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무한계약-88화 (88/265)

# 88

88화 도깨비들의 왕 (3)

_

“너, 넌 정말 미쳤군. 정말 미쳤어. 나도 미쳤다고 생각했는데. 크윽!”

“헛소리는 집어치워. 지금 네 상황을 몰라서 그러는 거 같은데, 제대로 알게 해 줄까?”

현찬은 반야 가면의 배에 찔러 넣은 칼을 살짝 옆으로 비틀었다. 그것만으로도 반야 가면은 복부를 화끈하게 지지는 고통에 몸이 경직했다. 현찬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으로는 충분히 말했다.

내 말에 토 달지 마라. 시키는 대로 해라.

죽고 싶지 않다면.

“으으으!”

현찬의 살기 어린 눈빛을 읽은 반야 가면은 몸을 떨었다. 현찬은 진심이었다. 자신이 여기서 조금이라도 수틀리는 짓을 했다가는 정말로 가차 없이 고통을 가할 생각이었다.

‘제, 젠장! 그래도 나름 온건한 성격을 지녔다면서!’

반야 가면이 들은 현찬의 정보 중에서는 당연히 현찬의 성격도 포함되어 있었다. 언제나 타인에게 사근사근 대하며 친절한 이 시대의 호인. 그것이 반야 가면이 알고 있는 현찬의 모습이었다. 그 행동에 거짓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현찬의 기본 성격이 선하다는 것은 확신했다.

하지만 반야 가면이 간과하고 있던 사실이 하나 있었다.

현찬이 비록 대부분 사람에게 예절이 바르고 친절하다고는 하지만, 자신이 적이라고 규정한 자에게는 정말로 자비가 없다는 것이었다.

특히나 가만히 놔뒀다가 얼마나 큰 인명피해를 낼지 모르는 악인들에게는 더더욱.

현찬 입장에서 반야 가면은 <난제>인 어스름달을 이용해서 죄 없는 생명을 해치려는 악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잊지 마. 내가 너를 죽이지 않는 이유는 너에게 아직 쓸모가 있어서야. 네가 알고 있는 사실을 뱉어내기 전까지는 죽고 싶어도 곱게 못 죽어.”

반야 가면의 수준이라면 어차피 이 정도의 상처로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한다. 하지만 죽지 않는다고 고통마저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죽지 못하기에 고통을 더 오래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

반야 가면은 결국 현찬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 네놈이 바란다면 네 뜻대로 이 녀석을 깨워주마!’

어차피 자신이 조종하려는 생각인 이미 버렸다. 반야 가면은 이 정도로 무시무시한 존재를 컨트롤 할 자신이 없었다. 그가 정신계열 능력에 특화되었다 하더라도 정도라는 게 있었으니까.

이렇게 된 이상 모든 힘을 다해서 어스름달을 폭주시킨다.

거기에 자신이 휘말리더라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붙잡혀서 정보를 토해낼 바에는 모두 함께 죽는 것이 나았으니까. 그분께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당연히 그렇게 해야 했다.

‘움직여라!’

반야 가면의 모든 마력이 담긴 명령이 그의 손끝을 통해서 어스름달의 몸체에 퍼져나갔다.

꿈틀!

마치 아스팔트 위의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처럼 지면에 푹 퍼져있는 검은 액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연 일부처럼 자연스레 녹아내리고 있던 그것이 이질감을 띠기 시작했다. 몸 전체가 심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맥동하는 어스름달이 점차 기괴한 형상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녀석은 어둠 그 자체였다. 애초에 정해진 형상이 없었다.

어스름달은 모든 것이 될 수 있었고, 어떤 것이든 변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잠에서 깨어나 모습을 드러낸 어스름달은 체고만 30m에 가까운 거대한 벌레 형상이었다.

우워어어어어어!!

어스름달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짓쳐 들고 거대한 포효를 내질렀다. 보름달이 충만한 밤하늘. 그 아래를 어디선가 흘러나온 어둠이 주변을 새까맣게 뒤덮는다. 마치 거대한 먹물 통을 바닥에 흠뻑 쏟아 적신 것처럼 하늘이 완전히 검게 물들었다.

주변이 순식간에 어두워지고 몰려든 이매망량이 당황해한다.

비형랑의 가호를 받은 현찬은 그런 어둠조차 꿰뚫어 보았지만 표정이 굳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거다.

어스름달이 등장과 동시에 수많은 사람과 헌터들을 학살하게 만든 최강의 능력.

사람들은 이것을 이렇게 불렀다.

