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
92화 영웅들의 전당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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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찬은 눈을 감았다 떴다. 모든 것이 새하얀 것으로 이루어진 공간. 그리고 그곳의 중앙에, 아니 중앙인지 어딘지도 모를 곳에 서 있는 자신.
하늘도 땅도 모든 것의 구분이 없는 장소였고 경계조차 없고 명확함조차도 없는 세계였다.
그리고 그런 자신과 눈을 마주 보고 정면에 서 있는 정체불명의 여인이 하나.
“누구시죠?”
현찬이 묻자 여인은 소리 없이 웃었다.
현찬은 조심스레 그녀의 모습을 살폈다.
신장이 커 보이지만 현찬보다는 작았다. 검고 어두운 밤하늘을 베어내 그대로 펼친 것 같은 검은 머리카락은 허리 아래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었다. 녹색 기조로 보이는 독특한 복장의 옷은 아무리 봐도 현대인의 그것이 아니었고 옷 틈새로 드문드문 드러난 피부는 막 쌓인 초겨울의 눈처럼 새하얗다.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였다.
지금까지 많은 아름다운 사람들을 보아온 현찬이 보더라도 지금 마주하고 있는 여성이 정말로 아름답다는데 이견의 여지를 갖지 않았다.
그렇기에 현찬은 상대방을 더욱 경계했다.
그 미소는 분명히 선해 보였고, 자신을 향한 시선은 분명히 호감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피부를 타고서 슬금슬금 올라오는 이 불안감은 절대로 현찬의 착각이 아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기분을 곧이곧대로 맹신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여자가 현찬을 향해 조심스레 다가왔다. 현찬은 자기도 모르게 허리춤에 손이 갔다. 하지만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현찬은 그제야 자신이 꿈속 세계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꿈에서 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현찬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다가오던 묘령의 여성은 현찬과 2m 정도 떨어진 거리에 멈춰 섰다.
“너무 그렇게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 이곳에서 죽어도 꿈에서 깨지는 않을 테니까.”
속마음을 노골적으로 꿰뚫는 말에 현찬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대체 정체가 뭡니까?”
“신.”
그녀는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말했다. 신? 신이라고? 현찬은 더더욱 상대방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신이라는 자들이 솔직히 지금까지 현찬에게 호감을 표현하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저렇게 노골적으로 수상한 신은 본능적으로 거리낌이 느껴졌다.
현찬은 스스로를 신이라고 밝힌 자를 향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신들도 여러 종류가 있죠. 착한 신, 나쁜 신. 뭐 대충 나누면 이런 데 당신은 그렇다면 어떤 부류죠?”
“흐음. 그렇게 물어볼 줄은 몰랐는걸?”
그녀는 현찬의 질문이 재밌기라도 하는지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호호 웃었다. 그 행동 하나하나에 남자의 마음을 뒤흔드는 교태가 스며들어 있었다.
위험하다. 현찬은 그렇게 느꼈다. 저 여신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행동에 스며든 남자를 유혹하는 기운은 절대로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현찬의 머리가 빠르게 돌았다. 그의 머리에 떠오르는 여신들에 관한 정보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이 정도의 매혹이라면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아니면 검은 머리카락에 어딘가 퇴폐적인 행동을 보면 밤의 여신 니케? 북유럽의 프레이야? 어쩌면 내가 모르는 다른 서구권의 여신일 수도 있어.’
아무리 생각해도 누구인지 정답이 나오지 않았다.
“뭐, 너무 긴장하지 마. 나는 너를 해할 생각이 전혀 없으니까.”
“그러면 저를 왜 이런 장소로 불러낸 거죠?”
“여기가 불편해? 그러면 바꾸지 뭐.”
그녀가 손가락을 가볍게 까닥이자 새하얀 공간의 풍경이 변했다. 검은 깃털 같은 것들이 사방으로 휘날리며 무언가의 형상을 이루더니 이내 아무것도 없는 백색 공간은 온데간데없고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펼쳐졌다.
아름다운 호수와 숲. 그리고 화려한 꽃이 펼쳐진 정경에 현찬은 조심스레 발을 움직여 바닥의 잔디를 건드려 보았다. 분명히 꿈일 텐데도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어때. 마음에 들어? 내가 좋아하는 광경이야. 이런 아름다운 모습은 언제 봐도 즐거우니까.”
“그래서 목적이 대체 뭡니까?”
이대로 가면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휘둘리고 만다. 그러기 전에 미리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하고서 거기에 맞춰서 대화를 이끌어나가야 했다.
현찬의 그런 의도를 읽었는지 읽지 못했는지 모르겠지만 여인은 그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너에 대해서 많이 들었어. 강현찬. 헤르메스의 계약자. 헤르메스의 도움을 받아서 다른 신들과도 계약을 할 수 있다면서?”
