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
93화 영웅들의 전당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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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대체 어디야?”
현찬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이는 것은 알 수 없는 재질로 이루어진 신전의 내부뿐. 천장까지 높이만 무려 100m는 될 정도로 높았고 끝을 모를 정도로 펼쳐진 기다란 복도의 좌우로 30m 정도 되는 석상들이 도열해 있었다.
“신기하게도 생겼네.”
석상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다양했다. 갑옷을 입은 기사, 동물의 가죽을 뒤집어쓴 야만적인 남성, 로브를 갖춰 입은 여 마법사, 자그마한 체구를 지니고 단검을 든 이종족, 거대한 덩치와 근육을 지닌 늑대인간 등.
온갖 인종, 성별, 종족의 석상들이 이어져 있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압도되는 풍경에 현찬은 혼자 보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태평한 생각을 하며 자기도 모르게 허리춤에 손이 간 현찬은 자연스레 잡히는 테레이오스테의 감촉을 느끼며 어느 정도 안도했다. 그래도 무기마저 없지는 않으니 어지간한 상황이 들이닥치더라도 나름의 대비는 할 수 있을 테니까.
[현찬아! 들려?!]
“헤르메스?”
헤르메스의 목소리에 현찬이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헤르메스의 모습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평소라면 충만하다고 느낄 정도로 크게 이어진 헤르메스와의 연결이 지금은 매우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아주 약간의 바람만 불어도 그대로 꺼질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어둡고 싸늘한 바람이 현찬의 몸을 가볍게 훑고 갔다. 아무리 주변을 살펴도 사람의 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삭막한 곳.
현찬이 느끼는 이 장소는 딱 그러했다.
[끄응. 로키, 이 빌어먹을 녀석이 설마 이런 짓을 벌일 줄이야.]
헤르메스의 씨근덕거리는 목소리가 현찬의 정신을 원래대로 일깨웠다. 그래, 아직은 헤르메스와 완전히 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동안에 최대한 정보를 수집해야 했다.
“헤르메스. 여기는 어디야? 너는 알고 있어?”
[대충은. 나도 듣기만 했지 실제로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어.]
아무래도 헤르메스는 현찬이 보고 있는 풍경을 어느 정도 눈에 담을 수 있는 듯싶었다.
[이곳은 전 우주의 다양한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강자들이 모이는 <영웅의 전당>이야.]
“<영웅의 전당>? 처음 듣는 이름이네.”
[당연히 처음 듣지. 왜냐하면, 이곳은 지구가 아닌 다른 차원. 정확히는 차원과 차원의 틈새에 존재하는, 만들어진 세계니까.]
“여기가?”
현찬은 재차 주변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인위적인 느낌이 있다. 하지만 많이 큰 건축물이라고 생각했는데 만들어진 세계라니. 현찬이 아는 것 그 이상으로 지금 이 장소는 매우 스케일이 크다고 할 수 있었다.
“어떻게 해야 나갈 수 있지?”
[끄응. 그게 복잡해. 일단 설명을 하자면 조금 길어질 수 있는데 최대한 간략하게 말해줄 게. 이곳 <영웅의 전당>은 아까 말했다시피 다양한 세계의 강자들이 모이는 곳이야. 그리고 그들이 모인다면 어떤 일을 벌일지 않고 있지?]
“그러게. 딱 봐도 싸움을 붙이겠지.”
[맞아. 싸워야지. 다른 세계의 영웅들과. 이곳은 그러기 위해서 지어진 장소니까. 아마 대부분의 세계에서 뽑힌 영웅들이 이곳에 곧 불려올 거야. 원래는 우리 지구가 맨 마지막이었고 아직 준비도 안 된 상태였는데 네가 이렇게 떡 하니 뽑혀버렸으니 어쩔 수 없지.]
“내가 뽑혔다고?”
스스로 동의한 일도 없는데 뽑혔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현찬의 인상이 절로 구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근원이 바로 로키의 짓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현찬은 자기도 모르게 긴장하고 말았다.
헤르메스나 손오공조차도 한 수 접어줄 정도로 온갖 악동의 짓을 벌이고 다닌 로키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로키>가 현찬을 이곳으로 보냈다. 분명히 어딘가에 거대한 꿍꿍이가 숨어있을 거라는 생각에 아무리 현찬이라도 경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들의 세계는 나약해. 하지만 다른 세계는 워낙 강하지. 그래서 세계와 차원이 서로 충돌하며 하나로 합쳐지기 전까지 우리 지구의 존재 중에서 이 <영웅의 전당>으로 올 수 있는 사람은 없었어. 다른 세계의 영웅들과 비교하면 약하니까.]
“오버랭크 헌터들 조차도?”