<어둠내림>

어스름달의 모습이 점차 자신이 불러낸 어둠과 동화된다. 어둠이 녀석이 되었고, 녀석이 곧 어둠이 되었다. 놈은 마치 카멜레온처럼 주변의 풍경을 자신의 색과 똑같이 만들어 그 거대한 덩치를 감춘 것이다.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져서 처음부터 어스름달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현찬은 알고 있었다. 녀석은 이 어둠 속에 숨어서 지금 이쪽을 노릴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것을.

그 찌를 듯이 날카로운 살기와 거대한 기척만큼은 어둠이 감춰주지 못했다.

현찬은 즉시 반야 가면의 복부에서 검을 뽑았다. 상처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지만, 그것은 도깨비불의 뜨거운 열기가 순식간에 상처를 지지며 출혈을 방지했다.

치이익!

반야 가면은 생살이 타들어 가는 고통에 비명을 내지르려고 했지만, 그의 입 밖으로는 어떠한 소리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현찬은 녀석이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하게 도술과 각종 주술을 이용하여 소리를 막고 귀를 막으며 보지도 못하게 시야도 차단했다. 거기에 더해서 몸을 2중, 3중으로 꽁꽁 묶어서 그대로 구석으로 집어 던졌다.

이렇게까지 했으면 벗어나지 못하리라. 혹시 몰라서 도깨비 중에서도 장정 몇을 추려 녀석을 지키라고 명령했다.

촤아악!

어둠 속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현찬을 향해 뻗어져 나왔다. 그것은 바람을 가르고 공간을 가로지르며 현찬의 목을 노렸다. 터엉! 허공에 생겨난 수 겹의 방어 주술이 현찬의 몸을 보호했다. 하지만 위력이 얼마나 강했는지 총 8겹의 방어 주술 중에서 5겹이 산산이 부서졌다.

[정말로 끔찍한 괴물이로군.]

‘괜히 <난제>라 불리는 게 아니죠.’

놈은 뚜렷한 형체가 없기에 몸을 길게 늘여 그것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그러한 채찍 같은 팔이 무려 10여개나 되었다. 하나하나의 위력이 거대한 바위도 가루로 만들어버릴 정도인데 그것이 무려 10개.

괜히 헌터들이 함부로 접근했다가 한 줌의 고깃덩어리로 변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녀석의 더욱 끔찍한 점은 몸 자체가 기묘한 물질로 이루어져 있어서 물리적인 공격이 거의 먹히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것을 몰랐던 초창기에는 온갖 화력을 다 쏟아부었지만, 녀석은 꿈쩍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미 우리는 충분한 준비를 했거든.”

처음 막 등장했을 때는 정보가 부족해서 속수무책으로 당했지만, 녀석이 잠든 동안에 온갖 연구가 이루어졌고 사람들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여 어스름달을 쓰러뜨릴 방도를 찾아왔다.

그것은 헌터 아카데미의 기초교육에서도 잊지 말라고 꾸준히 가르치는 과목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언젠가 녀석이 다시 깨어났을 때 과거의 치욕을 갚아주기 위해서.

파아앗!

순간적으로 거대한 빛이 주변으로 터져 나온다.

사람의 눈을 멀게 만들 정도의 강렬한 섬광이 어둠을 찢어냈다. 어둠이 씻기고 다시 밤하늘의 풍경이 그 자태를 드러냈다. 시리도록 푸른 만월의 빛이 숲과 골짜기에 장막을 쳤다.

어둠 속에 숨어있던 그슨대 ‘어스름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놈이 죽인 사람들이 만들어낸 의지의 결정체다.”

현찬은 그렇게 말하며 어스름달을 사냥하기 위해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물건들을 집어 던졌다.

파파팟!

재차 강렬한 섬광이 폭발했다. 죽으면 강렬한 빛을 토해내는 몬스터인 ‘플래시볼’을 재료로 만들어낸 협회산 특제 섬광탄이었다. 어지간한 섬광탄보다 더 강렬한 빛을 내뿜는 이것은 특히나 어스름달에게 가장 상극의 공격이었다.

섬광탄에 그치지 않고 현찬은 연달아 주술을 이용해 온갖 공격을 퍼부었다. 특히나 빛과 가장 흡사한 속성을 지닌 화염계 주술들이 강력한 빛에 잔뜩 움츠러든 어스름달의 몸에 적중했다.

현찬이 손을 휘젓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도깨비들이 일제히 푸른 도깨비불을 어스름달을 향해 집어 던졌다.

콰과과광!

충격에 밀려난 어스름달이 숲을 가로지르며 산골짜기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것은 도깨비들과 현찬에게 있어서 더욱 공격하기 좋은 상황이 되었다. 비형랑의 힘을 빌린 현찬의 명령이 떨어지자 온갖 화염이 골짜기 내부에서 폭발하며 연쇄반응을 일으켰다.