“당신도 저와 계약을 맺고 싶어 하는 신 중 하나입니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렇지.”
그녀가 손을 휘젓자 현찬과 여신 사이에 새하얀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나란히 나타났다. 여신은 그곳에 앉으며 현찬에게도 의자에 앉으라고 제안했다. 현찬은 조심스레 여신의 맞은편에 앉으며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머. 그렇게 바라보면 조금 부끄러운데?”
“저와 계약을 하고 싶은데 이렇게 꿈속에서 불러냈다라. 아무래도 헤르메스와 썩 좋은 관계는 아니신가 보죠? 헤르메스를 통해서 제게 말을 걸지 않았으니까요.”
“글쎄. 그건 결국 생각하기 나름이 아닐까? 친하다 하더라도 헤르메스의 성격상 다른 신들에게 너에 대해서 알려주는 것을 별로 원치는 않을 테니까.”
“그렇다 해도 꿈으로 저를 따로 불러낼 정도는 아니겠죠.”
현찬의 말이 웃긴지 여신은 쿡쿡대며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아름다운 모습에 현찬은 어떻게든 최대한 이성을 지키기 위해 마음을 다스렸다.
조금만 방심했다가는 저 여인의 새하얀 손에 심장을 잡힐 것만 같았다. 그런 직감이 들었다.
“뭐, 내가 널 불러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일단 지금 가장 큰 이유를 말한다면 역시나 그냥 한 번 정도는 만나보고 싶어서?”
“신은 할 일이 없으시나 봐요.”
현찬이 비꼬는데도 그녀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신들은 바쁘지 않아. 오히려 시간이 넘치지. 그렇기에 무료하고, 그렇기에 권태에 빠져들어. 변함없이 지루한 세상. 그런 세상 속에서 너라는 존재가 얼마나 찬란한 가치를 띠고 있는지 알아?”
“많이는 들었죠. 저는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요.”
“그런 겸손함이 마음에 들어. 과자 먹을래?”
어느덧 새하얀 식탁보가 깔린 테이블 위에는 다양한 다과들이 놓여 있었다. 전부 다 먹음직스러웠지만, 현찬은 고개를 저으며 정중히 거절했다.
“제가 다이어트 중이라 서요.”
현찬의 말에 여신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현찬과의 대화 자체를 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른다는 반응이었다.
“아아. 정말이지. 넌 너무 탐이 나는 남자야.”
“이미 임자가 있거든요. 그것도 질투심이 아주 많은.”
“그러니까 더 탐이 난다는 거야.”
“거참 발상이 위험하시네요. 원래 성격이 그래요?”
“흐응. 너야말로 여신의 앞인데도 참 할 말 안 할 말을 다 하는구나?”
여신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서 현찬을 향해 검지를 뻗었다. 그런 단순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결과물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꽈드득! 그녀의 손가락 끝이 거대한 고목나무로 변했다. 너무나도 오래되고, 말라서 썩어버린 검고 칙칙한 고목나무. 그 고목나무는 날카로운 가지를 뻗치며 현찬의 몸을 사방에서 에워쌌다.
고목나무의 가지 하나하나에 스며든 지독한 기운은 현찬도 피부로도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여기서 그녀가 조금만 손가락을 까딱했다가는 현찬의 몸은 그야말로 벌집처럼 변할 것이다.
“신을 분노케 하면 어떻게 되는지 배우지 않았니?”
“배웠죠.”
현찬은 자신의 턱 끝에 살짝 닿을 듯 말 듯 한 나뭇가지 하나를 옆으로 밀어냈다.
“하지만 당신은 저를 절대로 건드리지 못해요.”
현찬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눈앞의 여신은 자신을 절대로 건드리지 못한다는 것을.
“재미있는 말을 하는구나. 여기는 내 세상이란다?”
“하지만 거짓된 세상이기도 하죠. 저와의 이야기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빈틈을 노려서 꿈의 세계까지 데려오신 건 좋았지만 과연 그 이상 무언가 하실 수는 있을까요? 현실의 저는 아무렇지 않을 텐데요.”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너를 영원히 이 세계에 가두고서 고통을 줄 수 있어. 그래도 네가 멀쩡할까?”
“과연 ‘순리’를 거스르면서까지 그렇게 행동을 할 의지가 충분하신가요?”
감은장아기는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이 소멸하더라도,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면 따를 의지도 있었다. 그런 그녀의 의지에 비해 눈앞의 여신은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확고한 것이 단 한 줌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순히 흥미, 혹은 다른 무언가의 이유로 저를 만나러 온 당신은 절대로 저를 건드릴 수 없어요. 순리를 거스르며 얻게 될 불이익을 감당할 생각도 없고 그럴 각오도 없죠. 그런데 어떻게 저를 건드릴 수 있다는 거죠?”
