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94화 영웅투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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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한다.]
헤르메스의 말과 동시에 세상이 변했다. 마치 수채화에 물을 끼얹어서 세상을 번지게 만드는 것처럼 흐릿하게 녹아내리는 모습을 보며 현찬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세계에서 뽑혔다는 영웅들을 만나보고 싶었는데 그럴 틈이 없었다.
하긴. 이곳은 애초에 세계의 안배로 인해 만들어진 곳. 영웅들의 의사 따위는 별로 필요가 없을 것이다.
[중간 점검과 비슷하다고 해도 너무 방심하지 마. 이곳에서 죽으면, 정말로 죽는 거니까.]
“알고 있어.”
현찬은 재차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헤르메스의 눈>을 발동하지 않았기에 정보창의 향연은 보이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저 너머에서 여전히 다양한 존재들이 현찬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의 틈새에서, 현찬을 이곳으로 보내버린 <로키> 또한 현찬을 지켜보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어디 해 보자고.’
대체 무슨 꿍꿍이로 자신을 이런 장소로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왕 어울리게 되는 거 확실히 이겨 줄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다른 세계의 영웅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싸우겠지만, 현찬에게는 함께 싸워줄 존재들이 있었으니까.
녹아내린 세계가 끝나고 새롭게 재정립된 광경은 현찬의 기억 속에 없는 초현실적인 풍경이었다.
“여기는……?”
초원이 사라지고 나서 현찬의 코를 강하게 찌르는 것은 바로 소금의 짜디짠 냄새였다. 쏴아아! 귓가를 아련하게 울리는 강렬한 파도 소리와 함께 현찬의 주변에서는 노를 젓는 선원들이 가득했다.
현찬은 지금 거친 바다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배에 타고 있었다.
[여기는 시험의 장소야. 각 영웅은 각 세계에 존재하는 괴물들과 싸워서 승리를 쟁취해야 하는 곳이지. 보통은 랜덤으로 뽑히는데 아무래도 네가 나와 계약을 맺어서 그런지 상황이 이렇게 됐네.]
“너와 관계가 있다는 건, 여기는 그리스 신화 쪽이라는 소리야?”
[그렇지.]
그 순간 현찬의 귓가로 감미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의 마음의 깊은 곳으로 스며들어와 그 심장을 쥐고서 뒤흔드는 마성의 리듬이 머리를 울렸다.
현찬은 그제야 지금 보고 있는 이 광경이 대충 어떠한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열심히 노를 저으며 나아가는 선원들. 바다위로 퍼져나가는 매혹적인 노랫소리.
“오디세이아의 세이렌.”
매혹적인 목소리와 노래로 사람들을 끌어들여 잡아먹는다는 유혹의 상징.
멀리서부터 보이는 바위섬의 모습을 보자 현찬은 자신의 예측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재밌겠는걸?”
글과 만화로서만 접했던 그 상황에 직접 실제로 들어오다니. 게다가 이 피부에 와 닿는 바다의 바람은 분명히 환상이나 그런 것이 아니다. 여기는 정말로 실제의 그 세계를 본뜬 것이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상황을 만들어냈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현찬이 직접 마주한 이 시련이었다.
“시련의 이름 같은 것도 있나? 유혹의 시련, 뭐 이런 거?”
[있다면 대충 그런 느낌이겠지.]
헤르메스와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배는 점점 세이렌들이 노래를 부르는 바위산으로 접근했다. 현찬은 눈을 감고서 세이렌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확실히 듣기는 좋았다. 만약에 정신력이 약한 인간이 들었다면 그야말로 눈이 돌아갔겠지.
하지만 세이렌들에게 가장 큰 불행이라면 노래를 듣는 대상이 현찬이라는 점이었다.
헤르메스의 계약자, 거짓과 교만을 꿰뚫어 보며 최면과 세뇌는 절대로 먹히지 않는다. 그런 현찬에게 고작 이런 노래로 유혹을 한다는 것은 성인 남성을 사탕으로 꾀는 것만큼 어처구니가 없는 짓이었다.
“거기 멋진 청년. 우리와 함께해요.”
“저희의 아름다운 노래를 들어주세요.”
“여기로 오신다면 평생 함께할 수 있어요.”
세이렌 세 자매는 확실히 아름다웠지만, 현찬의 눈에는 차지도 않았다. 로키의 유혹도 뿌리쳤는데 고작 좀 예쁘장한 몬스터에 시선이 가겠는가? 목소리는 아름답고 귀가 퍽 즐겁다만 그것이 전부였다.
