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86화 도깨비들의 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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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몽촌(幻夢村)은 이름 그대로 매우 몽환적인 공간이었다.
천지를 아우르는 높은 산골짜기를 옆에 끼고서 존재하는 매우 넓은 한옥 마을. 곳곳에 등불이 켜져 있으며 오색찬란한 빛들이 마치 요정처럼 살아서 숨 쉬고 있었다.
무엇보다 더 신비로운 것은 마을의 구성원들이 모두 인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온갖 해괴한 생김새의 다양한 요괴들과 도깨비들이 마을을 돌아다녔고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현찬은 속으로 나직이 감탄했다.
하지만 그런 마을의 아름다운 광경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썩 좋지 않았다.
현찬의 눈은 많은 것을 보았고 그가 실제로 보는 것 이상의 정보를 수집했다.
가마를 내려준 달걸이 현찬과 황설영에게 고개를 숙였다.
“마을 분위기가 이래서 죄송합니다. 귀인께서 오셨으면 응당 저희가 환영을 해 줘야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해하니까 걱정하지 마.”
환몽촌의 분위기는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심각했다. 마을의 주민들은 서로를 경계하며 마치 파벌이 갈라선 것 같았고 개중에는 현찬에게 적대 어린 시선을 보내오는 녀석들도 있었다.
심지어 저 먼 산골짜기 너머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존재의 기척까지.
“파벌이 갈렸군요.”
“…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황설영은 아직도 자신이 환몽촌에 온 것이 믿기지 않는지 여전히 얼떨떨한 상태라 현찬의 곁에 찰싹 붙어있었다. 헤르메스가 그 광경을 보고 눈에 불을 켰지만, 아테나가 그런 헤르메스의 머리에 꿀밤을 먹여줌으로써 향후 일어날 사태를 잠재웠다.
현찬의 일행이 그러는 와중에 이쪽을 향해 이매망량이 하나둘 다가오기 시작했다.
“일단 자리를 피하시죠. 제가 안내를 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다가오는 녀석들은 딱 봐도 좋은 의도를 갖고서 접근하고 있지 않았다. 괜한 분쟁을 벌이면 오히려 현찬에 대한 인식이 나빠질 수도 있으니 달걸은 현찬과 황설영을 이끌고서 자리를 피했다.
뒤에서 놈들이 쫓아오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현찬 일행을 붙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마을 외곽을 따라서 빠르게 돌아 다른 입구로 마을에 들어갔다. 대부분의 요마들이 현찬과 황설영을 발견하지도 못했다. 그만큼 그들의 움직임은 빨랐다.
“이쪽입니다.”
달걸이 안내를 한 곳은 마을의 후미진 곳에 있는 자그마한 초가집이었다.
한옥으로 이루어진 마을에서 홀로 동떨어진 집이라 이질감이 컸는데 달걸은 거침없이 그곳의 마루를 밟고서 장지문을 열어 방 안으로 들어갔다. 현찬과 황설영도 서로 얼굴을 마주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뒤따라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귀인이시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현찬과 황설영을 반겨준 것은 나이가 지긋한 도깨비였다. 비록 앉아있다고는 하지만 새하얀 수염이 바닥에 닿을 정도로 길었는데 도깨비가 아니라 무슨 시선을 보는 것 같았다. 어딘가 허허로운 그의 분위기가 그런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 한몫했다.
“환몽촌의 촌장인 경루라고 합니다.”
“강현찬이라고 합니다.”
“화, 황설영입니다.”
경루는 현찬과 황설영을 보더니 눈을 빛냈다.
“오오. 위대한 신과의 계약을 맺으신 분과, 저희 도깨비들에게 아주 그리운 계약자를 만나게 될 줄이야. 이 경루, 이렇게 오래 살다 보니 이런 날도 다 오게 되는군요.”
“저를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정확히 어떤 이유입니까?”
