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90화 난제의 활용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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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하게 해 줘야겠지?”
현찬이 주술을 풀어주자 반야 가면은 그제야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입을 몇 번 움직이더니 이내 현찬을 향해 이죽거렸다.
“나를 이렇게 풀어줘도 괜찮겠어?”
“어.”
현찬은 뭘 그런 걸 묻냐는 시선을 반야 가면을 향해 던졌다.
“자신 있으니까 너를 이렇게 풀어준 거야. 도깨비들이나 다른 사람들은 다 물렸어. 여기에 있는 건 너와 나, 단둘뿐이야. 네가 이용할 건 없으니까 내가 이렇게 나서는 거지.”
“…….”
반야 가면은 속으로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그리고 역시나 현찬이 범상치 않은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녀석에게 자신의 능력은 절대로 먹히지 않는다. 신급 영령의 계약자. 그것도 헤르메스의 계약자라는 타이틀을 단 현찬에게 과연 세뇌가 먹혀들까?
“나를 심문한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없다.”
그를 비롯하여 모든 사도, 모든 조직원들에게는 ‘금제’가 걸렸다. 그분에 관한 것을 타인에게 발설하는 순간 금제에 걸린 대상은 순식간에 죽고 만다.
특히나 이들의 조직은 ‘사도’일수록 걸리는 금제의 위력은 더욱 강력하다. 사도라고 해서 봐주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사도이기에 많은 것을 알았고 그렇기에 더욱 확실하게 하자는 생각으로 금제를 걸었으니까.
“알아.”
물론 현찬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협회에 스며든 스파이들에게만 해도 금제들이 걸려 있었다. 그렇다면 반야 가면에게도 금제가 걸렸다고 충분히 유추할 만했다. 이렇게나 보안에 철저한 녀석들이라면 당연한 조치였을 테니까.
“그래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물론 완벽한 방법은 아니지만 약간 우회의 형식을 취할 수는 있었다.
현찬의 눈이 반야 가면의 몸을 샅샅이 훑었다. <헤르메스의 눈>을 사용한 현찬의 시선은 반야 가면의 몸속에 복잡한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꼬인 금제를 살펴보고 있었다.
‘헤르메스. 뭔지 알겠어?’
[아니.]
헤르메스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마법과 점성술을 사용할 줄 아는 헤르메스라고 할지라도 이러한 술식의 금제는 처음 보았다. 현찬은 비형랑에게도 물었다. 혹시나 도술이나 주술 중에서 이런 것이 있냐는 질문이었다.
[아니. 나조차도 처음 보는 것이로군.]
<전우치>나 <최치원>, <홍길동>과 비교하면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주술과 도술에 관해서 매우 해박한 지식을 지닌 비형랑마저 그렇게 대답했다.
현찬도 딱히 긍정적인 대답을 바라고 물어본 것은 아니었기에 실망하거나 그러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이런 부정의 대답 덕분에 이 금제의 정체에 대해서 대략적이나마 판단할 수 있었으니까.
‘이거. 역시 그거 맞지?’
[맞아. 이 금제. 이 독특한 술식의 마법. 분명히 우리 세상의 존재가 아니야.]
신인 헤르메스조차 모르는 언어, 마법의 능력.
이것이 가능한 것은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자뿐이었다.
이계의 존재들.
지구에 존재하지 않는 능력을 지닌 그들이기에 헤르메스나 여타 영령들이 그들이 짜놓은 여러 마법적인 술식이나 언어를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상대 조직에 대해서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혔다.
그렇다고 해 봤자 투명한 아지랑이에서 어느 정도 색깔을 띠는 안개로 바뀌었을 뿐이지만 이것도 매우 큰 소득이었다.
그리고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이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녀석의 조직 중에서 언급되는 ‘그분’을 제외하고서 가장 서열이 높은 사도 중에서 하나를 사로잡았으니까.
‘음. 그래도 조금은 조심해야겠지.’
녀석에게 걸린 금제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딱 봐도 범상치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함부로 녀석이 대답을 내뱉으려는 순간 사도이건 말건 상관없이 반야 가면은 피를 토하면서 죽으리라.
어쩌면 기본적으로 말을 못 하게 막아놨을지도 모른다. 그건 그나마 다행이다.
가장 최악의 경우에는 단순히 생각을 읽거나 마음을 슬쩍 엿보는 순간에도 금제가 발동하여 대상을 죽음으로 몰고 갈지도 모르는 것이었으니까.
