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87화 도깨비들의 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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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왕 비형랑>
그는 등장과 함께 자신의 존재감을 환몽촌 전체로 흩뿌렸다. 그것은 마치 안개나 구름 같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숲과 골짜기를 넘어 모든 요마들의 몸을 조심스레 감쌌다.
그것은 전혀 위협적인 것이 아니었다.
새벽에 퍼지는 이슬처럼 그들의 몸에 가라앉듯이 그저 알릴 뿐이었다. 그들의 왕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아, 아아아아!”
경루는 느꼈다. 이 힘. 이 기운.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오랫동안 살아온 도깨비인 그이기에 무엇보다도 이 기운에 아주 큰 그리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그를 넘어선 모든 도깨비의 빛이요 희망이었다.
“왕이시여! 우리들의 왕이시여!”
늙은 경루의 외침은 황몽촌의 골짜기 전체로 널리 울려 퍼졌다.
마을에서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해서 사리던 요마들 또한 경루의 목소리와 함께 비형랑의 기운을 느꼈다. 마을의 모든 도깨비와 이매망량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마을 외곽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건…….”
“우리들의 왕이시다.”
“왕께서 돌아오셨다.”
그들은 마치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현찬이 있는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그마한 무리는 순식간에 무리가 되었고 무리는 군중이 되었다. 그들은 거대한 흐름을 이루었다. 흐름은 종착지를 향해 세월처럼 나아갔다.
두근!
‘어?’
비형랑의 등장에 가장 큰 반응을 보인 것은 경루도, 달걸도, 그렇다고 비차 패거리도 아닌 황설영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황설영과 계약을 맺은 두두리가 비형랑에게 격한 반응을 보였다.
‘두두리?’
황설영이 놀라서 자신의 영령에게 되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두두리의 모든 관심은 지금 비형랑에게 몰려 있었으니까. 그런 두두리와 동조율이 높은 황설영 또한 두두리의 감정에 영향을 받았다.
그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자기도 모르게 숨이 거칠어졌고 눈가에는 눈물이 맺힌다. 두두리와 황설영이 점차 같아지는 가운데 현찬은 마당으로 나오며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휘이이익!
“크윽!”
“으으윽!”
거대한 돌풍이 재차 몰아치며 바차의 일행을 꼼짝도 못 하게 묶었다. 바차는 이를 악물고 그런 바람의 속박을 풀어냈다. 비형랑이 눈에 이채를 띠었다. 바차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땅을 박차고 비형랑에게 달려들었다.
[우습구나.]
비형랑이 가볍게 손을 젓자 허공에 얼음이 뭉치며 그대로 바차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바차는 이런 공격 따위에 당할 정도로 나약하지 않았다. 바차는 거대한 기합을 내뱉으며 주먹을 내질렀고 얼음을 깨부쉈다.
“하핫! 어떠냐!”
고작 이런 공격으로 자신을 쓰러뜨리려고 하다니. 100년은 이르다! 바차는 비형랑을 비웃었다. 그러다 이내 자신의 머리 위로 드리워진 거대한 그림자를 보더니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어떠냐고? 내가 묻고 싶구나.]
바차의 머리 위에 있는 것은 조금 전에 부쉈던 거대한 얼음덩어리보다 100배는 더 거대한 얼음의 산이 허공에 떠 있었다. 얼마나 강력한 술법인지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바차가 숨을 내쉴 때마다 입가에 새하얀 김이 서렸다.
[어떠냐?]
“빌어먹으으으을!”
비형랑이 손을 내리자 얼음덩어리가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바차를 비롯하여 바차의 패거리를 향해 가차 없이 떨어져 내렸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운빙(隕氷)은 강렬한 냉기를 내뿜었다. 그것은 닿는 것은 으깨고 부수며 그대로 얼려버릴 기세를 지녔다.
하지만 바차의 패거리 중에서 나서는 이들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요괴들의 틈바구니에서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가면을 쓴 조직원들이었다.
도술로 모습을 숨기고 있던 그들은 상황이 나쁘게 흘러가자 본색을 드러냈다. 그들의 몸이 크게 부풀어 오르더니 이내 괴물의 형상으로 변했다.
“저건?”
현찬은 저들이 평범한 적이 아님을 깨달았다. 저 녀석들 람브로눅스 놈들이 분명했다. 그런 녀석들이 대체 왜 이런 요괴들의 마을인 환몽촌에 와있는가 싶었다. 현찬은 <헤르메스의 눈>을 발동시켰고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저 녀석들. 조종당하고 있어.’