특히나 눈에 띄는 실적을 올리는 것이 바로 황설영이었다.

마음을 추스르고 중간에 합류한 그녀는 <두두리>의 영향 때문인지 그야말로 홍야차라는 이명에 걸맞게 파랗다 못해 하얗게 느껴질 정도로 뜨거운 도깨비불을 어스름달을 향해 미친 듯이 쏟아내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도깨비들마저도 황설영의 인화에 겁에 질려서 그녀와 거리를 벌렸을 정도.

크워어어어!

어스름달도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화염과 폭연의 틈새로 거대한 어둠이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뿜어져 나오며 도깨비들과 현찬을 노렸다. 그 광범위한 공격에 순식간에 이매망량이 중상 입으며 뒤로 물러났다.

이 기회를 틈타 어스름달은 골짜기 위에서 자신을 공격하려던 건방진 미물들을 모조리 죽이기 위해 절벽에 몸통을 박아 넣으며 위로 올라가려고 했다.

하지만.

“미안하지만, 함부로 올 수 없겠는걸.”

주변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분명히 시간은 아직 새벽일 텐데도 마치 여명이 밝은 것처럼 주변 천지 사물이 확연하게 드러난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화염계 최고의 주술. <태양옥(太陽玉)> 어디 이것을 맞고도 멀쩡한지 보자고.]

도깨비들과 황설영이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에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강 기술의 준비가 끝났기 때문이다.

크워어어어어!

어스름달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고함을 내질렀다. 벽에 집어넣은 팔을 뽑아서 현찬을 향해 길게 뻗었다. 검은 팔이 거대한 창이 되어 현찬의 목숨을 끊기 위해 날아갔지만.

“늦었어.”

발악하는 어스름달의 머리 위로 거대한 화염 덩어리가 떨어져 내렸다.

마치 태양이 지상에 나타나기라도 한 것처럼 시뻘겋고 뜨겁게 이글거리는, 직경 100m짜리 화염구는 그대로 어스름달의 뻗어진 팔을 기점으로 그 몸통을 뜨겁게 불태웠다.

거대한 덩치를 지닌 녀석은 재차 골짜기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그런 녀석의 주위로 태양옥의 2차 폭발이 발생하며 초열지옥을 현세로 강림시켰다. 너무나도 뜨거운 열기에 바위마저 녹아내렸고 그 광열에 어스름달의 몸이 계속 작아져만 갔다.

“어엇?”

“놈이 작아지고 있어!”

뜨겁게 달아오른 골짜기 아래의 열기가 밤바람에 식혀져 갈 즈음 현찬은 혼자 어스름달을 향해 뛰어내렸다.

“왕이시여!”

“위험합니다!”

뒤에서 이매망량이 현찬을 불렀지만, 그 누구도 용기를 내서 따라오는 자가 없었다. 아니, 단 한 명 있었다. 바로 <두두리>의 계약자인 황설영이었다.

“설영 씨는 안 오셔도 됩니다.”

“아니요.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요.”

무엇보다 그녀와 계약을 맺은 영령인 <두두리>가 비형랑을 너무나도 그리워하고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황설영의 입장에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솔직히 그녀도 현찬을 걱정한 것도 한몫했다.

바스락!

검게 타버려 재로 변해버린 나무 조각을 밟으며 현찬은 어스름달을 향해 다가갔다.

처음 봤을 때의 30m에 가까운 거체는 다 타서 어디론가 가버렸는지 지금 현찬의 앞에 있는 녀석은 약 1m밖에 되지 않는 부정형의 점액질일 뿐이었다.

현찬이 손에 쥔 테레이오스테에 화염을 둘렀다.

기본적으로 신염(神炎)을 머금은 테레이오스테에 화기를 불어넣자 새하얀 불길이 거칠게 일어나며 주변을 밝게 비추었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어스름달은 이 마지막 일격을 절대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 순간이었다.

촤아악!

어스름달이 마지막 발악을 하려는지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수면에 잘게 진동하듯이 매우 빠른 속도로 꿈틀거리는 어스름달의 모습이 점차 형태를 갖춰가며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내 어스름달은 한 명의 인간의 형태로 변했다.

마치 진흙을 대충 빚어서 만든 인형처럼 아직 제대로 된 인간의 모습을 갖추지 않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사람의 모습이었다.

[사, 살려주세요.]

녀석은 놀랍게도 한국어로 그렇게 말하며 현찬의 앞에 납작 엎드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