“저희 노래를 들어주세요.”
“너희 노래는 너무 지루해. 혹시 팝송 알아?”
“예?”
현찬의 말에 그 뜻을 알아먹지 못한 세이렌 세 자매가 되물었다.
“대중가요는? 재즈는 할 줄 알아? 아니면 발라드도 괜찮아. 랩 할 수 있으면 해도 돼. 할 수 있어?”
애초에 21세기에서 살아가며 온갖 다양한 음악을 들어온 현찬에게 있어서 배경음악도 없이 목소리 하나로 귀를 완전하게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악기도 없지만 목소리만으로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리는 능력은 대단하다만 그게 전부였다.
“모, 모르는데요?”
“그래? 그럼 안녕.”
현찬은 노를 젓는 선원들에게 명령을 내려 세이렌의 섬을 빠르게 벗어났다. 멀어지는 배를 보며 세이렌 세 자매는 아연한 표정을 지었고 현찬의 시선을 통해 그것을 함께 보는 헤르메스는 미친 듯이 낄낄거리며 웃어댔다.
[가차 없는데? 무척 나쁜 남자야.]
“저런 애들에 빼앗길 시간 없어. 게다가, 내 예상이 맞는다면 앞으로 괴물을 둘이나 더 마주쳐야 하니까.”
오디세이아 이야기에서 오디세우스는 고향에 돌아가려고 애쓰지만, 괴물들을 만나며 자신의 선원을 잃게 된다.
세이렌은 그저 시작에 불과하다. 두 번째로 등장하는 녀석은 더 위험하니까.
촤아아악!
바닷물이 거칠게 요동치더니 이내 거대한 뱀 머리 6개가 배의 갑판 위로 튀어 올라왔다.
스킬라(Scylla).
마녀 키르케의 저주를 받은 님프가 변해버린 끔찍한 괴물.
원래라면 스킬라가 서식하는 곶과 카리브디스가 서식하는 해역 중 하나를 선택해서 넘어가야 하겠지만 이것은 시련이기에 둘 다 마주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다렸다고.”
현찬은 자신의 테레이오스테를 뽑아들었다.
바다 위, 그것도 배에서 싸우는 것이다. 바다에서 서식하는 스킬라를 상대하기에 매우 힘들 것이다. 하지만 현찬은 전혀 겁먹지 않았다. 이쪽은 무력이 약한 오디세우스가 아니었다.
“이 능력은 처음 발동시키는데, 어디 한번 해 볼까?”
테레이오스테에 내장된 또 다른 하나의 기능 <불카누스>.
현찬은 그것을 발동시켰다.
화륵!
테레이오스테의 새까만 검신에 시뻘건 불이 타올랐다. 그 뜨거운 열기는 검 손잡이를 타고 현찬의 몸에 흘러들어와 현찬의 주변 공기를 후끈 달구었다. 하지만 뜨겁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 불꽃은, 현찬의 몸에 강력한 기운을 불어넣으며 신체 능력을 더욱 상승시켜 주었다.
‘대단한데?’
괜히 신이 만들어준 무구가 아니었다. 현찬은 끓어오르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스킬라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현찬의 팔이 일순 잔상을 남기고 수십 개의 참격을 만들었다. 너무나도 빨리 검을 휘두르다 보니 칼날이 수십 개로 늘어난 것처럼 보였다. 그런 칼날의 궤적을 따라서 붉은 불길이 허공에 그림을 그렸다.
서걱!
베이는 소리는 하나였다. 하지만 스킬라의 6개의 머리가 잘려나갔다. 검이 너무나도 빠르게 베었기에 6개의 머리를 차례대로 베어도 소리가 한번 만 난 것이었다. 배에 달라붙은 스킬라의 몸은 바다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고 현찬은 스킬라의 머리를 바다로 치웠다.
“후우. 후우. 이거 좀 좋긴 한데 부담이 너무 큰걸?”
<불카노스>를 해제한 현찬은 헐떡이는 숨을 가라앉혔다. 순간적으로 신체 능력을 뻥튀기하며 검에 강렬한 화염을 두르는 것은 좋았지만 체력과 마력의 소모가 극심했다. 막대한 에너지를 한꺼번에 태워서 짧은 순간에 폭발적인 힘을 뿜어내는 일종의 도핑이었다.
그래도 무사히 2번째 시련을 넘겨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바다의 여신이자 모든 뱃사람의 공포인 카리브디스(Charybdis).