정확히는 세뇌당한 상태였다.
바로 하루 전, 협회에서 현찬이 열었던 기자회견에서 벌어졌던 습격. 그때 조종당하고 있던 기자도 저 녀석들과 같은 상태였다.
놈들의 목적은 그슨대 ‘어스름달’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최면의 주범이 이곳에 있다는 소리.’
새 가면은 아닐 것이다. 녀석에게 그런 특징은 없었으니까. 그렇다는 것은 철 가면과 비슷하게 그 조직에 소속된 다른 가면의 녀석이 분명했다. 철 가면이 죽었으니 다른 녀석이 나타나도 이상할 게 없었다.
부하들이 이곳에 있다면, 놈들의 대장인 세뇌의 주도자는 아마 <난제>가 있는 곳에 있으리라.
이대로 시간이 끌리면 어찌 될 줄 모른다.
[계약자여. 그대의 생각이 맞는다면 빠르게 정리해야겠구나.]
‘네. 부탁드립니다.’
괴물로 변한 람브로눅스의 녀석들은 그 순간에도 현찬의 지척까지 접근하여 현찬을 공격하려고 했다. 하지만 앞에 나서는 둘에 의해서 놈들은 뒤로 튕겨 나갈 수밖에 없었다.
바로 에크티와 황설영이었다.
둘은 매우 빠른 움직임으로 람브로눅스 괴물들의 틈새에 파고들어 압도적인 무력을 바탕으로 하나둘 씩 쓰러뜨렸다. 제압은 필요 없다. 이런 긴급한 순간에 그런 자비를 베푸는 것은 사치였으니까.
나서던 람브로눅스가 막히자 비형랑의 도술을 막을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허공에서 떨어지는 빙산이 그대로 바차의 추종자들을 무참히 찍어버렸다. 거대한 먼지구름이 치솟아 오르고 충격의 여파가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마, 말도 안 돼.”
오직 바차만이 이 처참한 광경을 보며 망연해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바차의 앞에 비형랑이 내려앉았다.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지. 나의 명령을 무시하고서 주어진 의무를 저버리며 도망쳐버린 도깨비가. 그래. 길달. 그 아이가 그러했지.]
바차는 뒤늦게 공포심이 밀려왔다.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었던 그는 고개를 제대로 들지도 못했다. 이빨이 딱딱 부딪치고 몸이 절로 떨려왔다. 빙산투하의 영향 때문이 아니라 뼛속 깊은 곳까지 파고든 두려움 때문이었다.
[나의 뜻을 저버린 길달 그 아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느냐?]
“으, 으으으으!”
아무런 대꾸조차 하지 못하는 바차의 주위로 마을의 도깨비들과 요마들이 몰려들었다.
[모른다면 이제부터 알게 될 거다.]
“사, 살려……으아아악!!”
길달.
비형랑이 한때 가장 신뢰했던 부하였다.
하지만 그는 자기 뜻을 거역하고서 종래에는 여우로 변해 도망을 쳤다.
그런 길달의 최후는 처참했다.
비형랑의 명령을 받은 귀신들이 그대로 길달을 산 채로 찢어 죽였기 때문이다.
바차의 최후도 그와 같았다.
허공에 비산하는 피는 뿌연 안개처럼 흩어졌다. 그 끔찍한 광경을 뒤로하고 비형랑은 황설영에게 다가갔다. 황설영은 마치 사랑에 빠진 아가씨처럼 가슴 쪽에 두 손을 모으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비형랑을 애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둘의 몸은 현찬과 황설영이었지만, 지금 그들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비형랑과 두두리였다.
[오랜만이구나. 두두리.]
[네. 오랜만이옵니다. 왕이시여.]
[내 너를 이렇게 다시 현세에서 만나게 될 거로 생각하지 못했거늘.]
[운명의 장난이겠지요.]
풍요를 상징하는 신령이었다가 도깨비로 전락한 두두리. 그녀는 그런데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곁에는 그녀의 왕이 항상 존재했으니까.
현찬과 황설영의 얼굴이 점점 더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둘의 입술이 그대로 딱 맞닿으려는 순간.
[어딜 감히 내 계약자에게!]
보다 못한 헤르메스가 나섰다.