“나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다면?”
“확실히 신인 그쪽이라면 제가 모르는 다양한 방법을 사용할 수 있겠죠. 한낱 인간이 그것에 대항하거나 대비할 수도 없을 테고요. 그렇다 쳐도 별로 무섭지 않은데요.”
현찬은 씨익 웃었다.
그것은 무언가 확신을 얻은 자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었다.
“어디 건드려 볼 수 있으면 건드려 보세요. 북유럽의 신. <로키>”
“……!”
현찬의 말에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뜨여졌다. 그러더니 이내 현찬의 주변을 둘러싼 고목나무를 거두더니 배를 잡고서 미친 듯이 웃었다.
“후하하하하! 대단해! 정말로 대단해!”
그녀. 아니, <로키>는 현찬의 행동에 즐거워서 웃음을 터뜨렸다.
“내 정체를 파악하다니. 정말로 대단한 아이구나.”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죠.”
신화 속에 존재하는 로키는 기본적으로 남자다. 특히나 로키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사람들은 할리우드 히어로물에 나오는 그 이미지 때문에 남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컸다.
하지만 로키에게 있어서 성별이라는 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에 불과했다. 그는, 그녀는 원할 때마다 성별을 바꿀 수 있으며 어느 하나에도 구애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애까지 딸린 분이 이렇게 찾아오시면 안 되죠.”
“헤르메스에게도 자식은 있어.”
“유부남이랑 유부녀가 같아요?”
“그러면 남자로 변할까?”
“그쪽이 하고 싶으시다면야.”
“한 마디도 안 지는구나.”
로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의 검은 머릿결에 거기에 맞춰서 파도쳤다.
“뭐, 그래도 덕분에 정말 많은 것을 안 거 같아. 헤르메스, 이 부러운 녀석 같으니. 대체 어디서 이렇게 훌륭한 계약자를 건졌는지 모르겠다니까.”
“그래서 절 만나려는 이유가 그게 전부였어요?”
아니, 로키는 현찬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이미 정체를 들킨 마당에 더이상 현찬을 놀리거나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세상이 바뀌는 거 알지?”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걸까? 현찬은 잠자코 로키가 꺼내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걸 보면 알게 될 거야.”
그녀가 손가락을 까닥이자 주변 풍경이 또다시 변했다. 지구 어딘가의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이 아닌,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우주의 모습이었다.
‘저건…… 지구?’
지구뿐만이 아니었다. 지구 주변에 맞닿듯이 붙어 있는 여러 가지 행성들. 그것이 지구와 계속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지금 세계는 점점 변화를 거듭하지만, 아직 완전한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지. 저기 다가오는 차원이 딱 그런 거야. 다른 세계와의 융합. 그것이 지금 실시간으로 일어나고 있지.”
“다른 세계…….”
말로만 들었지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시선을 돌리자 지구와 멀리 떨어진 장소에는 검게 물들어 있는 행성이 있었다. 현찬은 저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얼마 전 지구와 연결되었던 <심연>이었다.
“지구만 해도 다양한 존재가 많지. 하지만 다른 세계까지 끼어들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개판이 되겠군요.”
“그렇지. 그러한 미래를 방지하기 위해서 신들은 자신의 힘을 믿고 맡길 수 있는 대리자가 필요해.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영웅들이 사라지고 그 가능성조차 사멸하고 말았지. 이제 세상에 영웅의 자격을 가진 자는 몇 남지 않았어.”
“그것이 저라는 건가요?”
현찬의 물음에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너는 최고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야. 어쩌면 영웅, 그 이상이 가능할지 모르지.”
“저를 부른 건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인가요?”
“아니. 한 가지 남았어.”
“남았다니 그게 무슨…….”
현찬이 물어보려는 순간 세계가 한 차례 진동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로키를 바라보자 로키는 고개를 들어 어딘지 모를 곳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 친구가 상황을 눈치챈 것 같네.”
“헤르메스가?”
[야 이! 로키! 감히 네가 나 몰래 현찬이를 건드려?!]
헤르메스가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지 로키의 세상이 거세게 흔들리며 점차 유리처럼 금이 가며 깨지기 시작했다.
“뭐, 이런 것도 상정 내였어.”
로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현찬의 가슴팍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부드러운 감촉과 함께 온기가 느껴졌다. 로키는 그런 현찬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며 콧김이 닿을 거리에서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무 날 미워하지 말아줘. 이것도 결국에는 세상을 위한 일이니까. 영웅 씨.”
그 말을 끝으로 로키는 현찬의 가슴팍을 강하게 밀쳤다.
현찬은 어디론가 빨려 나가는 감각을 느끼며 세상이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현찬이 눈떴을 때.
그가 보는 풍경은 잠들었던 자신의 침실이 아닌 전혀 새로운 세상이었다.
“이건 또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