발동했다.
“영웅급 영령 중에서 이런 상황에 어울리는 사람이 하나 있지.”
번쩍이는 빛과 함께 테레이오스테의 형상이 변하더니 현찬의 손에 붓 하나가 쥐어졌다.
현찬은 바로 그것을 자신의 앞 허공에 가로로 그었다. 붓의 먹물이 놀랍게도 허공에 칠해지며 두껍고 깔끔한 필체의 한일(一)자를 만들었다.
“여기는 내 땅이야.”
현찬은 즉시 공중에 뜬 일자에 올라탔다.
그 직후 현찬의 아래가 붕괴하며 무너져 내렸고 그것은 순식간에 서리 거인들의 성을 집어삼켰다.
“후우. 보기 좋은데?”
금이 쩍쩍 가며 무너져 내리는 성의 모습은 꽤 장관이었다. 현찬은 한일 자에 앉으며 그 광경을 유유히 지켜보았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현찬이 즉석에서 계약맺은 영령의 정체.
글자를 이용한 도술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영웅급 영령이었다.
자신이 만든 글자 위에 올라탄 현찬은 저 아래로 떨어지는 얼음들과 서리 거인들을 보며 식은땀을 닦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