‘헤르메스. 괜찮을까?’
[흐음. 느낌이 조금 불안하기는 해. 이 금제. 정확히 어떤 금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구성요소가 이루는 흉측한 기능을 고려하면 아무리 우회한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생길 거야.]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겠네. 녀석이 죽기 전에 최대한 빠르게 정보를 뽑아내는 것.’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그 죽음이 찾아오기 전까지 최대한 빠르게 반야 가면에게서 정보를 뜯어낸다.
결국, 반야 가면은 현찬에게 붙잡힌 순간부터 운명이 정해진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았다면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반항을 했겠지만 아쉽게도 반야 가면은 현찬의 속내를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뭐, 알았다고 해도 바뀌는 것은 없겠지만.’
현찬은 그런 생각을 품다가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서 헤르메스에게 물었다.
‘헤르메스. 이 녀석이 죽는다면 죽은 자의 영혼을 네가 인도하니까 그 영혼에 물어서 정보를 꺼낼 수 있지 않을까?’
금제 탓에 살아있는 대상에게서 정보를 얻을 수 없다면 죽은 자에게서 정보를 얻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 현찬의 발상은 허점을 찌르는 것이었다.
영혼의 상태라면 그것은 분명히 금제에서 벗어나 속세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던진 자유를 뜻한다. 그렇다면 아무리 충성이 깊은 반야 가면이라고 할지라도 정보를 토해낼 가능성이 커진다.
그러나 현찬의 기대와는 반대로 헤르메스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인도자야. 저들의 이야기는 어느 정도 들을 수 있겠지만 저렇게 사자를 본격적으로 심문하는 것은 나의 권한을 벗어나는 일이야.]
그리고 사자와 망자, 죽은 자의 영혼을 관장하며 그것들을 지배하는 자는 바로 명계의 왕 <하데스>뿐이다. 아무리 헤르메스가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한다고 하더라도 그 근본적인 권한을 침범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여기는 한국 땅이야. 하데스 삼촌이라고 할지라도 이 땅에서는 본인의 권한을 들이밀 수 없어.]
동양의 저승을 관리하는 것은 [저승사자]들과 [염라대왕]이다. 특히나 사자를 심문하고서 그들을 벌하거나 봐주는 역할을 하는 것은 저승의 지배자인 염라대왕과 그 휘하에 있는 각 지옥을 다스리는 대왕들.
기본적으로 신급 영령인 그들을 강림시켜서 정보를 얻기에는 그 뒤에 이어질 부담이 너무나도 거대했다.
놈들을 쓰러뜨리기 위해서 순리를 거스르려고 하는 짓은 결국에는 본말전도니까.
‘결국에는 처음에 정했던 방법으로 갈 수밖에 없겠네.’
[아쉽지만 그게 최선이지. 만약에 내가 모든 힘을 지상에 사용할 수 있다면…… 아니, 아니야.]
헤르메스는 의도적으로 말을 끊었다. 현찬도 나름 짐작하는 내용이었기에 캐묻거나 하지 않았다. 그 대신 현찬은 반야 가면에게 재차 시선을 던졌다.
“무, 무슨 짓을 할 생각이야?”
“보면 알아.”
현찬은 마지막으로 비형랑에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그의 도움 덕분에 어스름달을 무찌를 수 있었고 도깨비들의 후원까지 받을 수 있었으니까. 현찬이 감사를 표하자 비형랑 또한 현찬에게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 또한 계약자, 그대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네. 내 옛 연인이었던 두두리를 이 현세에서 다시 만난 것도 그대의 덕이 컸고 내 오랜 백성들을 다시 이끈 것도 그대의 덕이었지. 그러니 고맙다고 말을 한다면 그것은 나의 것이겠지.]
‘과찬이세요.’
[그대에겐 그럴 자격이 있다네. 그래. 이렇게 이별의 순간이 다가오지만, 언젠가 다시 만날 거라는 기분도 드는군. 나는 그럼 가보겠네. 그보다 내가 충성을 바치던 나라의 핏줄이자 왕이 다가오다니, 이 기분도 썩 새삼스럽군.]
비형랑은 허허 웃으면서 현세를 떠났다.
현찬은 마력을 운용하여 자신의 스킬을 발동했다. 헤르메스에게서 얻은 권능의 하위 호환격인 자신만의 계약 스킬. 그것을 발동시키며 이전에도 불렀던 왕급 영령을 재차 부른다.