대충 마을에 어느 조직에 의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 현찬도 알고 있다. 하지만 아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황설영도 있으며 세세한 부분까지는 현찬도 완벽하게 알고 있는 것은 아니기에 당사자의 입으로 들어야 했다.
현찬의 물음에 경루의 얼굴에 진 주름이 더욱 늘어났다.
“귀인께서 저희를 돕기 위해 찾아오셨으니 당연히 설명을 해 드리는 게 도리겠죠.”
경루는 현찬과 황설영에게 환몽촌이 지금 어떠한 상황에 부딪혔는지 설명해 주었다.
본디 환몽촌은 예로부터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요괴들만 지내는 거대한 마을이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역사를 지닌 채 서로 별다른 탈 없이 지내왔고 그것은 앞으로도 계속 지속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대통합>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것은 인간들의 세계에 영향을 줬을 뿐만이 아니라 요마들의 세상에도 영향을 주었다.
게이트를 통해 나타난 몬스터들은 피아를 구분하지 않았기에 이매망량도 놈들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상당수의 요마들과 도깨비들이 다치거나 죽었으며 항상 숨어지내던 그들의 사이에서도 변혁의 이야기가 점차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을의 촌장인 경루는 고민했다. 본격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파벌과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파벌이 갈렸고 그 두 진영의 입장과 주장은 전부 다 타당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서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가기만 했다.
그중에서도 마을의 개혁을 바라는 과격급진파는 이대로 숨어지내던 자신들의 한을 풀기 위해 다시 바깥세계로 나가서 예전처럼 활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필시 인간들과 마찰을 빚게 될 게 뻔했기에 경루는 거절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과학이 발전하고 각성자라는 인간이 생기며 그들의 세력은 절대로 우습게 볼 것이 못 됐기 때문이다. 만약에 싸움이 벌어진다면 이쪽의 피해도 절대 무시할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전멸도 생각해야 했다.
그러다 사건이 터졌다.
<심연> 사태, 그리고 이어지는 천신(天神) 제우스의 강림.
그것이 불러온 격렬한 세계의 흐름은 한반도에 살아가는 요마와 이매망량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원래도 과격했던 자들은 더욱 폭력적으로 변했고 가만히 있던 자들도 직접 행동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변화를 바라는 자와 그것을 막으려는 자들 간에 파벌이 갈리고 원래부터 나빴던 마을의 분위기는 더 심각하게 흘러갔다.
“결국, 사고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과격파를 이끌던 바차가 본색을 드러낸 것입니다.”
바차는 마을의 도깨비 중에서도 매우 호전적이고 강한 힘을 지닌 거로 유명했다. 그의 힘에 매료된 요마들은 격렬하게 그를 추종했고 바차의 세력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불어났다.
그런 바차가 본격적으로 행동에 들어간 것이었다.
“놈은 저희 마을에 외부자들을 불렀습니다. 전부 다 합쳐서 10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기묘한 가면을 썼으며 한 명 한 명이 매우 강력했죠.”
“…… 설마!”
황설영도 짚이는 부분이 있는지 눈을 부릅떴다. 현찬 또한 역시 예상대로라고 생각했다.
가면 쓴 신원 미상의 조직이 그놈들 말고 더 있겠는가.
“놈들은 지금 뭘 하고 있죠?”
“저희 마을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환몽촌 바깥에서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음은 틀림없습니다. 특히나 서산 너머에 존재하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있는 곳을 주로 돌아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괴물이라면, 지금 저 멀리 있는…….”
“네. 맞습니다.”
<난제> 그슨대 ‘어스름달’
조금 전부터 현찬의 감을 자꾸 쿡쿡 찌르는 기분 나쁜 존재의 주인공이 바로 녀석이었다.
“설마 이렇게 가까이 있었을 줄은 몰랐는데요.”