이것은 확실히 상대하기 껄끄러웠다.
“온다.”
거대한 소용돌이가 바다의 한 가운데에서 생성되었다. 하지만 소용돌이의 주변을 보면 날카로운 이빨들이 상어의 지느러미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즉 저 소용돌이 자체가 카리브디스의 입이 빨아들이는 것이라는 소리였다.
그야말로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거대한 덩치였다. 하지만 현찬은 그보다 더 거대한 괴물을 보았기에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심드렁하게 소용돌이를 만들며 배를 빨아들이는 카리브디스를 바라볼 뿐이었다.
[방법이 있어?]
“대충?”
이렇게 거대한 괴물을 상대하기에는 확실히 현찬의 힘이 부족했다. 게다가 카리브디스는 바닷속에 몸을 담고 있어서 공격을 하려고 해도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 목표를 특정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바다에 들어가기에는 현찬이 불리한 상황이 되고 만다.
[어떻게 이기려고?]
“애초에 이 시련은 저런 괴물들을 반드시 죽여야 하는 게 아니야.”
그랬다면 현찬이 세이렌도 직접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스킬라는 배에 달라붙었으니 어쩔 수 없이 죽였지만 저런 덩치 큰 녀석은 굳이 내가 건드릴 필요는 없지. 중요한 것은, 저 소용돌이를 넘어서야 한다는 점이라는 거야.”
[어떻게 하려고? 어지간한 영령의 배를 <차용>한다고 하더라도 저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
“헤르메스. 잊었어? 오디세우스는 배를 멀쩡하게 남겨서 살아남지 않았어. 선원 모두가 죽어도 혼자서 살아남았지.”
그러니 중요한 것은 이거다.
혼자서라도 좋으니 저 카리브디스를 무사히 넘어가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시련을 통과하는 기본적인 요건이었다.
“뭐, 잡으면 좋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잖아?”
기왕이면 가장 빠르게 끝내는 것이 베스트다. 현찬은 그대로 임무의 허점을 꿰뚫어 보고서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차용> [탈라리아(Talaria)]
현찬은 날개 달린 신발을 착용하고서 그대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현찬이 나무갑판에 발을 뗀 직후 선원들을 포함한 배가 카리브디스의 입안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갔다. 나무가 부서지고 선원들이 물에 빠졌다.
현찬은 자연스럽게 카리브디스를 넘어갔고 그것을 증명하듯 순식간에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대단한데? 정말로 통과했어! 지금 다른 녀석들이 아주 난리 났어. 대체 누가 최단기간에 벌써 첫 번째 시련을 클리어했냐고 시끌벅적해!]
“내가 첫 번째라니 예상은 했어도 기분은 좋은데?”
[벌써 너에게 관심을 가지고 눈독을 들이는 녀석들이 속출하고 있어.]
현찬이 이곳에서 압도적인 성적으로 승리를 거둠으로써 지구에서도 현찬에 관해서 아직 모르고 있던 영령들이 현찬에게 큰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는 현찬이 향후 헤르메스의 도움 없이도 계약을 맺는데 원활한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이대로 나머지도 한꺼번에 밀어버리자고!]
헤르메스는 자신의 계약자인 현찬이 이렇게 인정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너무나도 기뻤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자식이 학교 가는 것을 지켜보았더니 시험에서 100점을 맞고 돌아오는 기분이 이러할까?
“좋았어. 다음은 어디냐.”
현찬이 당당하게 외치자 풍경이 또다시 변했다. 번진 물감처럼 뭉그러지며 사라지던 풍경은 어느덧 새롭게 재정립되며 또 다른 장소로 바뀌었다.
“이건…….”
갑자기 몰아치는 강렬한 한파에 현찬이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즉시 테레이오스테에 화염을 일으켜 주변의 냉기를 몰아냈다.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바라보자 보이는 것은 거대한 빙산과 하얗게 뒤덮인 눈, 그리고 몰아치는 눈보라였다.
“그리스 신화에 이런 장소가 있었나?”
[…… 아니. 우리 신화의 장소가 아니야.]
헤르메스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정말로 진지하게 말할 때 나오는 헤르메스의 말투에 현찬도 덩달아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곳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세계가 아니었다.
[여기는, 니플헤임(Niflheim)이야.]
안개와 서리의 땅. 북유럽 신화에서 서리 거인들이 지낸다는 한 없이 차가운 대지가 바로 이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