[그들도 강해. 하지만 다른 세계는 더욱 강해. 현찬아. 우주에는 지구만 있는 게 아니야. 다른 세계도 얼마든지 존재해. 그런 세계가 지구와 최소한 같다고 생각을 해도 우리와 대등한 존재들이 있다는 소리야.]
“그렇겠지.”
[지구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어. <영웅의 전당>에 보낼 영웅도 다른 세계의 영웅에 비하면 부족하지. 그래서 시간이 필요했고.]
지구의 사람들은 과학이 발전하면서 스스로가 예전과 다르게 나약한 길을 걷게 되었다. <대통합>이 벌어지고 각성자가 생기며 <영령>과 계약을 맺을 수 있게 되었고,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경지까지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다른 세계는 그러지 않을 거로 생각해?]
“흠.”
헤르메스의 말에 현찬은 자기도 모르게 이해하고 말았다. 다른 세계가 지구와 같지만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더 야만적이고 투쟁만 일삼는 곳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곳이기에 그곳에서 사는 자들은 지구의 사람들보다 억세고 강할 것이다.
[그런 세계에서 뽑힌 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나게 강해. 거기에 자기 세계의 <영령>과 계약을 맺었다고 생각을 해 봐.]
지구의 헌터들은 인간이 <영령>과 계약을 맺어서 강해진 케이스다. 하지만 다른 세계에서 <영령>급의 인간이 <영령>과 계약을 맺으면 얼마나 강할 것인가?
당장에 항우정도 되는 존재가 그와 비슷한 <영령>과 계약을 맺을 때 단순 계산만으로도 영웅급 영령의 2배에 가까운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거 좀 큰일인데.”
현찬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순간 거대한 신전이 한차례 떨렸다.
[무슨 일이지?]
“아무래도.”
현찬은 자신의 뒤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거대한 석벽이 이쪽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앞으로 가라는 뜻인 거 같아.”
[…… 영웅들이 다 모였다는 소리야.]
그리고 영웅들이 모인다면, 으레 이 지어진 장소에 걸맞은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제길. 로키 이 자식. 자기만 멋대로 전당을 엿보았다고 자랑하더니 결국 이런 짓을 벌여?]
“너는 몰랐어?”
[전당은 대부분의 세계의 신들에게도 허가되지 않는 이상 지켜보는 것이 금지된 곳이야. 경계를 넘나들며 정보를 수집하는 나조차도 확인이 불가능해. 하지만 로키는 확인했지. 대체 무슨 꼼수를 부려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의 ‘기만’과 ‘속임수’라면 어떻게든 우회로를 선택했겠지.]
그리고 로키가 현찬을 강제로 영웅의 전당으로 밀어 넣었다.
대체 왜? 이유가 무엇일까? 현찬이 죽길 바라서?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다른 이유가 있단 말인가?
“거 참. 오늘 하루 만에 참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네.”
현찬은 거대한 신전의 내부를 걸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곳에 세워진 석상의 주인들은 지금까지 있었던 이 <영웅의 전당>에 참여했던 다양한 세계의 영웅들일까? 그 들 중에서도 승리한 자일까. 아니면 스러져서 사라져 간 자일까.
그것이 어떤 것이든, 결국 현찬 또한 이 전당에 자신의 모습을 하나 남기리라는 것은 확실했다.
“기권은?”
[당연히 불가능해. 지금 전당이 열려서 열심히 정보를 수집하며 확인은 해 보는데 그렇게 썩 쉽게 넘어갈 만한 곳이 아니야.]
기다란 복도의 끝이 보였다. 조금은 어두운 통로의 끝에 보이는 새하얀 빛. 저곳이 바로 출구다. 현찬은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출구를 향해 쭉쭉 나아갔다.
“네 도움은?”
[그것도 불가능해. 정확히는 현찬이 너 스스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은 활용할 수 있지만, 신들을 부를 때 내가 도움을 주는 것이 원천 차단되어 있어. 여기서는 오롯이 너의 능력만으로 싸워야 해. 원래라면 이렇게 대화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나야 계약을 주관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 정도는 전해줄 수 있지.]
“흠. 하나 같이 공평한 상태에서 싸우자 이건가.”
하긴, 아무리 다른 세계의 영웅들이라고 하더라도 헤르메스의 도움을 받은 현찬이 다른 신과 계약을 맺어서 다 쓸어버리면 이만한 밸런스 붕괴도 없다. 역으로 말하자면 다른 세계의 신과 계약을 맺은 존재도 그런 깽판을 부릴 가능성이 있으니 그것을 미리 차단한다는 뜻.
하지만.
“신급이 아니라면 다른 등급은 상관없다는 소리잖아?”
[…… 역시 눈치가 빨라서 좋아.]