그 위험한 녀석을 마을 바로 옆에 끼고서 용케도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현찬의 말에 경루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부터 가까이 있지 않았습니다. 녀석은 예전까지만 해도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멀리 있었다고 하심은…….”
황설영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자기도 모르게 떨고 있었다. 그 기분 나쁜 예상이 현실이 맞다며 경루 또한 주름진 눈살을 꿈틀거리며 황설영의 말에 동조했다.
“녀석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잠들어있던 <난제>가 다시 움직인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 한 국가에 재앙에 준하는 비상이 걸리기 충분한 일이었다.
“참 난감한 타이밍에 오고 말았군요. 아니, 오히려 차라리 지금 도착한 게 더 나았으려나.”
왜냐하면, 조금만 더 늦었다면, 현찬이 오기도 전에 어스름달이 예전의 악몽을 되살렸을지도 몰랐으니까. 이야기는 이걸로 충분했다. 현찬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몸을 풀었다. 상황이 긴박한 걸 알았으니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가, 강현찬 헌터님? 지금 어딜 가시려고 그러십니까?”
“상황 파악은 이제 이걸로 끝이에요.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지금 당장이라도 움직여야죠.”
아직 남은 시간은 조금은 더 있겠지만 그 정체불명의 가면 녀석들이 여기서 무슨 짓을 더 벌일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것을 고려하면 지금이라도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혹시 모를 피해를 막기 위한 최선의 길이다.
“협회에 연락은 해 두셔야겠어요.”
현찬은 장지문 바깥을 바라보았다. 황설영도 느꼈는지 그녀의 표정 또한 굳어졌다.
“가야 할 길이 좀 머네요.”
허리춤에 찬 테레이오스테를 뽑아든다.
“벌써부터 불청객이 찾아오고.”
“설마……!”
경루의 찢어질 듯한 기함을 뒤로하고 현찬은 장지문을 열어 초가집 밖으로 나왔다. 지푸라기를 엮어 대충 만든 울타리의 바깥에서는 푸른 인화(燐火)를 공중에 띄운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일단의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조금 전에 마을에 찾아온 인간이 여기에 있다고 들었다!”
선두에 선 것은 달걸보다도 덩치가 머리 하나는 더 커다란 근육질의 남성이었다. 달걸도 만만치 않게 덩치가 있었지만 지금 저 녀석은 그보다 훨씬 더 부피가 풍만할 정도. 대충 걸친 호피 무늬 조끼의 바깥으로 드러난 근육은 조금만 힘을 줘도 어지간한 사람은 초주검으로 만들 위험성을 지니고 있었다.
도깨비 바차.
녀석이 현찬을 막기 위해서 직접 촌장에게 반기를 든 것이다.
“바차! 이게 무슨 짓이냐!”
“감히 촌장님을 배신하려는 거냐!”
경루와 달걸이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소리 질렀지만 바차는 오히려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배신? 웃기는구나. 언제까지 내가 나보다 약한 이런 구닥다리 같은 놈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지내야 하지?”
“그래서 반기를 들겠다는 거냐!”
“반기? 아니, 이것은 혁명이다. 우리 괴력난신이 다시 예전의 영광을 되찾기 위한 혁명!”
“그 혁명에 죽어 나갈 생명은 고려하지도 않는 건가!”
“쯧. 이래서 늙은이들은 안 돼. 그게 뭐가 어때서? 이런 혁명에 쓸려나갈 녀석들은 결국 나약한 놈들뿐이야. 그런 놈들은 오히려 빨리 뒤져버리는 게 이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겠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바차의 건방진 행동에 촌장의 얼굴에 힘줄이 돋아났다.
하지만 여기서 행동으로 나설 수 없었다. 그는 너무나도 늙은 도깨비고, 바차는 마을 내에서도 가장 강하다고 평가받는 최고의 씨름꾼이었으니까.
“무의미한 입씨름은 여기서 그만두지.”
그 순간 나선 것은 현찬이었다.