그 외침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현찬과 황설영은 몸을 흠짓 떨면서 서로 떨어졌다. 비형랑과 두두리는 서로 아쉽다며 입맛을 다셨다. 현찬은 상기된 자신의 볼을 식혔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었다.
“어, 음. 저는 빨리 어스름달을 막으러 가겠습니다.”
“네, 넷! 저는 일단 협회에 연락을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현찬은 아직도 부끄러워하는 황설영을 뒤로 하고 도깨비들을 바라보았다.
[들어라. 나의 백성들이여.]
“예! 왕이시여!”
“하명하소서!”
모든 귀신과 도깨비들은 비형랑의 힘을 빌린 현찬의 앞에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각인된 일종의 주박과도 같았다. 그들의 왕에게 언제나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는 고대의 맹세였다.
[비루한 무리가 우리들의 땅을 침략하고 우리를 핍박하려 한다. 우리가 이대로 당해야만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 그렇지. 그러기 위해서 내가 온 것이고. 그러니 나가 싸워라. 적들에게 우리가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경외심을 심어주어라. 내가 그대들의 뒤에 있다. 내가 그대들과 함께 싸운다. 이매망량이여. 두려워 말라.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와아아아!
비형랑의 말에 도깨비들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고조되는 것이 느껴졌다.
비형랑이 앞서고 도깨비들의 대군이 그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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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길. 설마 그 짧은 시간조차 제대로 버티지 못할 줄이야. 환몽촌에서 가장 강하다는 도깨비라길래 뭔가 있을 줄 알았는데 그냥 쭉정이였잖아!’
반야 가면은 자신이 세뇌한 부하들이 모두 죽고 심지어 바차 마저 죽었음을 직감하며 혀를 찼다. 아직 어스름달을 완전히 컨트롤 하기에 시간이 조금 모자랐다. 아주 약간만. 한 줌이라도 좋으니 시간이 더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이렇게 있으면 안 된다.’
이대로 가면 어스름달에 대한 통제권을 제대로 갖지 못한 채 적들의 공격에 노출될 판이다. 그는 세뇌와 최면에 특화됐지 전투적인 능력은 매우 낮았으니까. 척후에 특화된 새 가면보다 훨씬 더 약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물론 사도 중에서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거지 어지간한 헌터 정도는 맨손으로도 충분히 찢어 죽일 정도로 반야 가면은 강했다. 하지만 지금 오고 있는 도깨비 무리 그리고 그것을 이끄는 현찬은 그보다 더 강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반야 가면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최후의 비기를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을 사용하면 향후 몇 개월간은 거동조차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촉박하게 흘러가니 그의 존재에 영향을 준다고 하더라도 실행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은 그분을 위하여!’
반야 가면이 자신의 생명력을 불태우며 더욱더 어스름달을 향한 세뇌를 강화했다.
그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새하얀 빗줄기가 반야 가면의 오른쪽 어깨를 꿰뚫었다.
‘크헉! 서, 설마 벌써 도착했다고?!’
바차와 세뇌시킨 람브로눅스 녀석들이 죽은 것이 조금 전이였다. 그리고 시간이 대체 얼마나 흘렀다고 벌써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
‘크읏! 괜히 신나서 이 괴물을 마을과 가까운 곳까지 옮긴 것이 실책이었나!’
이대로는 죽도 밥도 안 된다. 공격을 당하더라도 반야 가면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그는 피가 흐르는 어깨를 무시하고서 검고 물컹한 반액체에 손바닥을 대고서 정신을 집중했다.
하지만.
푸욱!
“내가 그것을 가만히 지켜볼 줄 알았어?”
현찬의 검이 반야 가면의 복부를 꿰뚫었다.
“쿨럭!”
반야 가면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너무 걱정하지 마. 급소는 피했으니까. 이대로 죽일 생각은 없어.”
“크, 크큭! 나,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해서 끝난 줄 알았나?”
반야 가면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돌려 현찬을 올려다보았다.
“아니.”
반야 가면의 경고에도 현찬은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해 봐.”
“뭐?”
“해 보라고. 어스름달. 폭주시킬 거잖아? 해 봐.”
“너…… 대체 무슨…….”
애초에 현찬에게 저 말은 전혀 협박이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목적 자체가 <난제>의 사냥이었으니까.
반야 가면의 경우에는 그저 중간에 거치는 과정에 불과했다.
“해. 어스름달을 깨워.”
“끄으으윽!”
“내가 잡을 테니까.”
반야 가면은 두려움에 몸이 저절로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