<미륵불(彌勒佛) 궁예(弓裔)>
[계약자여. 또 만나는구나. 그렇다 해도 설마 비형을 부르고 있었다니. 짐의 계약자로서 손색이 없도다!]
‘됐으니까 능력이나 빌려줘요.’
현찬의 한쪽 눈에 황금색으로 빛나는 안대가 씌워졌다.
<관심법(觀心法)>
여타 왕급 영령보다 무력과 지력이 부족할지라도 다른 영령들에게 없는 압도적인 능력. 타인의 마음을 읽는 사기적인 스킬. 그것이 바로 궁예만이 지닌 특수한 능력이었다.
“말할 필요는 없어.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하면 돼.”
현찬은 반야 가면을 향해 자신이 생각해 두었던 질문들을 던졌다. 반야 가면은 당연히 입을 꾸욱 다물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질문을 받는 순간 머릿속으로 그 대답을 떠올리고 있었으니까.
“너희 조직의 이름은 뭐지?”
반야 가면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는 막을 수 없었다.
‘일루베 아르카’
난생처음 보는 언어가 의미하고 있는 말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계의 언어로 이루어진 조직의 이름이라면 확실히 그분이라는 자는 이계에서 넘어온 존재가 맞을 것이다.
“너희가 떠받드는 그분의 정체는 뭐지?”
‘그분의 정체에 관해서는 우리 사도들도 모르는 것.’
원하던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녀석은 워낙 비밀주의자라서 자신을 가장 믿고 따르는 사도들에게조차 제대로 정체를 밝히지 않은 듯싶었다. 현찬이 조금 아쉬워하는 순간에 반야 가면의 새로운 대답이 보였다.
‘하지만 그분의 심복인 새 가면이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새 가면.
정확히는 역병 의사의 복장을 한 녀석이 그분의 정체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번에 얻은 정보는 꽤 컸다. 그렇다면 그분을 잡기 전에 우선 새 가면을 사로잡아도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으니까.
“무, 무슨…….”
반야 가면은 그제야 무언가 이상하게 흘러감을 알아차렸다. 현찬이 아무런 대답을 듣지 않았음에도 질문을 건네는 행동이 의아함을 자아냈으며, 무엇보다 반야 가면의 몸속 깊은 곳까지 자리 잡은 금제가 꿈틀거리며 반응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반야 가면이 비명을 지르듯이 외쳤지만, 현찬은 대답하지 않았다. 반야 가면이 저런 반응을 보인다는 건 금제가 시작됐다는 것이고 이제 대답을 들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리였으니까.
“너희들의 목표는 무엇이냐?”
“그건 대체 무슨 소리야!”
‘우리들의 목표, 그것은 이 세상을 파괴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 그분께서는 이런 목적에 아주 강렬한 그리움을 지니고 계신다.’
“그리움이라는 건 대체 뭘 의미하는 거지?”
‘그, 그건…….’
말을 꺼내던 순간 반야 가면의 몸이 덜컥! 흔들렸다. 반야 가면의 몸이 점차 떨림이 거세지며 가면 아래의 녀석의 입술을 비집고서 괴로움이 가득 담긴 신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금제가 발동했다.
“끄아아악!”
반야 가면은 결국에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온몸의 구멍에서 피를 쏟아내며 죽고 말았다.
그 광경을 본 현찬은 눈살을 찌푸렸다. 자연히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광경이었다.
대충 예상은 했지만 설마 금제가 이렇게나 강력할 줄이야. 아무래도 사도들이 떠받드는 그분이라는 존재는 보통내기가 아닌 듯싶었다.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라. 아무래도 녀석은 이 세상에 꽤 불만이 많이 있는 거 같네.”
[다른 세상에서 넘어왔으니, 분명히 좋지 않은 의도를 지니고 있겠지.]
그리고 녀석들은 그 목표를 이루는 방법으로서 게이트를 강제로 일으켜 세상에 혼란을 초래하는 것이리라.
“그래도 새롭게 얻은 정보는 하나 더 있어.”
녀석이 마지막에 죽기 전에 떠올린 그들의 계획. 그 일부가 현찬에게 흘러들어왔다.
<난제>.
놈들의 목적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난제>를 이용해서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난제>인 어스름달이 사라졌으니 녀석들의 다음 목적은 가까운 곳에 있는 다른 <난제>가 분명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