“호오? 네가 바로 그 녀석이구나?”
“피차 서로 의견도 맞지 않은데 괜히 말로 풀어나갈 이유가 있겠어?”
“크하하! 인간 주제에 호탕해서 좋구나!”
고개를 뒤로 젖히며 크게 웃어넘긴 바차는 이내 웃음을 그치며 살기 어린 눈동자로 현찬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너무나도 건방져.”
“건방진 건 너야. 마을에 방문하자마자 이렇게 공격받는 내 처지에서는 너는 정말 짜증 나는 녀석이거든.”
거기에 더해서 그 새 가면의 조직과 연관이 된 것만으로도 현찬의 기분을 거슬리게 하기는 충분했다.
“소환. [황금인형].”
간단한 시동어를 읊자 테레이오스테의 검신에서 황금빛 가루가 스르르 새어 나오더니 어느덧 한 명의 아름다운 소녀의 모습을 이루었다. 에크티는 자연스럽게 양손에 화려한 황금빛 단검을 쥐고 있었고 그녀의 복장 또한 전투에 특화된 듯 새하얀 도릭키튼 위로 중요 부위에 간단한 방어구가 걸쳐져 있었다.
찬연한 황금빛과 함께 등장한 에크티를 보며 도깨비들과 요괴들이 경계의 빛을 띠었다. 딱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금빛 소녀의 존재는 그들에게 매우 이질적인 존재였다.
황설영도 황급히 현찬의 곁에 섰다. 달걸도 보고만 있지 않겠다는 듯 상의를 벗어 던지며 싸울 준비를 했다.
“강현찬 헌터님은 정말 사람을 끝도 없이 놀라게 만드시는군요.”
황금인형 에크티를 보며 어딘가 복잡한 시선을 던진 황설영이 한탄하듯이 내뱉었다.
현찬은 그런 황설영에게 뭘 이런 걸 가지고라는 시선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 보여줄 수 있는 게 더 많이 남았는데 벌써 놀라긴 이를걸요.”
현찬은 눈을 감고서 정신을 집중했다.
환몽촌에 오기 전부터, 이매망량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졌을 때부터 이미 이 순간을 위해 생각을 해 둔 영령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헤르메스의 도움은 필요 없었다.
또 한 번의 성장을 끝마친 현찬은, 이제 영웅급을 넘어서서 준신급 까지는 무리 없이 불러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지금 현찬이 불러내는 영령 또한 바로 준신급에 필적하는 존재였다.
“무, 무슨 일이지?”
“크윽!”
갑자기 불어 닥친 강렬한 돌풍에 바차를 비롯한 요마들은 제대로 눈을 뜨지 못했다. 요력을 일으켜 몸에 힘을 주지 않는다면 날아 가버릴 정도로 강렬한 바람이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현찬의 주변에 있는 자들은 그 누구도 그 바람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고국의 땅. 그리운 고향. 나의 옛 친구들.]
그런 현찬의 등 뒤로는 화려한 색조의 옷을 입은 장발의 남자가 허공에 떠 있었다.
어딘가 신비로움을 간직한 그의 눈은 화려하게 펼쳐진 환몽촌의 경관을 빠짐없이 담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바차와 요마들을 직시한다.
“……!”
바차는 자기도 모르게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현찬의 기도가 바뀌었다는 것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젠장! 모두 죽여라!”
바차의 발악과도 같은 외침과 함께 남자 또한 입을 열었다.
[나에게 반기를 드는 도깨비는 또 오랜만이로구나.]
그가 내뱉은 말은 매우 오만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럴 자격이 충분했다.
그는 이 한반도에 존재하는 모든 도깨비의 왕이었으니까.
<도깨비왕(燐王) 비형랑(鼻荊郞)>
세상천지에 존재하는 온갖 괴력난신과 이매망량의 주인.
그가 반기를 드는 도깨비를 향해 검을 뽑아 들었다.