헤르메스의 목소리에는 희미하지만 즐거움이 담겨 있었다. 현찬은 알 수 있었다. 왜냐고? 왜냐하면, 현찬 또한 이 상황이 너무나도 즐거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세계의 영웅들과 싸운다는 말은 틀렸어. 이 영웅 투쟁은 일종의 중간점검에 가까워. 여러 세계가 통합되면서 과연 어디가 살아남을 확률이 높은지 확인하기 위한 <세계의 안배> 같은 거니까. 굳이 벌써 서로 물고 뜯고 할퀴며 싸울 필요는 없지.]
“그렇다는 건?”
[영웅들끼리 서로 싸운다는 배틀로얄이 아니라, 너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한 일종의 시험이 될 거야. 정확히는, 세계의 괴물들을 사냥하는 거지. 영웅들에게 있어서 가장 딱 맞는 미션이지. 그렇기에 위험하고.]
헤르메스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현찬은 피식 웃었다.
“헤르메스. 너무 나에게 장난식으로 걱정을 밀어 넣은 거 아니야?”
[헤헤. 들켰어?]
“내가 널 몰라? 그래. 이래야지. 세상은 넓다고 하지만 안 그래도 더 넓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거든.”
지구에서 최강이 되고자 했다. 그것이 현찬의 목표였고 현찬은 그것을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
하지만 너무나도 빠르게 가다 보니 그 목표를 금방이라도 달성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문득 불안감이 들었다. 이걸 달성하면, 나는 이제 뭘 하지? 조용히 그냥 평생 떵떵거릴 돈으로 편안한 삶을 살아야 하나?
당연히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미 투쟁의 삶을 걸어 나가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좀이 쑤셔서 그렇게는 못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더 큰 목표를 세워서 거기를 향해 나아가는 것.
그리고 이 <영웅의 전당>이라는 곳은 그런 현찬에게 너무나도 확고한 길을 알려주는 장소였다.
[원래 이렇게 싸움에 집착하는 스타일이 아니었잖아?]
“살다 보니 이렇게 바뀌더라고.”
헤르메스의 장난스러운 말에 농담으로 돌려주며 현찬은 빛이 가득 넘치는 출구에 발을 담갔다.
[조심해.]
새하얀 빛이 몸을 휘감는다. 그리고 주변의 풍경이 확 하고 바뀌었다. 검고 칙칙한, 재질을 알 수 없는 신전의 내부에서 푸른 하늘이 그대로 보이는 거대한 평지가. 헤르메스의 경고가 그와 함께 작은 선율을 만들며 현찬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세계의 신들의 이목이 이곳으로 모이고 있어.]
아니, 평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넓어서 평지처럼 느껴졌을 뿐이다. 그 거대한 평지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지평선 너머의 건축물이 보였다. 그것들이 주변을 원형으로 에워싼 상태였다. 콜로세움. 그래. 이곳은 바로 거대한 콜로세움이었다.
“알아.”
헤르메스의 말에 대답하며 현찬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헤르메스의 눈>을 발동한 현찬의 눈동자가 금색으로 물들며 푸른 하늘, 그 반투명한 하늘색 도화지의 장막 너머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보고 있어.”
[여명의 신이 당신을…….]
[불굴의 신이 당신을…….]
[고요한 음험의 신이 당신을…….]
[죄와 환희의 신이 당신을…….]
[어둡게 기어 다니는 신이 당신을…….]
[가장 높이 나는 신이 당신을…….]
[무거운 중심의 신이 당신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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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도. 나도.”
현찬은 머릿속으로 밀려 들어오는 무지막지한 정보의 폭풍 때문에 이마를 찡그렸다. 뇌에 가해지는 부하에 바로 <헤르메스의 눈>을 해제하고 고개를 돌린다.
[조심해야 해. 너에게 관심을 두는 놈들이 상당히 많아.]
그 약하디약한 지구에서 넘어온 영웅이라는 존재는 대체 누구일까?
지금까지 이 <영웅의 전당>에서 벌어지는 영웅투쟁(英雄鬪爭)을 미룰 대로 미룬 녀석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볼 수 있겠지?
대부분 신의 관심은, 생각은 아마 그러할 것이다. 어디 신들뿐일까. <영령>으로서 격이 올라간 영웅급 영령들, 혹은 영웅에 준하는 왕급 영령들 또한 바깥에서 이 세계를 지켜보는 중일 것이다.
모든 존재의 관심이 쏠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들 중 일부만 모여도 그 수가 엄청나다. 그렇기에 슬쩍 보기만 해도 현찬의 머리에 부하가 몰려왔고 현찬은 눈살을 찌푸리며 시선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럽게 이런 상황이 닥쳐와서 조금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현찬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서 나타나는 다양한 종족의 영웅들을 보며 씨익 웃었다.
“재미있을 거 같지 않아?”
[뭐, 재미는 잘 모르겠지만.]
헤르메스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딱히 네가, 질 것 같지는 않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